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에제키엘 18,1-10ㄱ.13ㄴ.30-32 마태오 19,13-15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에제키엘 예언서 18,30)
오늘날 사회는 불공정한 출발점이 문제가 됩니다.
옛적에는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하였지만 오늘날엔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출발점이 차이가 나면 왠만해서는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없게 됩니다.
젊은이들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부모의 기본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사회적 성공을 거두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공정하십니다.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조상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무 상관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직 우리 각자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신답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열심한 신앙인이었다해도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큰 죄인이었다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의 그 어떤 유형무형의 유산도 나의 구원에는 아무 영향을 못미칩니다.
신앙은 누구가 대신해 줄 수가 없답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그 누구도 환경 탓을 할 수 없으니 하느님은 참으로 공정하신 분 아니신가요?
오늘 우리도 하느님처럼 공정한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도 그의 배경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오직 그 사람 자체만으로 평가한다면
우리도 공정한 사람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는 말씀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차별없이 공정하게 대할 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공정하게 사람을 바라봄으로써 자비를 실천하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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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에제키엘 18,1-10ㄱ.13ㄴ.30-32 마태오 19,13-15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오 19,14)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이들을 꾸짖습니다(19,13).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니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손을 얹어주십니다(9,14-15).
여기서 제자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관점의 근본적인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귀찮게 하는 것으로 보고 어린이들의 접근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대자를 데리고 온 것도 아니었고 어떤 재화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축복을 빌어달라는 것뿐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하신 것을 보면
어린이는 나이에 상관없이 힘없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이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주님의 생명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처신은 사회적 약자들이 하느님과 관계 맺는 것을 막은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지닌 지위나 재물,
세상의 지식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며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료 인간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참으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어린이 같은 순수함을 회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함은 거짓말 할 줄
모르는 순진무구함, 무죄함 또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그분과 함께 있고자 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이런 영적 순수함을 지닌 가난한 이들은 어린이처럼 전적으로 남에게 종속되고 온전히
의존합니다.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되어야겠지요. 하늘나라는 오직 하느님께 집중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기준을 주님께 두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시선을 가지런히 하여 영으로 단순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그분의 축복 안에 머물 수 없을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개방성과 수용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시고,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 안에 머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으신 것이지요. 우리도 하느님 안에서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소외시키지 말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존귀한 존재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고요히 주님 앞에 자신을 두고, 혹시라도 마음의 문을 닫고 제한적으로만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며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다른 이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지는 않는지 살피며,
주님의 축복을 청하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원합니다.
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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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에제키엘 18,1-10ㄱ.13ㄴ.30-32 마태오 19,13-15
우리는 지난 주부터 교회 공동체를 위한 말씀인 마태오 복음 18장과 그다음 복음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대단원을 시작합니다(18,3-4). 이어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정말 중요한 요소들,
곧 ‘용서’와 ‘하느님 나라와 부자’ 그리고 ‘혼인의 불가 해소성’과 같은 무거운 주제들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다시 한번 하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형적인 말씀의 반복입니다.
성경에서 반복은 말씀을 ‘강조’하려는 대표적인 글쓰기 방식입니다.
이렇게 한 단원의 시작과 끝 또는 단원의 연결점에 같은 단어, 같은 내용의 문장을 배치하여
반복하는 복음사가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이 단원에 담겨 있는 용서의 문제, 부와 가난의 문제,
혼인과 이혼의 문제들을 관통하는 해석의 열쇠가 어린이와 같은 마음과 자세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축복해 주십사고 청하는데,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라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복음에 비추어 선택해야 하는 다른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용서해야 합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가난해야 합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가정을 위하여 상대방을 이해하고 참아야 합니까?’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성숙도는 우리가 얼마나 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인가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자녀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신
‘사람’은 자녀의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으로 죄를 지었습니다(창세기 3,5 참조).
우리는 정말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사는 그분의 자녀입니까?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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