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 아닌 이성 택한 스위스 국민"
스위스 국민은 `이상`보다 `이성`을 택했다.
스위스 국민이라면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월 300만원(약 2500스위스프랑)의 기본소득(Basic Income)을 지급하는 방안을
실시할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약 77%가 반대표를 던졌다. 압
도적 다수가 달콤한 유혹을 뿌리쳤다.
스위스가 부자 나라라 다들 먹고살기 편해서가
아니다.
스위스에서도 소득 불균형에 따른 빈부 격차가 심화되면서
사회통합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퍼주기식
포퓰리즘 정책에 단호하게 `노(No)`를 외쳤다.
유토피아적 이상론에 대해 이성으로
맞대응한 것을 보면
적어도 퍼주기식 복지로 경제가 파탄 난 그리스나 베네수엘라처럼
`험한 꼴`은 보지 않을 것 같아 타 국민 입장에서도 다행스럽다.
하지만 이번
국민투표를 복지 포퓰리즘의 패배로만
평가하고 넘기기에는 많은 것들이 함의돼 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에서 보았듯이 인공지능(AI)과
로봇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인류에게 실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오면서
기본소득 지급은 앞으로 국경을 넘어 지속적으로 논의될 가능성이 높다.
공장 자동화 같은 초기적 단계의 위협을 넘어서
대부분의 일자리를 로봇에 잠식당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은 이미 피할 수 없는 것이 됐다.
이번 국민투표를 청원한 단체도
그래서 기본소득은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닌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논조를 폈다.
`일한 만큼 번다`는 오래된 상식이 깨지고,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기본소득 지급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단체가 주장하는 것처럼 먹고살기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된다면
더 많은 창조성이 발휘되고 창업이 늘어나고
경제가 좋아지는 선순환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목격했던 역사는 이것이
`이상`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가올 위협에 이성적으로 대응해
최대한 이상적인 공존 모델을 만드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스위스 국민의 이번 결정은 옳았다.
"독립군 아들이 전파한 '장학금 바이러스'"
[조병두 회장, 대학에 27억… 그 돈 받은 졸업생들도 1억 기부]
- 악착같이 中企 일군 조회장
독립운동
아버지는 6·25 때 전사… 中1때 가장 돼 신문 돌리며 苦學
- 그의 장학생들, 代 잇는 기부
"우리가 받은 만큼 후배들
주자" 200명이 6년간 십시일반 모아
1953년 중학교 1학년이던 조병두는
하루아침에 가장(家長)이 됐다.
독립군 출신으로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6·25 전쟁 중에 전사(戰死)했기 때문이다.
6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동생들과
새벽부터 신문을 배달했다.
배달이 끝나면 서울 종로구 가회동 모퉁이에 있는
국숫집에서 불어 터진 국수를 싸게 사서 배를 채웠다.
"같이 신문을 돌리던 친구는 나보다 돈이 없어
국수 사 먹을 엄두도 못 냈어요.
매일 국수 한 그릇을 그 친구와 나눠 먹었지요.
그걸 본 국숫집 주인이 어느 날부터 국수를 배로 담아줬어요."
조씨는 "내가 남에게 먼저 베푸니
주변 사람들도 베풀기 시작하더라"며
"그때 '내가 잘돼서 꼭 없는 사람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63년 후, 조씨는 직원 50명,
연 매출 150억원대 회사의 회장이 됐다.
지난 1980년 조씨가 창업한 포장재 제조사인 '동주'라는 회사다.
조씨는 중학생 때 다짐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번
돈 3억원을 들고 1999년 모교(母校)인 성균관대를 찾았다.
"돈 없어 공부 못 하는 학생들 장학금으로 써주세요."
그때를 시작으로 조씨는 총 27억원을
성균관대에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조씨의 도움으로 성균관대 학생 250여 명이
장학금을 받고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조씨는 모교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눈물을 글썽였다.
"선생님의 장학금을 받고 공부해 졸업한 학생들이
후배들을 위해 1억원을 모아 내놨다"는 전화였다.
조씨는 "졸업해서 취업한 것만 해도 기특한데
후배들을 위해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내놨다니,
역시 '기부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강하다"며 웃었다.
장학생들의 대(代)를 잇는 기부는 지난 2010년 시작됐다.
조씨 이름으로 장학금이 지급된 지 10년이 되던 해였다.
10주년을 기념해 장학생 200여 명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장학생 대표 김순흥(38)씨가 "우리가 받은 만큼
후배들에게 조금씩 돌려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장학생들이 즉석에서 동참해 월급의 일부를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한 달에 적게는 1만원부터 많게는
10만원가량의 돈을 6년간 꾸준히 기부해왔다.
이렇게 모은 1억원의 돈을 장학기금으로 내놓은 것이다.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하고 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원영일(43)씨는
"대학 졸업반이던 2001년에 장학금 450만원을 받았다"며
"고시생에게 그 돈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원씨는 지금까지 약 1000만원을 내놓은 '최고액 기부자'다.
