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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정찬 2013.4.7
1989년 11월 9일 밤 11시, 동독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는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를 발표했다. ‘즉시'(시행날짜)라는 말 한마디에 독일 장벽이 무너졌다. 이를 보는 머턴의 광주 회상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시대설명과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에 따라 광주의 시간이 왜 해방의 공간이었는지, 비루한 한 인간이 어떻게 보편성의 세계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필연적이게도 이 소설의 내용은 최근의 목사님 설교와 일치한다. 주 인물들의 소개, 지문, 설교와 함께 광주의 정신을 짚어보자.
1. 광주-운명
도청. 횃불이 아름답게 출렁거렸던 곳, 이제는 너무나 아름다워 거룩하기조차 한 그 기억의 공간이야말로 그들이 도달해야할 궁극의 장소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곳이 이토록 소중한 장소로 변모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시간이 평상대로 흘렀다면 머지않아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기억이었다. 그러나 5월 18일부터 시간은 홀연 달라져 있었다.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시간의 달라짐은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혁명가가 존재하지 않은 혁명이었으며, 죽음을 넘어선 이들만이 맛볼 수 있는 승리의 열매였다. 그들은 죽음을 내려다보았다. 내려다보이는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선택이 가능한 삶의 한 형태일 뿐이다. 삶은 죽음을 행해 팔을 벌렸고, 죽음은 삶의 팔을 끌어당겼다. 삶과 죽음은 등가의 세계였다. 이 세계야말로 광주를 저 놀라운 절대 공동체로 변환시킨 힘의 원천이다.
운동가 박태민
‘그들의 분노는 당연했다. 분노야말로 시위대를 조직하게 한 근원적 힘이었다. 분노의 일차적 감정이 자신이 직접 당했거나 가족, 친지, 동료들이 당한 부당한 폭력에 대한 원한이라면, 인간을 짐승처럼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는 비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적인 분노가 이차적 감정이었다. 그것이 윤리적 분노의 감정을 깊이 자극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것뿐이었을까? 분노를 초월하는 다른 감정은 없었던가?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얼마나 무서웠던가. 생명이 사라진다는 것이. 그 뚜렷한 공포 앞에서 사상은 무력했다. 사상의 폐허 속에서 남은 것은 비루한 몸뚱이뿐이었다. 그 몸뚱이는 너무나 비루했다. 그는 비루함을 견디지 못했다. 견딜 수 없었다. 견디지 못하는 영혼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려보냈으나 비루함을 씻지는 못했다. 비루함을, 벌레보다 못한 비루함을 씻은 것은 희생자의 눈물이었다. 갈기갈기 찢긴 육신에서 새어 나오는 눈물이,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야 하는 이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흘리는 희디흰 눈물이 비루함을 깨끗이 씻어 내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비루함을 견디지 못해 희생자의 눈물 속으로 달려 온 사람들이었다. 피와 눈물이 고여 있는 이곳으로, 죽음과 맞서기 위해. 모두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죽음과 경계를 이룬 이곳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이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예수가 잡히던 날 밤에 자신들의 끔찍하고 참혹하고 비루한 모습과 대면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에 예수와 함께 기도하러 간 제자들은 자고 있었고 부인했고 도망쳤다. 바로 이 기억 때문에 초대교회 제자들에게 예수는 부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느낀 것은 자기를 부정한 것, 수치, 부끄러움, 면목 없음faceless, 자신을 증명하는 얼굴의 삭제이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윤리와 관련된 감정이다. 예수의 죽음으로 ‘내가 인간인가?’하는 끔찍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십자가의 밤, 세 여자들이 향유를 들고 예수의 무덤으로 간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뭔가 해야만 했다. 그녀들은 절망과 무기력과 수치와 대면하러 가는 존재들이었다. 그곳은 궁극적인 무, 암흑, 이 세계의 완전한 밤이다. 그들이야 말로 부활의 최초의 목격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부활의 목격자가 될 가능성 속에 있다. 겁을 떨쳐낸다면! 죽음의 공포와 대면한다면! 허무 앞에 선다면!
신부 도예섭
부끄러움, 살육의 현장에서 도망친 자신이 버림받은 존재임을 그는 통절히 느꼈다. 그의 영혼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진실의 궁극은 십자가다. 자신은 결국 그리스도를 피한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다. 그에게 보이는 건 지옥의 모습이었다. 죄의 눈은 모든 것을 보지만 그리스도만은 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응시했다. “눈이 있는 자는 보았습니다.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을 보았던 자 죽음의 기억을 짊어집니다. 십자가를 보았던 자가 십자가의 기억을 짊어지듯 말입니다. 우리가 백주의 거리에서 보았던 희생은 죄를 드러내는 십자가였습니다. 이 십자가를 죽음의 세력들은 은폐하려고 합니다. 보지 못한 자들이 영원히 보지 못하도록 거짓의 형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도청의 젊은이들은 깨닫고 있습니다. 거짓의 형상을 깨뜨리는 유일한 무기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임을. 도청이 그리스도의 집인 까닭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는 사복차림으로 죽음의 도청에 들어간다.
