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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룡(1960년 ~ 2012년)은 전라북도 군산 출신의 노동자이다.[1]
월매출 3천만원의 시계점을 운영 하면서 70만원짜리 구두를 신고 500만원짜리 시계를 차고 다니는 등 씀씀이가 컸다. 사업에 실패 하여 수억원의 빚을 지게 되었고 빚을 갚기 위해 수많은 일을 하였다. 목욕탕 청소, 신문 배달, 떡 배달, 폐지 수집, 학원 차량 운전 등 하루 22시간 동안 노동을 하며 10년에 걸쳐 빚을 모두 갚았다. 알바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008년 10월 29일에 남은 빚을 모두 갚았으나 그 뒤에도 장시간의 노동을 하며 연간 5000만원 이상의 돈을 벌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책 3억5천만원의 전쟁을 출판 하기도 하였다.[2] 몇몇 방송에 출연 하였다. 2012년 대장암으로 사망 하였다.
2008년 방송분
그리고 4년뒤
2012년 이종룡씨의 일과표 항상 알바. 하루에 수면시간은 3시간정도
식사도 거른적이 많다. 시간은 곧 돈이라고 생각하는 알바왕
안타깝지만 저말은 잘못되었음. 저런 식습관과 휴식부족으로 결국 이방송이 나가고 3개월후 이종룡씨는 대장암말기로 사망함
14년전 빚을 갚기위에 이를 악무는게 버릇이 되어 송곳니가 거추장스러워 벤치로 송곳니 두개를 뽑아버린 아저씨
빗을 만진적이 없다는 이종룡씨
7시에 집에 귀가한후 2시간 취침후 10시에 신문속지끼우는 알바를 하는 이종룡씨
그것이 끝나고 목용탕에서 청소알바를 하고 그게끝나면 다시 새벽4시에 신문배달을 하는 이종룡씨
월수입 550
그러나
일요신문] 하루 20시간 일하고 400㎞를 이동하며 3억 5000만 원의 빚을 갚은 ‘알바왕’ 이종룡 씨가 사망한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최근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 씨가 대장암으로 별세했다는 미확인 이야기가 떠돌면서 그의 사망 여부가 큰 관심을 모았다. 지난 2009년 이 씨의 경험을 담은 책 <3억 5000만 원의 전쟁>을 펴낸 출판사의 한 관계자는 지난 7일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인세 때문에 이종룡 씨와 연락을 취하다 그의 아들로부터 사망소식을 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 우리도 충격이었다”라고 말했다. 하루 2시간여의 쪽잠을 자면서 수억 원의 빚을 모두 갚아 사회에 귀감이 되었던 이 씨의 갑작스런 죽음의 뒤안길을 따라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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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룡 씨의 사연은 지난 2008년 MBC <시사매거진 2580>을 통해 소개가 됐고 그 이후 2010년 OBS <전설의 시대>, 2011년 SBS <궁금한 이야기 Y>, 2012년 MBC <TV특종 놀라운 세상>에 잇따라 출연하며 그 사연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2012년 5월 KBS1 <강연 100℃>에 출연한 이후 갑자기 소식이 뚝 끊겼다. 자연스레 이 씨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으나 최근 그의 근황을 궁금해 하던 네티즌들 사이에선 이 씨가 대장암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진위 여부를 놓고 네티즌들은 갑론을박을 벌여왔고, <일요신문>에 의해 그 소문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다.
