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9월에 태어났으니 육이오때 나는
우리나이로 다섯살이고 만으로는
네살에서 두달쯤 빠진다...........
그런 내가 겪은 육이오동란을 돌아본다
내가 태어난 집은 서울서대문구 영천동이다
큰길가집이었던 우리집은 길건너에
서대문형무소를 마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길건너 형무소마당은 우리 놀이터였다
교도관들의 검도연습을 창문으로 보기도 하고
조금 걸어가면 있는 독립문둘레에 걸터앉어
놀기도 하고 그랬다...우리집은 전쟁이 나고
바로 피난을 못가고 여름을 그냥 집에서 보냈다
당시 종로에서 백화점을 운영하시던 울노인은
돈을 자루에 넣어 마루바닥을 뜯어 보관하고
다섯살짜리 어린딸을 가게앞에 고구마몇개 삶어서
좌판을 벌이고 앉혀놓고 집에서 두분이 내다보며
웃으셨단다.. 예나 지금이나 간이 크지못한 어린아이는
차마 고구마한개를 덥석 먹지못하고 꽁데기를 조금씩
떼어먹고 있었으니.
울노인은 밤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셨고..조금 유명인사였던 울노인 공산군에게 납치를
당해 이북으로 끌려가게 됐다.. 미아리수용소에 갇혀있을때
엄마는 두살짜리 동생을 업고 아홉살짜리 오빠는 걸리고
나는 앞집에 맡기고 그러고 아버지를 찾아 헤메셨는데
헛걸음을 하시고 들어온 어느날 집에 들어선 우리는 방문을
열고 깜짝 놀랐다...수염이 잔뜩 긴 낯선 남자가 누워있었다
미아리고개를 넘을때 공산군이 잠간 한눈파는사이에
죽기를 하고 도망쳐오셨다...했다........
그리고 우린 1월 4일 서울을 공산군에게 내주고 정부가
철수를 할때 할머니의 형제들이 사시는
전라도 광주로 피난을 갔다..그겨울에 나는 폐렴을 앓고
있었다.. 그전쟁중에 의사샘의 말처럼 부모잘 만난덕에
그귀한 페니실린주사를 하루에 다섯대씩 맞고
열이 펄펄끓는상태로 서울역에서 화물차짐더미에 묻혔다
다시 군용열차짐칸에 실려서 한밤중에 서울을 벗어났다
이모할머니들께서 어렵지 않게 살고 계시고 엄마가 바로
전남여고에 미술선생님으로 교편을 잡으셔서 광주에서
보낸 4년은 전쟁하곤 거리가 멀게 경제적인 어려움도
모르고 학교도 다니다가
전쟁이 끝난후에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울노인은 하시던 일을 접으시고 새로운길로
들어셔서 그후 우리는 그리 넉넉하게 살지 못했다
형제들중엔그런 울노인을 이기적이라고 불평도 하지만
난 그래도 울노인이 고맙고 좋고 태산같은 존재였고
지금도 울노인만 생각하면 울노인은 나한텐 눈물이다.
다섯살짜리가 기억력이 너무 좋지 않은가...!!
첫댓글 6. 25 라는 전쟁에 추억이 있네요
전 전후시대에 태어났고 또 부산이 고향이라
우리 부모님들은 고생을 덜하셨더라구오ㅡ
아ᆢ부산ᆢ몇번가봤어요ᆢ^^ᆢ계속 서울에 있을수없어 외가가 있는 광나루에 며칠피해있다 걸어서 집으로 오기도 하고 했어요ᆢ
다섯짜리 기억력이
참 좋으시네요..