갓 사회생활에 나선 장학생들도 기부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대기업 신입사원 이수현(26)씨는 "첫 월급에서
3만원을 떼서 기부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며
"대학 시 절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내내 도움만 받았는데,
내 힘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뿌듯하다"고 했다.
조씨는 감사 인사를 하러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꼭 이런 당부를 한다고
했다.
"나도 대학 시절 누군가가 준 장학금이 없었다면 졸업을 못 했을 겁니다.
그 도움을 잊지 않아서 지금 이렇게 기부를 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들도 꼭 이 기부를 이어 나가 주세요."
"'하이에나 부자'"
전관예우 논란을 부른 홍만표 변호사 사건에서
단연 화제는 그의 광적인 '오피스텔 쇼핑'이었다.
홍 변호사는 본인과 아내·처남 명의로 오피스텔 67채를 갖고 있었다.
그가 지배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A사 것까지 합치면 총 123채다.
천안의 한 오피스텔 빌딩에선 2개 층 수십 채를 통째로 사들이기도 했다.
마치 우표 모으듯 오피스텔을 수집했다.
세금 몇 푼 아끼려 꼼수도 썼다.
주거용으로 월세 주면서도 관청엔 업무용으로 신고했다.
업무용은 부가세 10%가 면제되는 것을 악용한 것이었다. 이
런 방법으로 세금 수억 원을 탈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서초동 법조 타운의 사건을 갈퀴로 긁어모은 큰손이었다.
사건 수임료만 수백억을 번 사람이 '푼돈' 몇 억 아끼려 탈세까지 저질렀다.
변호사가 돈 버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해도 너무했다는 점이다.
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싹쓸이 수임으로 사건의 씨를 말렸고,
중산층이 소액 투자하는 오피스텔까지 손댔다.
거악(巨惡)에 맞섰다는 특수통 검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탐욕에 눈먼 졸부(猝富)만 있을 뿐이었다.
재벌 일가가 푼돈에 손대고
천억 부자가 몇억에 영혼파니
자본주의 진보는 이뤘으나
돈의 철학은 여전히 후진적
우리
사회 反부자 정서는
상당부분 부자가 자초한 것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켜져 온 부자의 규칙이 있다.
그 첫째는 돈의 씨를 말리지 말라는 것이다.
경주 최 부자 가문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게 하라'는 가훈을 지켰다.
이웃 먹을 몫은 손대지 말고 남겨 두라는 뜻일 것이다.
최부자 집안은 이 가훈을 400년 동안 대대손손 물려주었다.
근래 터진 일련의 사건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재벌의 '졸부화(化)'로 부를 만한 현상이다.
부자는 부자답게 큰 돈벌이를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재벌 오너 일가는 작은 돈벌이까지
내버려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푼돈에 눈독 들이는 졸부 같은
오너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이 소탐대실의 대표적 케이스다.
그는 한진해운의 내부 정보를 알고 보유 주식을 매각해
손실을 회피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렇게 해서 최 전 회장 모녀가 아낀 손실액은 10여억원이다.
보유 자산 2000억원의 재벌가(家) 며느리가
겨우 10억원에 흔들린 셈이다.
동부그룹 김준기 회장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김 회장 역시 법정관리 신청 직전 주식을 팔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금감원에 따르면 김 회장의 손실 회피액은 2억7000만원이다.
재벌 회장에겐 '껌 값'일 2억여원을 건지려 했다는 것이다.
금감원 발표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재벌 패밀리가 '푼돈'과 '껌 값'에
손대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서울 소공동 한진빌딩의 E커피숍에 가면
영수증에 대표자가 '조현아'로 찍혀 나온다.
한진가(家)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다.
동생인 조현민 전무도 인하대병원에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다.
대재벌 후계자가 커피숍 주인이라니,
이런 블랙 코미디가 없다.
이명박 정부 때 '재벌 빵집' 논란이 일었다.
롯데·신세계 등의 오너 가족이 빵집까지
경영한다고 여론 몰매를 받았다.
이후 재벌들이 빵집에선 철수했지만 카페며
음식점은 도리어 더 늘렸다.
대기업 계열사나 오너 일가가 운영하는
요식업체는 100여 곳에 이른다.
라멘집·카레식당에서 돼지구이집,
심지어 순대·떡볶이 프랜차이즈까지 있다.
CJ·이랜드 등은 동네 음식점과 경쟁하는 한식 뷔페 사업을 펼치고 있다.
신세계는 '정용진 맥줏집'으로 불리는 수제 맥주 체인점을 차렸다.
정용진 부회장이 기획했다고 이런 별칭이 붙었지만
결코 명예로운 이름은 아니다.
재벌가의 요식업은 해외 유학파 자제들이 주도한다고 한다.
유학 시절 맛본 음식점 브랜드를 수입해 기업형으로 펼치는 것이다.
외제차와 명품 수입도 재벌 자제들의 단골 아이템이다.
대기업의 자본력과 유통망이 뒷받침되니 땅 짚고 헤엄치기다.
