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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자다
에스겔 34:11-16, 20-24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올해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이다. 색동교회는 교회력, 곧 하나님의 달력을 열심히 지키는 교회이다.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지키려는 의지이다.
교회력 마지막 주일은 ‘영원한 주일’ 또는 ‘그리스도 왕’이다. 우리말 ‘마지막’은 끝이 아니다. 마지막의 어원은 ‘맏이맏’인데, ‘맏’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제일 큰’ 또는 ‘첫 번째’라는 뜻이다.
마지막은 맏과 맏의 합성어이다. 시작과 시작이란 의미다. 멀리 내다본다면 마지막은 다시 출발하는 커다란 시작이다.
오늘은 영원한 주일이다. 영원한 주일은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사실 모든 사람은 인생의 길이에 있어서 회한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카잔차키스는 “인생은 너무나 짧은 섬광 같지만, 충분하다”고 했지만,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교회력 마지막 주간에 우리는 세상을 떠난 가족과 지인을 추모한다. 내 곁에 머물다 가신 그 분들은 곧 나 자신의 분신과 같다. 그러기에 영원한 주일은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주간에 내 인생의 성적표를 따져보기도 하고, 또 점점 가까워지는 생애의 종점을 묵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의 저녁은 내 스케줄과 상관없이 찾아온다. 누구도 자신의 종말을 장담할 수 없다.
세상은 얼마나 ‘흔들리는 터전’과 같이 불안하고, 인생은 ‘깨어지기 쉬운 항아리’처럼 유약한가!
1)
오늘 말씀은 ‘나는 목자다’이다. 선한 목자에 대한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선한 목자에 대해 누구나 잘 알고, 좋아한다.
그 이유가 있다. 선한 목자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시편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하였고, 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0:11)고 하셨다.
양은 짐승들 중에서 목자에게 절대 의존하는 존재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흔히 양을 가리켜 ‘순결, 희생, 온순, 순종’과 같은 이미지를 말하지만, 실은 무능력의 다른 말들일 뿐이다.
모세가 자기 백성을 염려하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7)라고 간구한 일이나,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막 6:34)신 마음은 그런 양의 연약한 형편을 잘 이해하게 한다.
성경에서 우리 자신을 양같은 존재라고 고백하는 것은 솔직한 표현이다. 양은 목자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목자를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표 이미지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가장 오래된 성화는 ‘선한 목자’이다. 주후 3세기 경, 로마 산 칼릭스투스 카타콤 벽에 새겨진 선한 목자 벽화는 가장 오랜 작품이다. 수염이 없는 젊은 목동은 털이 많은 양 한 마리를 등에 지고 있다.
죽음의 무덤에 갇혀 지내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 속, 길 잃은 양 한 마리조차 찾기까지 찾으시려는 선한 목자이시다.
목자는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직업이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와 다윗 등은 모두 목자들이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 ‘나는 목자다’라고 하신다.
카타콤의 ‘선한 목자’ 벽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반드시 우리를 찾으시고, 구원하신다는 믿음이 담겨있다. 그 믿음이 그들을 박해와 고난의 상황에서 이겨내도록 하였다. 하나님의 최우선 관심사는 바로 ‘길 잃은 나’이다. 참 소중한 믿음이다.
‘나는 목자다’란 자부심을 가장 실감 나게 보여주는 모델은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을 찾은 목자’(눅 15:4-6)이다. 이 비유는 상식 밖이다. 그래서 더 믿을만하다.
목자는 멀쩡한 99마리는 들판에 두고, 겨우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그런 상식 밖의 목자는 과연 누구인가? 상식적이라면 여기 있는 99마리라도 제대로 지키는 일이 우선이지, 겨우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찾겠다고? 정말 예수님다운 이야기다. 어떤 의미일까?
예수님이 비유에서 ‘잃은 양 한 마리’는 단순한 한 마리가 아니다. “나의 잃은 양”(눅 15:6) 1마리는 100마리를 대표한다. 지금 잃어버렸기에 가장 긴급한 구조가 필요하고, 그런 우선순위 때문에 목동에게는 전부를 걸만한 존재다.
다윗 왕의 범죄를 책망한 선지자 나단이 말한 비유를 보면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삼하 12:3)는 가난한 사람에게 있어 품 안의 딸이며, 전 재산이었다. 그의 존재를 임금이라고 무시하거나 짓밟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성화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어린 양을 어깨에 멘 목자의 모습은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과 연결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의 의미이다.
2)
선한 목자는 언제나 양들과 동행한다. 그는 위기가 닥치면 목숨을 걸고 자기 양떼를 보호한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중동 지역에는 여전히 양을 치는 목동들이 산다. 시리아 광야에 사는 베두인 가족 이야기가 TV에 소개되었다.
현대판 유목민들의 모습은 천태만상이다. 그들은 트럭으로 물건을 나르고, 핸드폰을 이용해 서로 연락하였다. 그럼에도 수천 년 이어온 장막 생활과 식구 같은 양떼와 함께 하는 이동 생활은 변함이 없다. 젊은 목동은 가족과 같은 양들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이렇게 말한다. “양이 배부르면 우리도 배부르고, 양이 굶으면 우리도 안 먹어!”
한 마리에 대해 충실하지 못하면서 99마리 전부에게 충실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잃은 양 한 마리에 집중하는 목동을 위해 하나님은 99마리도 지켜주신다.
그러나 모든 목자들이 자신의 의무에 당당한 것은 아니었다. 본문 에스겔 34장은 악한 목자와 선한 목자를 비교한다.
먼저 악한 목자에 대해 고발한다.
