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처음'의 의미는 크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듯이 어떤
분야에서 어떤 모습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자신이 볼 수 있는 세계와 그 폭도 달라진다. 녹색 다이아몬드를 떠난 선수들은 무엇을 하며 살까? 5~10년 이상 한우물만 팠던 선수들의 은퇴 이후의 삶이 궁금할 때가 있다. 프로 세계는 갈수록 문이 좁아진다. 수백명의 선수 중 단 몇 십명만이 코칭스태프로 울타리 안에 남고, 아예 그라운드를 떠나 음식점 경영 등 개인 자본으로 사업을 하는
예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기자는 스타들의 '은퇴 그 이후'를 취재하다 독특한 '제2의 인생'을 발견했다. 지난달 두산 이동수가 트레이드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동봉철(34)은 가장 많이 트레이드됐던
선수다. 2000년 쌍방울을 마지막으로 야구계를 떠난 이후 소식이 뜸하던 그가 연예인 매니지먼트사 이사로 압구정동에 나타났다. 능숙한 언변과 휴대전화 스케줄 다이어리가 기본인 그들의 세계에 익숙해졌을까.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기자를 맞이하는 그의 세련된 모습에
3년 전까지 배트를 휘두르던 흔적이 녹아든 듯했다.
●번지점프의 야구 인생
92년 삼성에 입단한 동봉철은 프로 세계에서 일찍 커버렸다.
신인으로 전 경기에 출장해 타율 3할(0.317, 타격 4위)을 기록하며 단번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빠른 발과 재치있는 플레이, 그리고 준수한 외모로 인기는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등산이 아닌 번지점프였다. 올라갈 곳은 없고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만 빨라졌다.
해태(96년)-LG(97년)-한화(98년)-쌍방울(99년)로 해마다 짐을 싸며
5번이나 다른 유니폼을 입었다.
“시즌이 끝나면 트레이드됐을까봐 신문 보기가 겁났어요. 몇 번을
거치니까 어느 정도 적응이 되더군요. 그런데 여러 팀을 거치다보니
내 나이를 잊는 거예요. 남들은 한곳에서 차곡차곡 무엇인가를 쌓고
있는데 저는 매번 새 팀에서 기초만 다지고 있었으니까요.”
●실력보다 높은 자존심의 산
97년부터 그는 서서히 은퇴를 준비했다.
디스크와 척추 분리증, 척추염과 통풍성 관절염까지 몸은 야구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갑자기 바닥으로 추락하자 사람들의 대우가
달라졌어요. 오기가 생겼죠. 무시하는 사람들 앞에서 한번 보란듯이
터뜨리고 그만둘 생각만 했어요.” 그러나 몸은 더 나빠졌다. 1년간의
식이요법으로 한여름에 방망이를 휘두를 힘조차 잃었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가 걷고 있는 길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면 실력보다 자신감이 더 높았던 것 같아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야구를 그만둘 땐 미련이 남기보단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어요.”
●길 끝에 길이 있다
야구는 비록 막다른 골목에서 끝났지만 일본행은 뜻밖에도 그에게 또
다른 길을 보여줬다. 2000년 머리도 식힐 겸 어학연수를 떠난 일본행
비행기에서 연예관련 사업을 하는 대학 후배를 우연히 만났다. 동봉철은 선수 시절 연예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곳에서 익힌 짧은 일본어로 라디오방송 고정 게스트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연예에 대한 매력은 더해갔다.
“앞날에 대한 계획을 세우려고 일본에 갔는데 오랜 시간 야구만 해서 그런지 그저 막연한 거예요. 야구 외에 다른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야구에 실패한 그가 찾은 ‘제2의 인생’이었다.
●프로와 연예의 공통분모
그의 직책은 정확히 말하면 ‘매니저’가 아니다. 매니저와 신인의
스케줄을 전반적으로 총괄하는 관리인이다.
정웅인 추자현 등 70여명의 배우가 소속됐던 비스타에서 나와 지난해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SW 밸리’를 세웠다. SBS-TV 드라마 ‘임꺽정’의 정흥채 이아현 등이 간판 연기자로 소속된 회사다. 프로와
연예 세계는 공통점이 많다. 스타가 되는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지만 인정받은 뒤에도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냉혹한 프로의 현실을 이미 경험한 동봉철은 어느 정도 이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 “이쪽 사람들은 서로 ‘뒤’가 없어 편해요. 그런데 제 자신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어요. 연예계 밑바닥부터 로드매니저로 시작해
잔뼈가 굵은 친구들이 많은데 저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잖아요.
그들 눈에 나쁘게 비치지 않도록 더 많이 공부해야 돼요.”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92~94년 짧지만 강하게 빛났던 그는 이제 스타에서 스타를 키우는
매니저로 변신했다.
지난해 11월 중앙대 사진학과 출신의 인맥을 살려 스튜디오도 개업하는 등 본격적으로 연예 세계로 뛰어들었다. “소속사에서 키우는 한
여배우가 있는데 계속 방송에서 ‘편집’이 되는 거예요. 그땐 참 속상했는데 지금은 대사가 예전보다 많아지면서 뜨고 있어요. 혼자 TV를 보면서 저절로 흐뭇해지는 게 저도 이상하더라고요.”
별은 그 생명을 다한 뒤 흔적없이 시들어가는 블랙홀로 진화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영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은하의 삶 순환에서
별들과 행성들의 다음 세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먼지씨앗을 만든다. ‘제2의 인생’을 사는 동봉철을 만나고 오면서 기자의 머릿속에는 우리의 인생이 결코 한번의 반짝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희망의 메시지였다.
심은정기자 fearl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