계엄군 강선우
‘나는 알지. 저곳에 한 그루 나무가 서 있음을, 피와 비명을 지우는 한 그루 나무가. 그 나무가 나를 끌어안으며 속삭였어. 여기는 위험하니 돌아가라고. 나는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지. 하지만 너무 멀었어. 꿈 밖의 세계로 간다는 것이. 그래서 다시 돌아왔을까. 한 그루 나무가 있는 곳으로’ 그는 자신이 겨눈 총부리가 자신을 쏘고 있었음을 자각하고 탈영하여 도청에서 박태민을 만난다.
노동자 김선욱
사회에서 배제된 자이며 소외된 자이다. 비루한 삶에서 박태민에게 교육 받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시위군에 가담한다.
예수는 자기가 한 말의 결과를 향해서, 자기 말의 진정한 무게를 위해서 거리낌 없이 걸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인간, 즉 자기 말에 존재를 거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이다. 자신의 말에 모든 것을 거는 한 사람에게, 예수의 장례를 미리 치른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으로 응답했다. 그 순간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 우리 주변에서 자기 말에 존재의 무게를 완전히 실어내는 사람에게 우리 스스로 존재를 거는 방식으로 응답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인의 성스러운 실천이다.
2. 해방광주
아이러니컬하게도 도청 점령은 광주 공동체의 원천인 등가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승리의 희열이 삶의 무게를 증대시킨 것이다. 등가의 세계가 무너지면서 광주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우리의 세계로부터 혼자의 세계로 회귀하고 있었다. 그 회귀는 광주 공동체가 이룬 승리를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광주 공동체의 승리는 혁명 혹은 반란을 통한 승리였다. 시민군이 혁명과 반란의 도시를 지킬 수 없음을. 그들의 두려움은 여기에 있었다. 분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분열되었고, 너와 내가 분열되었다. 해방 광주의 중심적 권력체는 정치조직인 학생수습위원회와 군사조직인 시민군이었다. 정치 조직은 군사 조직을 해체시키고 있었다. 군사 조직의 해체는 곧 해방 광주의 해체였다. 해방 광주는 광주 시민이 세운 또 하나의 나라였다. 그것은 꿈의 나라이자 반역의 나라였다. 꿈과 반역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학생수습위가 추구한 것은 꿈과 반역의 소멸이었고, 소멸의 대가는 생명의 안전이었다. 생명의 소중함은 누구에 의해서도 부인될 수 없는 보편적 가치였다. 이 보편적 가치 앞에서 무장의 논리는 무력했다. 해방 광주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시민군은 조직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전사가 된 이들이었다. 계엄군과 목숨을 건 싸움에서 어떤 강제도, 어떤 사회적 계약도 개입되지 않았다. 해방 광주는 철저한 자유 의지의 산물이었다. 돌이켜보면 진정한 축제는 해방 광주 이전에 있었다. 계급의 사슬에서 해방되고, 삶과 죽음을 초월했던 피의 전선에서.
“광주 시민 모두가 죄인입니다. 스스로 죄인이 된 이가 어떤 힘으로, 어떤 명분으로 싸울 수 있습니까? 신군부가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죄는 감당하기 쉬울 것입니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감당하기 힘든 죄가 있습니다. 해방 광주의 등불을 우리 스스로 끈 죄입니다. 그분들이 죽음의 두려움을 떨쳤던 것은 스스로 짐승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죽음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은 더불어 살아왔던 형제와 이웃들이 짐승으로 전락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죽음을 초월했던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세계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역사는 우리들을 죄인으로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견뎌야합니다. 무릎 꿇지 말아야 합니다. 해방 광주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 다릅니다. 그것은 역사의 시간, 혁명의 시간입니다. 해방 광주는 진실의 시간이 쌓아 올린 장려한 탑입니다. 진실은 스스로의 시간을 창조합니다. 해방 광주의 전사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전사들이 역사의 광야를 가로지르며 진실의 불꽃을 향해 달려올 것입니다. 해방 광주는 패배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의 패배일 뿐입니다. 광야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하기로 결단한다. 이것은 예수라는 한 개인에게서 하느님이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구체적 보편성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의 삶을 우리 삶에서 기대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한다. 고독 속에서, 개별성이 극단에 이르는 지점에서, 심지어 자기 자신이 자신과 분열에 이르는 그 순간에서 예수의 삶은 발생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솔직한 자기 인식에 마주할 수 있는 것인가? 십자가 사건은 예정된 대로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인 한 인간 속에서 일어난 폭발적인 사건, 한 인간을 폭발시켜버리는 그 사건 속에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다. 광야는 우리의 길이다.
