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사도행전 21 : 7-14)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 너무나 귀한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해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각오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은 너무나 고귀하고 그 이름을 위하여 사는 일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무르니라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여기의 ‘전도자’는 원어로 ‘유앙겔리스투’인데 ‘복음전파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는 사도와 구별되었습니다. 당시 전도자들의 임무는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과 더불어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빌립도 가이샤라 지역을 개척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은 오직 그리스도를 전파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에서 전도는 능력 전도가 되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떠나가고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낫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능력을 행하는 전도일지라도 주님의 음성에 순종할 때 생명이 있는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빌립은 주님이 이끄는 대로 순종하면서 동에서, 서에서 오로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은 사도 빌립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고 이 빌립 집사가 지금은 전도자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 집사가 예루살렘 교회에 있을 때는 집사로 임직을 받아서 집사로 봉사를 했지만 그 후에 전도자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는 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전도자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를 말합니다.
실제로 빌립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인해서 예루살렘교회가 핍박을 당하자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다른 지방으로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빌립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가서 전도를 합니다. 사마리아 지방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이미 혼혈족이 되어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곳이었지만 빌립은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은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곳에서 머무르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광야로 나아가서 저 이방인 이디오피아의 여왕 간디게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미국의 애즈베리 대학 채플 시간에 생긴 일입니다. 목사님이 열정적으로 설교하는데 학생들은 졸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헌신하려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청했습니다. 그때 예수 믿고 헌신하기로 작정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그가 바로 인도 선교에 평생을 바친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입니다. 스탠리 선교사는 1920년 간디와 함께 기독교 피정의 집 ‘애슈람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938년에 타임지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선정되었고, 2회나 노벨평화상 후보자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스탠리는 철저한 복음주의자로 살면서 열린 마음으로 인도인들에게 다가 갔으며,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바른 삶 그 자체가 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한 삶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만 하면 삶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탠리는 기독교적인 삶을 살라고 하지 않고, 예수의 삶을 사는 사명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본문 10-12절에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머물고 있는 가이사랴로 내려와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자원을 하여 이런 일을 감당하겠다고 합니다. 자원해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신앙 전승이 1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모 세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자식, 손자대로 이어지면서 신앙의 전승이 안 됩니다. 수평 문화는 발달되었지만 수직 문화가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노벨상과 세계의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은 수직 문화가 잘 발달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3대, 4대가 같이 교회에 나가는 집안이 많지 않습니다. 교회학교마다 감소하여 거의 반 정도의 교회가 교회학교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주일에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이 자녀가 잘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나와 신앙 교육, 인성 교육, 말씀 교육, 기도 훈련하는 것보다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는 부모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부모가 되지 않는 겁니다. 빌립처럼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하는 자가 되어야 비로소 바른 그리스도인입니다.
본문 9절에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빌립은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한 사람입니다. 네 딸이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영성의 전수입니까?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입니다. 이런 은사가 자녀에게 있다는 것은 빌립의 신앙이 바르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의 모범이 될것인가” 의식하며 살기보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신앙의 삶이 딸들에게 그대로 전수된 것입니다. 빌립은 신앙을 차세대에 전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신명기 6장 6절에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절에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부모들은 신앙의 전수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을 유산으로 넘기는 것을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입니다.
사람의 힘은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강합니다. 약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구의 손에 붙잡혀 있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3.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본문 13-14절 말씀에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라고 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감당하리라는 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 이렇게 만류를 하니까 마음이 상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에 가서 결박을 당할 것을 이미 각오하고 있고 그보다 더 나아가서 죽음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주시면서 그 이름을 직접 지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뜻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구체적인 뜻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 이름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고 그 이름을 힘입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이름이 엄청난 이름이요 그 이름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1-12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늘 내 인생사를 결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세요.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결박이 다가오고,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단호하게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야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제대로 세워집니다. 그래야 영적 부흥이 있고, 성숙이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전도자 선지자 전수자가 있어야 합니다. 결박당할 것을 각오하고 죽을 각오하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각오하며 살아가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