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12월 6일(화)
* 시작 기도
주님...
나의 의가 아닌 주님의 의로 행하게 하소서.
주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로 열심을 낸 가인이 낯을 들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 죄인도 낯을 들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하여 참된 예배자로 서기를 원하오니 이 종의 부정함과 추악함을 주의 십자가 앞에 내어 놓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기 원합니다.
연약한 나를 주의 강한 손으로 붙드사 주님만 따라가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시 40:1-10
제목 : 공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의 모습은 평안입니다.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이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9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뿐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10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 나의 묵상
(찬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귀를 기울이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네.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주시고 나의 발을 반석 위에 세우시사 나를 튼튼히 하셨네.
새 노래로 부르자 라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새 노래로 부르자 하나님 사랑을
주를 의지하고 교만하지 않으면
거짓에 치우치지 아니하면 복이 있으리라.
여호와 나의 주는 크신 권능의 주라.
그의 크신 권능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여 주시네.
새 노래로 부르자 라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새 노래로 부르자 하나님 사랑을
다윗은 왕이 된 뒤에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쓴 시 같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그가 한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 구원의 때를 내가 정해 놓고 그 때까지 건져 달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한다.
내가 정한 때에 들어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정한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 곧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 역사하신다.
다윗은 비록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 빠져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그가 이때까지 구원해 달라고 시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그의 간구를 들으셔서 그를 구원하시고 그의 발을 반석 위에 세우사 든든하게 하신다.
그는 단지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 빠져 헤매고 있을 때 자신을 향하여 독설을 퍼붓고 대적하던 원수들이 자신을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 떨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대적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복 있는 자는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이다.
복은 물질의 복, 건강의 복, 명예의 복, 이 땅에서 잘 되는 복 등 다양하고 많지만, 구약에서 말하는 이러한 복은 오늘 우리들에게 다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복은 행복인데, 이 행복은 주님을 신뢰하여 의지하는데 있는 것이다.
주를 의지하되 교만한 자나 거짓을 행하는 자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며 오직 주님만 의뢰하는 자가 참 행복한 자임을 다윗은 노래한다.
다윗은 그런 기적을 얼마나 많이 체험했는지 어려서부터 왕이 된 지금까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셀 수조차 없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어떤가?
다윗만 이런 기적을 체험하고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 역시 날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자들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되 크게 감사하는 것은 언제인가?
예를 들면 차를 타고 가다가 큰 사고가 나서 차는 폐차를 해야할 지경인데 운전을 했던 자신은 몸 하나 상하지 않고 살았을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하고 간증을 하곤 한다.
그런데 사실 진짜 하나님의 기적은 그런 죽음의 지경에서 살려주신 것보다, 날마다 차를 타고 다니되 사고나지 않고 다니는 것이 진짜 기적이 아닐까?
우리 자녀들이 악한 자들의 표적이 되지 않고 날마다 평강 가운데 학교에 다니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루 세 끼 밥을 먹으면서 살 수 있는 것, 곤한 몸을 누이고 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 이런 것이 기적이요 참 행복이 아니겠는가?
요즘 베트남의 한 선교사님과 말씀의 교제를 나누면서 선교사님의 매일매일 겪는 아주 작고 소소한 감사의 제목을 적어서 나에게 보내주신다.
하노이로 가는 버스가 늦게 와서 감사, 어떤 때는 일찍 와서도 감사, 버스를 놓쳐서 집까지 걸어가게 하심 감사, 가는 길에 아들과 함께 핫도그를 사먹을 수 있어서 감사 등
지극히 일상의 소소함이 선교사님에게는 감사의 조건이다.
이런 일상의 감사, 범사의 감사가 넘칠 때 그것이 곧 진정한 행복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윗과 같이 이런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그러면서 다윗은 자기가 경험한 기쁜 소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 기쁜 소식이란 곧 의의 기쁜 소식이다.
義란, 단순히 선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의로운 자라고 평가하는 세상적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용어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분리되어 불의한 존재가 되었다.
(고전 15:22a)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과 분리되어 불의한 자는 생각하는 것이 죄요, 먹고 마시는 것이 죄일 뿐이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징계라는 심판을 허락하신다.
이 심판은 혹독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주의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생명을 주시는데 그 생명이 곧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의 생명,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다.
이 생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의로 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윗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것은 물리적인 상황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로부터 공의의 심판을 받은 상황을 의미한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 공의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다른 그 무엇이나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가 경험한 기쁜 소식, 곧 공의의 심판을 통한 기쁜 소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되 입술을 열어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노래한다.