3. 호메이니 혁명(1979)과 아이티 혁명(1791-1804), 그리고 광주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지젝)
1973년 4차 중동 전쟁으로 오일쇼크가 일어나 오일 수출입이 중지되었지만 이란은 그 조치를 따르지 않았고 미국은 이란을 강력한 동맹국으로 삼았다. 1979년 1월, 미국의 비호를 받고 있던 이란의 친미 왕정 독재자 팔레비 국왕이 민중항쟁에 직면해 미국으로 도주한다. 군대의 무력진압으로 피비린내 났던 이란의 거리는 혁명 성공을 반기는 시민의 환호와 함성으로 뒤덮였다. 혁명세력의 시위를 무력 진압하던 군의 중립 선언은 이슬람혁명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국왕에 의해 추방되었다 15년의 망명 끝에 귀국한 이슬람 쉬아파 성직자 아야톨라(신의 징표) 호메이니가 그 중심에 있었다. 이슬람법과 이슬람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이슬람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헌법수호위원회’와 그 최고 지도자인 쉬아 이슬람 성직자가 헌법과 국가 정치체제의 가장 큰 권위를 갖게 되는 신정체제(神政體制) 민주 공화정을 이루었다. 이로써 삶을 규정하는 ‘이슬람’과 정치를 규정하는 ‘공화국’이 하나가 됐다.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호메이니 혁명 직후 첫 일 년의 기간에 나타난 그 놀라운 활력을, 정치적. 사회적 창조성의 숨막히는 폭발, 학생과 일반대중들 가운데 벌어진 조직상의 실험과 논쟁들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이 폭발이 억압되어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진정한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예전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사회변혁의 힘을 방출한 순간적 개방,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던’ 순간이었음을 증명한다. 호메이니 혁명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우리는 거대한 해방적 사건을 목도했음을 기억해야한다.
아이티는 콜럼버스의 상륙으로부터 히스파니올라의 일부로서 에스파냐령이 되었다가 1697년 서쪽의 1/3이 프랑스령이 되어 ‘생도맹그’라 불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3백만 이상의 원주민이 전멸했다. 18세기 후반에 들어 생도맹그는 설탕, 커피, 원면의 유럽 소비량의 절반을 공급했다. 대농장주들은 인종주의를 앞세워 노동을 착취했고 노예의 평균 수명이 20세를 넘지 못했다. 아프리카로부터 수입된 흑인노예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전 주민의 90%인 50만이 흑인, 아프리카 태생은 그 중 60∼70%)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아프리카 태생의 노예들은 대부분 전사 출신이고 독자적인 문화와 전투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레올어를 매개로 하는 ‘노예 계몽사상’, ‘흑인 공공영역’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혁명의 바탕이 되었다. 5만의 흑인 군대가 유럽 열강의 군대를 차례로 물리쳤으며, 아프리카의 게릴라전술과 유럽의 기병과 보병 연합전술을 함께 구사했다. 아이티는 1804년 아프리카 출신 인들이 세운 최초의 공화국이다. 오늘날까지도 구미의 교과서를 비롯하여 모든 개설서들은 아이티혁명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는 프랑스의 좌파 역사학에도 해당한다.
아이티 혁명에서 덧붙여야 할 것은 사회조직체의 몫이 없는 부분으로서 보편성을 직접 표상하는 사회집단들이 있다는 점이다. 엄밀하게 공산주의적 혁명적 열망은 이 ‘몫이 없는 부분’ 및 그것의 독특한 보편성의 입장과의 전면적 연대에 절대적으로 뿌리박고 있다. 인간의 보편성은 파열의 지점에, 역사적 사건 속에서 출현한다. 자신의 문화가 무리한 압력을 받아 붕괴될 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문화적 한계를 뛰어넘는 인류를 표현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단절들 속에서다. 우리가 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은 이 날것의 자유롭고 취약한 상태와의 강렬한 동일시를 통해서다. 문화와 그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인류는 존재한다. 한 개인의 집단과의 비동일성은 오늘날 열광과 희망의 원천인 보편적, 도덕적 감정에 호소할 가능성을 지닌 드러나지 않는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 간의, 문명 간의 대화가 아니라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자들과 다른 곳에서 동일한 투쟁에 참여하는 자들 사이의 연대의 고리인 것이다. 이 독특한 보편성의 입장이 곧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이다.