‘악한 목자는 병든 양을 고치지 않고, 상처 받은 양을 싸매어 주지 않고, 쫓긴 양을 돌아오게 하지 않고, 잃어버린 양을 찾지 않는다. 그는 포악(채찍과 폭력)으로 양을 다스린다’(겔 34:3-4).
그 목자는 살진 양을 잡아 고기와 기름을 먹고, 털로 옷을 만들어 입으면서도, 양떼를 돌보지 않는다. 양의 형편을 살피는 일에 무심하고 또 냉정하다. 들짐승에게 쫒기고 사방으로 흩어진 양들을 위해 목숨을 걸기는커녕, 발뺌하기 바쁘다.
에스겔이 고발하는 악한 목자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임금과 최고 지도자들에 대한 비유이다. 성경의 평가는 단호하다. 만약 한 마리 양이라도 방치하는 목동이 있다면, 그는 목자로서 자격이 없다. 본연의 자기 의무를 방기했다면, 그건 목동인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다.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이야말로 선한 목자이심을 고백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11-12).
선한 목자는 악한 목자와 정반대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16).
하나님은 친히 자기 양의 목자가 되겠다고 하신다. 마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시편 23편의 고백을 다시 듣는 듯하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유는 양을 알기 때문이다.
목자가 양을 아는 것은 깊은 관계성에 의한다. 목자와 양이 서로 통하는 쌍방적 지식이다. 좋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른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이러한 완전한 인격적 관계가 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화평의 언약을 맺으시고, 나를 평화로운 삶 한가운데로 초대하신다.
3)
선한 목자의 모습을 보여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네덜란드의 한 여성이 19살 난 딸을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실화이다.
시리아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모니카는 이슬람 수니파의 근거지에 잠입해 들어갔다. 자기 딸이 튀르키예 출신 네덜란드 군인에게 속아 여권도 포기한 채 시리아로 가버렸다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딸이 간 곳은 당시 가장 위험한 전쟁터 한복판인 ‘이슬람국가’(IS)의 수도 락까였다.
이슬람국가는 SNS를 통해 선전전을 펼쳐 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병을 끌어들였다. 자기들의 전쟁을 성전으로 앞세워, 젊은 용병들을 끌어 들였다. 모니카의 어린 딸은 로빈훗 같은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따라간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국가’에 도착하자마자 딸은 속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꽃처럼 치룬 결혼도 금방 파경에 이르렀다. 딸은 자기 엄마에게 SNS를 통해 구조를 요청하였다. 어머니 모니카는 딸을 구하려 위험을 무릅쓰고 튀르키예 국경을 넘어, 시리아로 들어갔다. ‘이슬람국가’는 특히 여성에 대해 무자비한 극단주의 무장단체였다. 다행히 이슬람 여성이 걸치는 ‘부르카’로 얼굴과 온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수도 락까로 숨어들어가 마침내 딸을 데리고 다시 국경을 넘어 돌아올 수 있었다.
정말 보기 드믄 선한 목자의 모습이 아닌가? 어머니는 뭐든지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빌리 선데이는 말한다. “어떤 마귀라도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녀는 빼앗아 가지 못한다.”
영원한 주일이다. 영원은 임시적 존재인 나를 돌아보게 한다. 영원한 주일 요절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만물은 하나님께로 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다. 영원한 주일은 내가 임시적인 공간과 한시적인 시간을 사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살라고 일깨워 준다.
올해 돌아가신 분 중에 오세주 목사님이 있다. 한학자로 유명한 분이다. 나는 몇 해 전에 오 목사님께 미리 내 회갑 축장(祝章)을 부탁드린 바 있다. 아직 회갑이 얼마 남아 있었지만, 행여 목사님의 기력이 빠르게 쇠하실까 염려하여 회갑 축장(祝章)을 앞당겨 졸랐다.
<성실문화>에 5년을 목표로 하고 목회 반세기 회고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겨우 한 회를 쓰고 세상을 뜨셨다. 사람의 시한(時限)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유고글이 된 회고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첫 목회지 강화 사기막교회 교인 중에 맹인 청년 이남례가 있었다. 그 처녀에게 점자(點字)로 한글을 가르치고, 이어 점자성경도 공부하였다. 전도사가 물어보았다. “꿈에라도 눈을 떠 본 일이 있느냐?” 돌아온 답은 “꿈에서라도 한 번만 떠봤으면 좋겠어요!”였다. 그 대답을 듣고 홀로 돌아서서 흐느껴 울었다고 썼다. 선한 목자같은 모습을 느꼈다.
맹인 이남례는 캄캄한 밤중이면 늘 앞장서서 걸으며 길을 안내했다고 한다. 그런데 집안에 일이 있거나, 마음이 불편하면 자주 넘어졌다고 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자신할 일이 아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내 마음을 지켜주셔야 한다.
이렇듯 내 인생의 목적지를 확인하는 때가 바로 영원한 주일이다. 내가 태어날 때 나를 배웅하신 하나님은 장차 나를 마중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내 인생을 교회력과 버무려 산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은총의 삶은 지극히 단순한 일로부터 시작한다. 교회력과 내 생활 시간표를 일치시켜보라. 하나님의 달력, 그 구원의 시간 속에 나를 포함시키라. 어둠이 깊을수록 내 삶의 시계와 인생의 나침반을 확인하는 일은 더없이 긴요한 일이다.
성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나의 목자’이심을 알려준다. 그는 밤새 양떼를 돌보는 목동들의 환대를 받았다. 다음 주일부터는 대림절이다. 맏이맏, 이제 다시 출발한다. 희망, 기쁨, 평화 그 소중한 기대들이 내 인생을 마중할 것을 믿으라.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생명을 허락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