(10)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주의 택하신 백성들을 죽이는 심판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여 살리시고자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이런 심판을 통하여 의가 세워지고 의의 결과 완전한 평화를 누리게 된다.
(시 94:15)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이사야 26:8-9)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시 97:8)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이사야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런 심판을 통하여 의가 세워진 다윗은 이제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한다.
(6-8)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이처럼 다윗이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거나 요구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사울 왕을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사울은 삼상 13장에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들어올 때 전쟁에 이기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아무리 사무엘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은 참지 못하고 자신이 성전에서 직접 제사를 드리며 분향을 하였다.
그런데 마침 그때 사무엘이 들어와서 분향하는 사울을 책망한다.
(삼상 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그 뒤에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쉐마하지 않고 불순종한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남녀노소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다 죽이도록 명하셨다.
그런데 그는 아말렉 왕과 양과 소의 기름지고 좋은 것은 죽이지 않고 살려두면서 말하기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고 남겨 두었다고 변명하는 것이다.
그 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한다.
(삼상 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 때 사울이 변명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은 다름 아니라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백성들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들의 말을 다 청종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렸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차기 왕으로 세우려고 계획하신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마음에 합한 사람이 다름 아니라 다윗이다.
다윗이라고 해서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고 온전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어쩌면 사울보다 더 크고 악랄한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은 사울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에 그 자리에 엎드려 눈물이 침상을 띄울 정도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물론 그 죄에 대한 징계는 하시지만 용서를 하시고 그를 당신의 품으로 맞아주신다.
(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석고대죄하며 아이를 살려달라고 금식기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돌이키지 않으시고 그 심판을 단행하신다.
아이가 죽자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공의로 받아들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한다.
(삼하 12: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자식이 죽었지만 그가 일어나 의복을 갈아입고 성전에 들어가 주님을 경배했다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공의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그 후에 하나님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아들을 주신다.
다윗은 그의 이름을 솔로몬 곧 샬롬이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의가 세워지고 공의의 결과 평화가 임함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이름 외에 또 하나의 별명을 주시는데 곧 여디디야(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여기서 다윗의 후계자가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하 12:24-25)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래서 다윗은 이런 심판을 통하여 주의 말씀을 그 중심에 새기고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는 자가 된 것이다(7-8).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다.
다윗은 본문 6-8절에서 그렇게 노래하였는데, 이 노래는 결국 1,000년 후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노래였다.
그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히 10:5-7)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주님께서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몸을 드려 오늘 우리의 생명을 사신 것이다.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주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당신의 단 한 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 곧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
(히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게다가 성령께서 증언하신 내용을 거듭 말씀하신다.
(히 10:15-18)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약속하신 새 언약의 내용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심도 당신의 말씀을 존중히 여겼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몸을 단 한 번의 제물로 드리는 순종, 곧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사랑을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 이상 변개할 수도 없고 갱신할 필요도 없는 완전한 언약인 새 언약을 성취하게 하셨고 그 새언약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우리들과 더 깊고 가까운 교제와 사귐을 갖기 위함이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방편은 주님이 주신 말씀이다.
그 말씀 앞으로 나아갈 때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조명하셔서 더 깊은 교제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연하게 관념적으로 믿어 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질라 치면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아우성치고 부르짖고 하면서 상황을 해결하는 데만 집중하곤 하였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상황을 연출하셨는지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오직 내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요구하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던 자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으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은 나의 인생이 잘 되도록 돕는 자였고 날 잘 되게 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지극히 나 중심적인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을 하셨다.
목회를 하면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을 경험하게 하셨고 그곳에서 허우적거리며 헤매었으면서도 나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죽을 것만 같았고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얼마나 부르짖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그런 기도에 응답하기도 하셨지만, 어떤 때는 전혀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기만 하기도 하셨다.
나는 그런 주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목회를 포기하려고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나에게 주님은 복음으로 찾아오셨고 그 복음을 통하여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 이제는 날마다 주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의 상황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더 이상 주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며 그 무덤의 상황을 통하여 더욱 말씀과 가까이 한다.
그것이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기에.....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은혜는 참으로 기이하나이다.
우리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어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심판을 공의로 받아들인 자에게 선물로 주심은 오늘 다시 확인하여 깨닫는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내가 주를 멀리하려고 할 때 나를 심판하소서.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가져가시고 오직 내 안에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주님만이 나의 남편이시오니 주님 외에 다른 그 무엇으로 남편 삼지 않도록 나를 채찍질하여 주소서.
주의 백성들이 오늘도 주의 말씀을 얻어먹고 생명의 양식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