우리는 흔히 1백년을 단위로 한 시대구분에 익숙해 있다. 1백년의 한 세기가 끝나고 머잖아 21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앞으로의 1백년을 내다보는 것이 중요할 터이지만 눈을 거꾸로 돌려 1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떨까. 1백년전의 우리 사회와 시대상을 더듬어보기로 한다. 그 안내자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기간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 큰 전환의 시기였다. 서구 열강의 침략이 노골화하는 가운데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 일이 급선무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봉건사회의 누적된 모순을 극복하고 근대로의 전환을 모색해가던 시기였다.
○친일파 매국행위 등 고발
지금은 시대도 변했고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달라졌다. 하지만 ‘구제금융’의 거센 물결 속에서 민족의 자존과 자립이 여전히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음을 상기할 때 근대 전환기의 시대상을 반추해 보는 작업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고전이라면,‘매천야록’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한국사회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고전중 하나다.
두 책 모두 국가에서 편찬을 주관한 역사서가 아니라,한 개인에 의해 편찬된 야사적(野史的)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매천야록’은 고종이 등극한 해(1864)로부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는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저자인 황현(黃玹) 자신의 견문을 토대로 하여 기록한 것이다.
세도정권의 부패상,청·일 양국간의 각축,갑오경장,동학농민전쟁,러시아 세력의 침투,노·일 전쟁의 발발과 경과,친일파의 매국행위,의병활동,탐관오리의 비행 등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격동기의 역사적 상황과 그 추이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망국의 원인과 과정 규명
‘매천야록’을 읽을 때 우리는 역사자료로서의 풍부한 내용과 함께 그 안에 투영돼 있는 저자의 날카로운 역사의식과 비판정신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황현은 실학사상의 학문적 기반 위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당대의 역사를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비판적 안목을 바탕으로 해 기술코자 하였다.
예컨대 서구문물의 침투에 대해 수용할 것은 수용하되 자본주의 상품의 유통이 국내생산과 재정에 미치는 부정적 결과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든가,외세에 의존적인 개화파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자립적이며 자주적인 개혁정책을 추구하고자 한 것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한 1894년 이후의 기록이 풍부한데,이는 ‘매천야록’에 투영돼 있는 뚜렷한 역사의식에서 비롯된다. 1894년은 망국의 전조를 확인하는 시점으로서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조선 침략의 기반을 확립하는 해였다.
이에따라 1894년 이후 1910년까지 17년간의 기록이 일종의 본론에 해당하는 것으로,일본의 침략과정과 이에 대응하는 민족운동에 대한 서술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망국의 내외적 원인과 그 과정을 규명하기 위해 저술된 ‘매천야록’은 동학농민전쟁 발발의 내적 원인이었던 봉건적 사회체제의 모순을 밝히고 농민전쟁 이후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과 이에 맞서는 민족운동세력의 제반 동향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매천야록’에 깃들인 역사의식을 형성한 바탕으로 저자 자신의 일관된 삶의 자세를 들 수 있다.그것은 한마디로 문학과 역사와 행동의 일치였다. 시를 통해 어지러운 시대의 비분강개한 마음을 노래하기도 하며,급변하는 역사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면서 이를 역사로 기록하는 한편 민족의 운명과 함께하며 지식인으로서의 본분을 행동으로써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다.
국가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에게 책임의식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들의 판단 하나하나가 다수 또는 전체 국민의 행·불행에 직접 관련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그러한데 하물며 나라의 존망이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시대에 있어서랴!
○여론에 따라 엄정한 평가
‘매천야록’에는 주변에서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한 사건 또는 풍문 등이 다채롭게 수록돼 있어 당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같은 점은 당대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우국지사에 대해서는 열렬한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한편,부패관료나 친일파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풍자와 야유의 화살을 던지고 있다. 저자는 자기 시대를 냉철하게 관찰하는 비판적 안목 위에서 당대 사실을 가능한한 객관적으로 광범위하게 기록하는 한편,식자층과 민중의 여론을 바탕으로 특정 사건과 인물에 대한 예리한 논평을 덧붙여놓음으로써 자기 시대의 역사에 대해 엄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강화도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당시 조정의 일면을 들여다보자.당시 조정에서는 연일 모여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었다.회의를 주재한 사람은 흥선대원군의 형 이최응이었다.
○사감을 배제한 역사의식
어떤 사람이 “강화를 해야 합니다”고 주장하면 “그렇지요”라고 대답하고,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나서서 “싸워야 합니다”고 하면 역시 “그렇지요”라고 대답했다.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하루종일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날이 저물면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이 이최응을 ‘예예정승’이라 불렀다고 한다.줏대도 없고 소신도 없이 무사안일로 일관한 당시 지배층의 무능함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이처럼 당시 여론과 동향을 적절히 원용해 특정 인물의 공과를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공정하게 평가한 데서 ‘매천의 붓끝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다(梅泉筆下無完人)’는 말이 나왔다.
작은 한 예에 불과하지만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기 시대의 역사에 충실했던 저자의 예리한 비판적 시각을 접할 수 있다. 집권세력의 부패상,망국에 이르는 과정,이에 맞서는 민족적 저항,식민지로의 전락을 바라보면서 암담한 현실앞에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굳게 지켜나가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