공산주의란 무엇보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공동관리 능력의 회복, 그에 따른 인간의 자기 실체의 회복을 의미한다. 광주는 그 꿈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설사 이 꿈이 유토피아였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서 혁명 자체의 진정한 유토피아를 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광주를 반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18 광주 혁명>
-5.18 이전
1961년 5월 16일 4.19 혁명 다음 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관동군 소위로 임관한 경력을 지닌 박정희 군부가 무력으로 국가 권력 장악. 정치적 질서 부여, 경제 성장으로 정당성을 확보하나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의 개발독재는 정치·경제·사회분야의 수많은 불균형을 일으켰고 국민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남. 삼선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 군사독재 체제가 79년 8월 YH사건, 10월 ‘부·마 민주항쟁’을 계기로 난관에 부딪힘. 결국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피살.
1979년 12월 12일 박정희 사망 후, 전두환 신군부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ㆍ12 군사정변’ 도발. 재야인사와 주요 야당의원은 ‘계엄해제와 민주화 이행’ 주장, 전국 수많은 대학생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회 전반에 걸쳐 분출.
1980년 5월 10일,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ㆍ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의 결의문을 포고, 거리시위를 계획.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조짐을 보인다는 이유로, 비상경계태세 돌입 명령 내림. 5월 13일부터 시작된 시위는 15일 서울역앞에서 정점을 이뤘으나 쿠데타의 빌미 제공이라는 유화론자 주장 득세하면서 10만여 학생들은 ‘서울역 회군’ 단행.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계엄령 확대.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대학,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 서울(대학생)의 지시에 따라 모든 시위 일제 중지했으나 광주만 지속함.
-1980. 5.18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 등교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고 항의하자 구타, 연행. 시민까지 폭행. 학생들은 이를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진출. 게릴라식 시위 시작됨. 이후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이 거세지고 집단화되자, 계엄사령부는 광주의 통행금지를 저녁 7시로 조정. 19일 오후3시경 계엄군들이 금남로와 충장로로 출동, 폭력 진압. 5월 19일 새벽 3시경 증파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 시민의 저항은 극심해졌고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남. 장갑차, 헬기 동원하던 계엄군 발포시작.
20일 오전 8시경, 중·고등학교 휴교령. 오후 6시 40분경,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 출현.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으로 저지, 탑승자 공격.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잔혹한 진압 규탄, 현실을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항의. 광주 MBC방송국 건물 화재발생.
21일 오전 2시,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 차단. 도심 곳곳 화재. 계엄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들 발견. 오전 8시경, 계엄군 사이에서 오인에 의한 교전이 발생, 군인 다수 사망. 오후 1시경,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시민을 향해 계엄군은 총을 난사. 저격수는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 시민은 금남로에 쓰러졌고 시신을 대열에서 끌어내고 부상자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이들에게도 총격이 가해짐. 시민들은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 확보한 후 ‘시민군’이란 이름으로 편제됨. 이후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벌어진 계엄군과의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띠게 됨. 오후 5시 30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 광주의 외곽을 둘러싸고서 광주와 전남을 오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며 통행을 막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음.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한 5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7일 동안, 광주에서는 시민 자치제가 실시. 사람들은 계엄군과 치열하게 부딪혔던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와 투사회보 등의 유인물이 배포.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했고 주먹밥과 빵 등을 대가 없이 나눴으며, 부상자를 돕기 위해 헌혈을 하는 등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천. 수습대책위원회를 꾸린 광주 시민은 계엄군 대표와 만나 협의를 도출해내려 했지만 실패.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규정, 간첩설 등 허위사실 유포. 무기 선 반납 요구.
26일 계엄군은 탱크 앞세워 도청 향함. 시민대표들 맨몸으로 탱크 진압 저지, 하루를 버텨냄.
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라는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200~500명의 시민군은 도청에 남음. 새벽 4시경,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시신으로 남겨짐.
-5.18 이후
1980년-전두환은 8.16 최규하 대통령 사임시키고,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 당선
1987년-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인 광주혁명은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됨. 직선제 개헌, 여소야대 정국 형성.
1988년-광주청문회. 전두환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음. (당시 노태우가 대통령)
1993년-김영삼 대통령의 '5·18문제를 역사에 맡겨두자'는 담화를 계기로 전 국민적 5·18학살책임자에 대한 고소고발 운동시작.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 신군부 세력 법정에 섬.
1997년-전두환 1심에서 사형, 2심 무기징역, 노태우 17년 형 선고. 5.18이 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
1999년-김대중 정부의 ‘과거와의 화해와 타협'정책으로 전두환, 노태우 석방.
2002년-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정.
*정부 발표 (2001. 12. 18) 사망자 수- 민간인 168명을 포함, 총 195명, 부상자4,782명.
한편 지금까지 5·18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보상금 지급 결정자-총 5,189명, 사망자 155명, 행방불명자 77명, 상이 및 연행구금 등 기타 4,957명. (2009년 5월)
첫댓글 좀 기네요. 출력해주세요~맨 위에 파일 있어요.
너무~ 열심히 하신거 아녀요? ㅎㅎ
정말 훌륭한 발제였어.
박철민, 군 소위, 아세아 수정했음. 파일은 안고쳤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