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디창옷 / 서안나 말은 사람에게 상처 입혀 무릎 꿇게도 하지만 봇디창옷ⁱ은 아픈 곳을 감추는 소매가 긴 저녁이 되기도 합니다 점점 사라지는 제주어를 적어보는 봄밤 제주의 아이들은 정작 제주어를 모릅니다 나이 든 어머니와 옷장을 정리하다 낡은 봇디창옷에 손이 갑니다 봇디창옷에 뭉클거리는 오 형제가 검은 배꼽을 오똑 내놓고 누워 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할 말이 많아집니다 어머니의 제주어에는 뼈를 버린 사람이 삽니다 눈과 입에서 웃음이 먼저 번지는 어머니 세상의 모든 국경이 삶은 국수처럼 무너집니다 바람 든 콥데사니² 껍질 같은 어머니의 귀에서 아이들이 옷을 벗고 물뱀 되어 흩어지고 맞춤법에 걸린 바당과 할망당 심방³들이 제물 차롱을 지고 징게징게 꽹과리를 치며 걸어 나옵니다 어미가 물애기⁴에게 소매가 긴 봇디창옷을 입힌 마음 80년 된 콥데사니 같은 알싸한 제주어가 내 눈에도 뾰족하니 돋습니다
⸺⸺⸺⸺⸺⸺ 1) 봇디창옷 : 귀한 아기에게 소매가 밤처럼 긴 옷을 삼베로 만들어 입힌 어미의 마음. 어미는 아기가 전생의 기억을 지우는 동안 깃과 섶을 달지 않고 기다리지. 2) 콥데사니 : 제주에선 콥데사니는 제사 음식에 쓰지 않지. 콥데사니라고 부르면 제주의 제삿날이 마늘처럼 매워지네. 3) 심방 : 신을 모시는 심방들이 징게징게 굿하는 날 신도들이 즐비한 제물 든 차롱을 굿당에 나란히 올린다. 억울하게 죽은 저싱 사름을 위해. 4) 물애기 : 물애기라고 부르면 나도 물렁거리는 진흙 덩어리가 되네.
- 시집 『애월』 ( 여우난골, 2023.11)
* 서안나(徐安那) 시인 1965년 제주 출생. 한양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학위. 1990년 《문학과 비평》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발달사』, 『새를 심었습니다』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 『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 『정의홍선집 1ㆍ2』, 『전숙희 수필선집』,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 불교문예작품상 수상(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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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나이 든 어머니와 옷장을 정리하다”가 낡은 “봇디창옷”을 발견합니다. 제주의 어머니들은 갓난아기가 “전생의 기억을 지우는 동안 깃과 섶을 달지” 않은 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물애기”는 “소매가 밤처럼 긴 옷을” 입고 “바당”에 내린 별빛처럼 반짝이는 꿈을 꾸지 않았을까요? 낡은 아기 옷을 발견하고 “눈과 입에서 웃음이 먼저 번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국경이 삶은 국수처럼” 무너져버리는 것 같았다는 시인…… 낡은 “봇디창옷”처럼 점점 잊혀가고 있는 “제주어”로 어머니와 옛이야기를 나누며, 시인은 “알싸한” “콥데사니”라도 만진 사람처럼 눈가가 젖습니다.
- 최형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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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제주도의 비극적인 역사를 고발함과 더불어 제주어의 발견을 통해 제주도의 원형과 서사를 조명한다. 다수의 제주어들이 등장하는 뒤의 시에서 "나이 든 어머니"는 제주어를 쓰면 "눈과 입에서 웃음이 먼저 번지"고, "세상의 모든 국경이 삶은 국수처럼 무너"진다. 시인은 이러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점점 사라지는 제주어를 적어보는 봄밤"에 "80년 된 콥데사니 같은 알싸한 제주어"가 뾰족하니 돋는다고 쓴다. 이 시가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안온하고 행복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제주어에 대대로 내려온 제주도 고유의 원형과 유전자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제목으로 삼은 '봇디창옷'은 이 원형과 유전의 한 상징이다.
- 이홍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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