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걸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설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들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말할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살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부자 되지 못해도,
빼어난 외모 아니어도,
지혜롭지 못해도,
내 삶에 날마다 감사 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삶,
내 인생,
나·······.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언더우드의 기도 낙서장‘ 중-
불나비 - 최도은
1.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밤이면 밤마다 자유그리워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2.
오늘의 이 고통 이 괴로움
한숨섞인 미소로 지워버리고
하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 오 자유여~ 오 기쁨이여~
오 평등이여~ 오 평화여~
내 마음은 곧 터져버릴것 같은 활화산이여
뛰는 맥박도 뜨거운 피도 모두 터져버릴것 같애
3.
친구야 가자가자 자유찾으러
다행이도 난 아직 젊은이라네
가시밭길 험난해도 나는 갈테야
푸른 하늘 넓은 들을 찾아갈테야
- 최도은 -
소외된 노동자의 삶을 노래하는 가수.
1988년 숙명여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인천지역노래패연합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 투쟁하는
현장에서 노래를 불러왔다. 현재 노동예술단 '선언' 대표로 있으며,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원, '
노동자의 힘' 회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창작곡으로는 <내일의 여성을 위해> < 눈물꽃>이 있으며,
<불나비> <철의 노동자> 등 현장의 노래를 즐겨 부른다.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밤이면 밤마다 자유 그리워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 앞만 보
며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오 자유여, 오 기쁨이여, 오 평등이여, 오 평화여
내 마음은 곧 터져 버릴 것 같은 활화산이여, 뛰는 맥박도 뜨거운 피도 모두 터져 버릴 것
같아. …… - '불나비'
이상한 연상 효과다. 언제나 그녀를 생각하면 '불나비'를 우렁차게 불러 젖히는 목소리가 먼
저 들려온다. 머리가 긴 지 짧은 지, 키가 큰 지 작은 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 강렬한
이미지만 뚜렷하게 남아 있다. 무대에서 '불나비'를 부를 때 그녀는 정말 활화산처럼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사실 가까이서 그녀를 본 건 처음이었다. 지하철 역 계단을 올라오면서 그쪽에서 먼저 눈인
사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못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박수가 시원찮네요. 자, 어깨
펴고 힘차게 구호 한 번 외칩시다. 정리해고 음모 철폐하라!" 청중이 몇 만 명이든 아랑곳없
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집회장 분위기를 휘어잡는 민중가수 최도은. 그런데 이 사람 맞아?
뿔테 안경에 긴 생머리, 티셔츠에 청바지, 영락없이 대학생 같아 뵈는데…….
투쟁하는 현장에서 빠지지 않는 민중 가수 최도은. 그녀를 봉천동 한노정연(한국노동이론정
책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민중 가수의 외도
인터뷰를 시작하려는데 최도은 씨는 대뜸 챕스틱을 꺼내 입술에 바르고는, 정로환 같이 생
긴 가루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고 1때부터 성악 레슨 받는다고 아침 6시에 시작해서 저녁
까지 노래를 불렀어요. 목이 성할 리 없죠. 요즘은 나이를 먹었는지 목이 자꾸 잠기네요. 살
구유랑 죽염 가루를 섞어 먹으면 도움이 된다고 해서요."알고 보니 노래 탓만은 아니었다.
민중가수 최도은으로 투쟁 현장을 찾기도 하지만, 요즘은 한노정연 연구원으로 종종 강연을
나간다 한다. "내일만 해도 인천에서 발전노조 노동자들 교육이 있어요. '노동운동과 노
래', '노동운동사' 이런 주제로 강연을 하죠." 아니, 가수가 웬 강연이란 말인가.
자신은 사회의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노래를 하는데, 그 노래에 사연을 담자면 공부를 해야
했고 공부를 하다보니 이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 지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녀가 가
수에서 강사로 변신하게 된 이유였다. 나이 많은 노동자들을, 그것도 여자 강사가 상대하는
일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정규직 평균 연령이 36세예요. 한통계약직만 하더라도 저보
다 어린 사람이 더 많아요. 친구들과 어울려 공부하는 듯한 기분이죠." 어려 보이는 외모에
깜박 속아 잊고 있었다. 그녀가 벌써 서른 여덟이나 된 84학번이라는 사실을.
음대생이 가수 된 사연
숙명여대 성악과 84학번. 남들과 다를 건 없었다. 80년대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오월
광주에 대한 부채감. 어느 날 집회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과 '오월의 노래'를 듣고 있는데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졌다고 한다. 과대표를 하고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그렇게 그녀는 대
학 생활을 보냈다.
"88년 졸업하고 인천지역노래패에서 활동했어요. 지역 노동운동에서 문화 선동대의 역할을
한 셈이죠. 그 때 친구들은 다 위장취업을 했으니까 당연한 결정이었죠." 그때 친구들은 90
년도 들어서면서 하나둘 떠났지만, 그녀는 고집스레 인천을 지켰다. 집안과 냉랭해지면서도
96년 말까지 쭉 인천에서 혼자 산 것도 그렇고, 민중가수 최도은을 지탱해 준 힘은 소 심줄
같은 '고집'이었다. "성악 레슨 시킬 정도니까 집안 사정은 넉넉한 편이었어요. 부모님이 비
싼 돈 들여가며 공부시켜주신 데 감사할 때가 언젠지 알아요? 앰프 없이 육성으로 노래 부
를 때예요."
공연에서 부를 노래를 선택하는 데도 나름의 고집이 있다. "실력이 없어 내 노래를 못 부르
는 것"이라며 입막음하지만, 실상 그녀는 "노래 2곡을 부르는 7분 여 동안 그 곳에 있는 사
람들 모두가 하나 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나비' '님을 위한 행진
곡' '철의 노동자'처럼 잘 알려진 노래를 주로 부른다. 그래도 웬만한 히트곡 가진 가수 부
럽지 않다. 폭발적인 성량과 무대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열정이 있으니까.
"최도은 동지가 오면 우린 신발 끈을 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