저는 님보다 7년후에
휴전동이입니다
좀더어릴적 일도 기억합니다 ᆢ세살때 동생이 생겨서 한밤중에 엄마가 보고싶은데 무서운 할아버지가 방문을 지키셔서 ᆢ할아버진 딸을 아주 싫어하셔서 나를 아주 미워했거든요ᆢㅎㅎ
전쟁 이듬해 태어나고
남쪽에 살다보니 6.25의 참상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시골 우리 넓은
집에는 피난민들이 임시 거처로
많이 살았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다섯살때의 기억력은 정말 대단하며
부친은 원로 연극인이였고 모친은
미술선생님이였으니 예술가 집안의
영향으로 선배님도 음악에 뛰어난
감각이 있나 봅니다
농장에서 작업하다 비가 많이 내려
방금 집에 도착하여 정구지전에
막걸리 한잔하면서 즐거운 오후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비때문에 작업을 ㆍ정구지가 부추인가요ᆢ^^ᆢ막걸리와 정구지부침개 비오는날과 너무 어울립니다 ᆢㅎᆢ아버지와 엄마는 일본동경에서 미술대학에 다니셨고 엄마를 모델로해서 그린그림 이 입상을 하시고 ᆢ육이오후로 진로를 바꾸셨어요ᆢ에고 ᆢ집안내력이 그만 ᆢㅎㅎ
저는 초등학교 삼학년전 일은 아예 기억에도 없답니다
부친 께서는 위험 천만 했던 아찔한 경험이셨겠습니다
저는 6.25 전후 세대라 상황을 잘 모릅니다만
제 부모님은 이북 분들이신데
1.4후퇴때 월남 하셨다고 들었는데 고생 무쟈게 했다고 하시더라구요
참 대단한 기억력이 부럽네요
즐 감상 하였습니다
그게요 ᆢ늙어서 그래요ᆢ노인들은 옛날일은 다 기억하고 현재일은 전혀 깜빡하지요ᆢ^^ᆢ우리도 피난갈때 울엄마가 고생했을거에요 ᆢ아버진 부산으로 따로 가시고 늙은 친정엄마하고 아픈나를 데리고 어린동생데리고ᆢ^^ᆢ
기억력이 대단 하시네요
경험하진 않았어도 전쟁의 두려움 같은걸 알고있지요
다시는 이땅에 그런일이 일어나선 안되는데....
그렇습니다 지금의 아이들에겐 지금보다 더 멋진세상을 물려줘야 하는데요ᆢ^^ᆢ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배고픔의 자서전>을 읽는 것같아요
너무 높이시면 금방떨어집니다 ᆢ
차순맘님의 한국전쟁에대한기억은 천국과 지옥의연속입니다.그당시를 회상하는집안어른들의 회상에의하면 페니실린주사하나로 사람의생 과 사가결정되어진다했으니 차순맘님은 행운을 얻어 오늘을살고있는것같아요.나의 출생지가 서대문구북아현동이니 같은구에서 어린시절을보낸것같아요.늘건강하시길바람니다.
할아버지께서 딸을 싫어해서 그당시로는 집안에 큰집에 하나와 내가 아주 미움의 표적이었거든요
아버지한테는 남자형제들의 눈총받을만큼 사랑을받었지요ᆢ^^ᆢ덕분에 지금도
살어있습니다ᆢㅎ
진짜 놀라운 기억력이십니다.
차순맘님의 총기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
그 시절, 좋은 집안에서 잘 자라셨네요.
그 귀한 페니실린 주사를 아낌없이 놓아주신 부모님 덕분에 큰 병도 나으셨고요.
이런 역사의 기록은 잘 보존되어야 합니다.
생생한 증언을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잠시 광나루에 있는 외가로피해 있을때요 대문옆에 소외양간이 있어요ᆢ무서워서 한번 나가면 밖에서 집에들어가는 식구들 기다리느리ㅡ ᆢㅎㅎᆢ오후에 비행기뜨면 거리에 나오지말라고 싸이런울릴때 길을 한번 뛰어서건너묘ᆢ그럼 호루라기를 부는데 그아슬아슬함도 즐긴 철없는 아이였어요 ᆢ
저도 어렴풋하게 기억나는건 울 아버지등에 업혀서 피란가던 길이 생각납니다 힘드시면 잠시 걸리기도 하셨던^^
총소리까진 기억 없구요
보따리들 머리에 이고 줄지어 걸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4살때였으니까요
6,25의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 한답니다요~~♡
맞습니다 이땅에 다시는 전쟁도 없고ᆢ코로나에 공포에서도 빨리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ᆢ울아버지 군소리없이 하루종일 걷다 집이 거의 다외서 룩섹위에 얹어주시곤 했어요ᆢ좀 빨리 얹어 주시지ᆢㅎᆢ
다섯 살의 기억이 대단하네요.
전쟁을 직접 겪으셨으니 해마다 돌아오는 유기오가 우리가 생각하는 기념일 수준이 아니겠어요.
암만 세월이 흘러도
북한은 여전히 저러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 많은일들을 기억해요 ᆢ그런데 지금 일은 잘잊어요ᆢ그래요ᆢ불안하지않은 내일을 아이들이 살게해줘야하는데요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