<일요신문>은 이 씨가 책을 출간한 출판사에 아들의 연락처를 수소문했지만 신분공개를 꺼린 아들은 출판사 관계자에게 아버지의 사망소식만 전했을 뿐 정확한 사망시기와 경위 등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고 한다. 또한 취재진은 과거 이 씨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여러 곳들도 수소문했으나 2012년 이후 그를 본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소식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 씨를 학원차량 운전사로 고용했던 한 태권도장 관계자는 “사망 소식은 듣지 못했으나 2012년 그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이 씨는 1960년 전라북도 군산 출신으로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전주시 효자동에 위치한 시계도매점의 사장이었다. 잘나갈 땐 월 매출이 3000만 원에 육박할 정도였다. 명품으로 온 몸을 휘감고 다니며 돈을 흥청망청 쓰며 생활했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사업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거래처가 하나둘씩 끊겼고 곧이어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그러면서 1억 원의 대출로 시작한 그의 사업 빚은 천정부지로 늘어났다. 게다가 막연한 기대감에 빨리 사업을 접지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 빚은 결국 3억 5000만 원으로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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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씨는 부도를 내고 말았고 아내와 함께 야반도주를 택했다. 고소를 당하기도 했으나 주소지가 불투명한 상태라 기소중지가 되기도 했고 군산검문소에 걸려 수갑을 차고 유치장에 끌려가는 경험도 해야만 했다. 끝내 구속위기에 처한 이 씨는 자신이 이렇게 무너지면 가족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 마지막으로 작은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4000만 원을 겨우 받아 합의를 보고 위기를 넘겼다.
이후 이 씨는 돈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떡 배달, 학원차량 운전, 목욕탕 청소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 씨는 2009년 대우자동차가 경영난으로 떡 배달 계약을 해지했을 때도 그는 곧바로 다른 아르바이트로 대체하는 등 절대 쉬는 법이 없었다.
또한 이 씨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신문 배달하러 가는 30초 남짓한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신문 헤드라인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익혔다. 차가 신호에 걸릴 때면 <좋은 생각> 같은 작은 책을 틈틈이 읽기도 했다. 예상보다 아르바이트가 30분 정도 빨리 끝날 때면 폐휴지를 줍는 부지런함도 보였다. 이렇게 그가 하루에 일하는 시간은 총 20시간으로 이동하는 거리만도 약 400㎞에 달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도 생겼다. 한 달을 기준으로 신문 배달 70만 원, 목욕탕 청소 60만~80만 원, 학원차 운전 70만~80만 원, 떡 배달 150만~180만 원. 여기에 신문 판촉 수당 및 폐지 판돈을 합치면 450만 원 정도 생겼고 350만 원을 뚝 떼어내 10년 동안 빚을 갚는 데 사용했다. 원금과 이자를 갚는데 거의 모든 돈을 쏟아 부은 셈인데 2008년 10월 마침내 그는 빚을 모두 청산했다. 하지만 이 씨는 빚을 갚고도 돈을 쉽게 생각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고 2009년 이러한 사연을 담아 <3억 5000만 원의 전쟁>을 출판하고 여러 방송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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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아르바이트로 빚을 갚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 씨에게도 숨기고 싶은 치부가 있었던 것. 처음에는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임시방편으로 일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고졸 학력에 변변한 기술 없는 40대 남자가 제대로 된 직업 갖기는 어려웠다. 그를 불러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고 심지어 공사판에 가도 제대로 된 기술이 없어 인부들의 심부름만 할 뿐이었다.
그는 새벽에 신문배달과 저녁 목욕탕 청소를 하고 한 달에 150만 원 남짓 벌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수입이 생기자 그의 나쁜 버릇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바로 음주와 도박이었다. 점점 집에 술에 취한 채로 들어가는 일이 빈번해지고 한번은 이틀 밤을 화투장을 들고 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들어간 그는 컴컴한 거실에서 흐느껴 우는 부인을 발견했다. 집에 전기와 가스가 나간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 고생하고 있다고 깨달은 그는 펜치를 가져와 송곳니 두 개를 뽑으며 열심히 살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그때부터 그는 아르바이트도 ‘직장’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했다. 혹여나 나쁜 습관들이 다시 도질까 아르바이트 개수를 늘려서 몸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한 달 용돈도 2만 원 남짓이었다. 하루로 계산하면 약 700원꼴이다. 이렇게 이 씨는 잡생각 없이 혹독하게 일만 했다. 그렇게 ‘알바왕’ 이종룡 씨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렵사리 되찾은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빚을 다 갚던 날 이 씨는 “아내와 함께 살 수 있는 전셋집을 마련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지만 고된 아르바이트의 후유증으로 그 작은 소망마저 이루지 못한 채 결국 가족 곁을 떠나고 말았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강기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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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이종룡씨

첫댓글 헐
상처뿐인 영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