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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믿음의글 스크랩 계 2:18-29 두아디라 교회
shark 추천 0 조회 57 08.11.30 20: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목 : 두아디라 교회

본문 : 계 2:18-29

 

                                          김광영 목사

 

※ 마음문을 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갈등이 있다. 믿지않는 사람은 믿지 않는 세상에 자기정욕대로 그렇게 당연하게 살지만,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주님의 뜻을 묻게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먼저 생각하고 순간적으로 내 마음에 좋은대로 혹은 주위 사람이 하는 대로 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생각하며 갈등한다. 오늘 두아디아 교회에 불꽃같은 두 눈으로 빛난 주석같은 발을 디디시며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보자.

 

※ 본문과 씨름하며

 

1.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의 방위기지였다. 로마의 평화를 지키는 군사도시이다. 뿐만아니라 상업도시로 빵굽기,염색,가죽,의목,용접등의 여러직종이 길드 조직(조합)을 만들어 산업과 상업이 활발한 도시였다. 각 길드마다 수호신이 있어 회원들은 자기가 가입한 길드의 신을 섬기게 되어있었다. 당시의 제의는 잔치를 형태를 띄고 있었는데 제사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부도덕한 연회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생업에 종사하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와 행음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행 16:14의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는 한 여자가 바울의 말을 순종하는 장면이 나온다. 염색길드에 소속한 상인 루디아가 빌립에게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영접한 후 설립한 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일 가능성이 크다.

 

2. 주님의 칭찬과 책망

 

19절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업과 행위가 있는 교회이다. 여러 가지 실천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교회는 첫사랑이 나중에는 없어졌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 행위들보다 나중행위들이 더 많았다. “네일들-사랑-믿음-섬김-인내-네일들 ” 여기서 사랑과 믿음의 실천의 동기이고 섬김과 인내는 실천의 표현이다. 사랑에서 우러난 섬김이 있고 믿음에서 생겨난 인내가 있었다. 두아디라 교회의 행위와 동기는 주님이 칭찬하실만 하였다.

그러나, 책망하신 부분도 있다. 20절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이세벨은 왕하 9:22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이스라엘 전역에서 숭배하게 ?고 음행과 마술도 그 종교의식으로 행하게 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여인이 두아디라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

우상숭배와 음행은 발람의 교훈 즉 니골라당의 교훈으로 지적되었다. 에베소교회는 이런 이단을 폭로해서 이겼지만,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이런 이단들을 용납하고 유혹에 빠져 주님앞에서 심각한 죄를 저질렀다. 소아시아 지방의 니골라당의 유혹은 철거머리 같이 달라붙어 피를 빠는 이단이었음을 알수 있다.

그녀는 미모인데다가 영적인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 행세했다. ‘자칭 선지자’라는 구절을 보면, 이세벨은 사이비 예언의 은사를 소유한 것 같다. 하나님의 종들이 그녀의 가장된 은사와 혹할 정도의 미모에 넘어간 것이다. 햇살처럼 곱고 매혹적인 여성이 영적 능력까지 행할 때 사람들은 ‘저 여인이야 말로 하나님의 대변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권위있는 여인의 입으로 음행과 우상숭배는 괜찮다는 신의허락이 난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세벨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두아디라에는 각종 사업 조합들이 있었고, 조합마다 수호신이 있고 당시의 계모임같은 데서는 의례히 수호신에게 제사하고 그 제사에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하는 일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조합에 소속되지 않으면 생업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우상숭배와 음행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얼마나 컸겠는가? 두아디라 교회신자들은 요즈음 직장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신앙인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직장에서 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겪는 갈등을 매일 겪어야 했을 것이다.

두아디라 신자들은 사회의 요구대로 살것인가? 주님 말씀대로 살것인가의 기로에서 갈등했을 것이다.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면 사회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칠 것이고 사회의 요구에 따르면 주님 말씀에 어긋나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미모의 여자 선지자가 나타나 예언을 해대며 “여러분의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는 한 그런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교회에만 나오면 세상안에서 세상에 속해 있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길입니다” 라고 유혹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영적인 낭떠러지 게임>이다. 세상이라는 낭떠러지에 빠지지 않으면서 거기에 얼마나 갈 수 있나하는 것이다. 죄의 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그 불에 얼마나 다가 가는가 하는 것이다. -고기가 낚시바늘의 지렁이를 입질하는것-

 

3. 신실한 자들

 

이세벨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도 있지만, 그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24절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그들은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고전2:10에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깊은 것은 구원과 관계되어 있지만, 사단의 깊은 것은 멸망과 관계되어져 있다. 이세벨과 그 추종자는 사단의 깊은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죄의 깊은 것을 실제적으로 다 체험해야 악을 백지화하는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

뭐 별나게 믿는다고 안마시고 안하나? 사람들이 하는대로 해도 상관이 없다. 세상의 죄악에 대해 노!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자유가 아니라 율법의 굴레다. 직장에서 분위기에 맞추어 즐기며 살아라. 이세벨의 이러한 교훈은 두아디라 교회에 폭풍을 몰고 왔다. 그러나,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선한데는 지혜로우나 악한데는 미련한- 신실한 자들이 남아 있었다.

 

4. 경고와 약속

 

주님은 이세벨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형벌을 경고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했다. 21절에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는 말씀이 있다. 그렇지만 그녀가 회개하지 않자 형벌을 내리시겠다고 경고하셨다. 22-23절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고 하셨다.

주님은 이세벨처럼 교묘한 죄인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리고 회개하면 용서하겠다는 것을 암시하신다. 주님은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다.(벧후3:9)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매질을 하신다. 회개의 기회는 모래시계다. 모래알이 다 내려가면, 형벌이 따른다.

이세벨과 그 추종자에게는 형벌을 경고하시는 한편 죄악에 동참치 않은 신실한 자들에게는 상급을 약속하신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24-27) 이세벨의 유혹은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이겨야 한다고 말씀한다. 우리의 생명이 붙어있는한 ‘여호와냐 바알이냐?’ ‘그리스도냐 시이저황제냐?’ ‘주님이냐 나의 쾌락이냐?’의 싸움은 계속된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자는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통치권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 정곡을 콱 찌르며 -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처럼 사랑과 믿음의 동기에서 봉사와 인내를 실천하는 행위들이 있어야 한다. 처음보다 나중 행위가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실천 가운데 이세벨의 유혹을 경계해야한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굳게 붙잡자.

우리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분이시다.(계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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