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대 마르코 신부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에제키엘 24,15-24 마태오 19,16-22
세속적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예수를 따른다.
갈릴래아에서의 선교활동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유다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 마태 19,1-20,34)
예수님을 따라 열두 사도들은 물론, 여인들까지 포함된 큰 제자단과 많은 사람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은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며,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마태오는 지난 토요일,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내용의 복음(19,13-15)에 이어
오늘과 내일 복음으로 ‘예수추종’에 관한 가르침(19,16-30)을 들려준다.
예수추종에 관한 대목의 가르침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① 부자청년이 재산을 버리지 못하여 예수추종을 거부했다는 이야기(16-22절),
②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단언(23-26절),
③ 예수추종에 대한 보상에 관한 대담(27-30절)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주제와 한 가지 결론을 담고 있는데,
처음 것이 나중 것에 종속되고, 예수추종으로 종결된다고 하겠다.
그 과정은 부자청년의 질문을 계기로 전개된다.
첫 번째 주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을 준수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 주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복음의 같은 대목(10,17-22)과 비교하여 보면
마태오의 의도를 잘 읽을 수 있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을 약간 수정하였다.
이야기의 발단은 한 젊은이가 예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선행(善行)에 대하여 질문한다.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서, 십계명(출애 20,12-16; 신명 5,16-20) 중에서
부모를 공경하라(제4계명), 살인하지 말라(제5계명), 간음하지 말라(제6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제7계명), 거짓 증언하지 말라(제8계명),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열거하신다.
마지막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레위 19,18)은 마르코에 없는 것을 마태오가 첨가하였다.
그 이유는 이미 산상설교(마태 5-7장) 안에 들어있다. 산상설교에서 이웃사랑이 직접 언급된
바는 없지만, 이웃사랑은 예수님의 대당명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충분히 부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와의 대담에서 하느님사랑(신명 6,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의 계명을 율법서의 가장 큰 계명으로 천명할 것이다.(마태 22,34-40)
청년이 이 모든 계명들을 어릴 적부터 잘 지켜왔다고 하니, 그에게 영원한 생명은 보장된 셈이다.
그러나 영생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일까?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20절) 라는 청년의 질문이 계속된다.
마르코는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 청년을 보시면서 “너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10,21)고 말씀하신다.
유대교에 의하면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 완전하게 된다.
예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6개의 대당명제 끝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말씀하셨다.
여기서의 완전함은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며,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율법의 근본정신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시는 인간의 완전함은 단순한 계명 준수를 뛰어넘는 것이다.
즉, 계명 준수와 함께 선행과 추종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복음에서 보듯이 부자청년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난 뒤에
예수추종을 요구받는다.(21절)
그러나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풀이 죽어 떠나가 버린 것으로 오늘 복음은 끝난다.(22절)
계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다. 우리는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로서
계명을 지키며 살아 갈 수도 있고, 큰 재산 없이 가난한 자로서 계명을 따라 살아 갈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한번 계명을 지킨 것으로 영생을 보장받거나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다고 해서 당장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계명 준수와 선행은 종말론적인 영생과 완전함을 위해 평생을 두고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덕행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과 완전함은 미래지향적이다.
부자청년은 지금까지 계명을 잘 지켜왔다는 결과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듯하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계명을 준수해야 하는 조건이 남아 있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것도 신나는 일이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신나는 일이다. 완전함은 최종적으로 예수를 추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추종은 또다시 역으로 세속적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속적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예수를 추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에제키엘 24,15-24 마태오 19,16-22
재산이 넉넉하고 지위가 높음을 ‘부귀’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부귀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만, 부귀는 칼날이나 창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방종하게 굴면 사람의 뼈와 살을 베고 찌릅니다.
그런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책 『설원』에는 부귀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부’는 만족할 줄 아는 데 있고 ‘귀’는 물러남을 구하는 데 있다.”
만족하고 물러날 줄 아는 지혜만 있다면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예수님께 질문을 드린 한 젊은이가 모든 계명을
잘 지켰음에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주님 말씀에 슬퍼하며 떠납니다.
사실 젊은이의 질문은 두 가지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가?’였고,
둘째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 두 번째 질문을 스스로
되묻고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내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것이 무엇일까?’로 말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많은 무엇이 우리를 차지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한계를 깨닫고, 우리의 욕망이 무엇인지 올바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사랑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말을 인용하시면서 ‘친절한 사랑은 오로지 내어 주고 섬기는 데서 오는
기쁨을 체험하게 한다.’(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94항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의 시편도 이 ‘부’와 ‘귀’를 노래합니다.
“누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불안해하지 마라.
죽을 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의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없는 사람은,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시편 49[48],17-18.21).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에제키엘 24,15-24 마태오 19,16-22
유대인들은 부와 재산은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부와 재산을 가지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하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처럼,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오 19,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마태오 19,17)
이는 생명을 얻는 데는 선한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마태오 19,20)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오 19,21)
율법을 지키는 것이 생명으로 가는 길의 시작은 되지만, 완성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곧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더 나아가 행해야 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질병이 없고 건강한 사람, 실수하지 않고 죄짓지 않는 사람, 악습이 없고 상처주지 않는 사람,
상처가 없고 성숙하고 교양 있는 사람, 능력 있고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완전무결한 사람,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일까?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당신께로 와서 따르라고 하십니다.
곧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고, 받은 복을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복을 받은 이는 복을 주는 이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팔라”, “주라”, “오라”, “따르라”는 네 가지를 실행하라 하십니다.
이는 산상설교에서 말하는 십계명을 넘어, 이웃사랑을 넘어, 원수사랑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것까지 따르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부자 청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기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사실, 부자는 자신의 영생을
위해 죄짓지 않고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율법을 지켰다 하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비우라고 하십니다.
나아가서 자신을 비우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나누고 선을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곧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마태오 19,21-22)
우리도 오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따라 나서는지, 아니면 머뭇거리고 주저하거나
슬퍼하고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들려주신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말씀을 따름으로써,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오 19,21)
주님!
주님께서는 저의 허울을 벗기십니다.
가리고 있는 겹겹의 옷을 벗기시고, 벌거숭이로 만드십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제 이기심의 옷을 벗기십니다.
이기심과 자애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나누게 하소서.
나아가, 낮은 이를 섬기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던 당신을 위하여 하고, 당신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