롯데가 장녀인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은 뒷돈 의혹에까지
휩싸였다.
롯데면세점 입점 업체에서 '자릿세'를 받았다는 혐의다.
최종 수사 결과는 안 나왔지만 뒷돈 액수는 20억원 정도로 알려졌다.
신 이사장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0억원 넘는 주식을 갖고 있다.
그런 자산가가 20억원을 탐냈다니 기막히다 못해 서글퍼질 지경이다.
신 이사장은 몇 년 전까지 롯데 계열 영화관의 팝콘 매장
사업을 독점했다.
이번 사건에선 아들 소유 회사에 일감을 몰아준 의혹도 불거졌다.
롯데만은 아니다.
대부분 대기업에서 오너 일가가 기업에
파이프를 박고 사적(私的) 이익을 뽑아내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는 많은 진보를 이뤘지만
돈의 철학은 여전히 후진적이다.
돈 된다 싶으면 마지막 살점까지 뜯어먹는
'하이에나 부자'들이 판치고 있다.
재벌가 딸이 커피숍에 손대고,
1000억 부자가 몇 십억에 영혼을 판다.
이러니 부자가 존경받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 '반(反)부자 정서'가 존재한다면
그 상당 부분은 부자가 자초한 것이다.
"이 정도면
됐지"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국민 영웅이
된 박찬호.
그가 일본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던 국내 프로팀을 응원 차 방문한 적이 있다.
대선배의
등장에 선수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박찬호 선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인종차별로 모욕감에 치를 떨었던 이야기, 첫 승을 거뒀을 때의
희열 등
메이저리그 경험에 대해 한 참을 이야기하던 그가 한 선수에게 물었다.
"야구 선수에게 가장 큰 유혹이 뭐라고
생각해?"
"술, 여자, 도박 아닐가요? 정신을 흩어지게 할 수 있으니까요."
다른 선수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박찬호 선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가장 무서운 건
'이 정도면 됐지!'하며 타협을 허용하는 거야."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타국에서 외로움과
싸우며
10여 년간 정상의 자리를 지킨 박찬호 선수.
자기 자신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흘린 땀방울이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이다.
아직도 저 멀리 목표가 흐릿하게만 보인다면 자신을 되돌아보자.
"이 정도면 됐지."라는 안이한
생각이
목표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일지 모르니까.
"막걸리와 하얀 고무신"
지질이도 가진 것이 없어 생활하기가
남들 보다 많이 힘들고 불편하였던 시절이라
아마 그때 어머님은 7남매를 키우느라 몸과 마음
그리고 심신이 많이 지쳤을 때라 생각을 한다.
그때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집 앞에 평상을 펴고
담소를 많이 나눌 때면 나에게 주전자를 주고 막걸리
심부름을 자주 시켰던
기억이 난다.
물론 잔돈은 막걸리 심부름 값으로 나의 것이었다.
그때 나는 동네 어머님 친구분들의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서
집에 오는 동안 나는 주전자에 입을 대고 한모금 두모금
빨아 먹는 그 맛은 아마 지금도 기억이 난다.
지금 친구들과 아무리 막걸리를 마셔도 그때 그 맛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때는 아마 어린 내가 술 맛이야 알지 못했지만
어른들이 줄 곧 마시는 막걸리 맛에 호기심이 가득하지
않았나 생각을
한다.
어느날은 어머님 친구분들이 예전 처럼 집앞에서
평상을 펴고 막걸리 심부름을 하였다
그때도 난 예전처럼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서
입으로 몇 모금 맛을 봤지만 그날 따라 어린 마음에
술 맛이 좋았는지 평소의 다른 날 보다 더 많이 마셨나 보다,
그런데 어머님 친구 한분이 내가 심부름을 갔다 오자
무심코 주전자 뚜껑을 열어 보는 것이 아닌가,
난 그때 얼굴이 홍당무 처럼 무척이나 당황했었다.
그중 어머님 친구분이 막걸리가 많이 없어 진 것을 보고
동네 장사에서 이렇게 얄팍하게 장사한다고
막걸리 사온 가게 집에 가서 막걸리를 돈으로
다시 물러 오라고 노발대발 하셨다.
나는 할 수 없이 가게 집 통장아저씨께 가서
어머님이 돈으로 물러 오란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가게집 통장아저씨 주전자 뚜껑을 열어 보시더니
막걸리가 많이 모자랐는지, 아마 내가 마신 줄 모르고
씩씩 거리며 우리 집으로 쫓아 오셨다.
가게집 통장아저씨가 집에 와 보니
어머님 친구분들이 너무 많이 계셨는지
동네 장사라 그런지 아무 말씀하지 않고
다시 막걸리를 넉넉하게 담아 주셨다.
이런 얘기를 나중에 친구들에게 얘기를 했더니
친구들 역시 다들 그런 추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나 보고 왜 그렇게 약지 못했냐고
껄껄 웃으면서 친구들은 막걸리를 입으로 몇 모금 마시고는
완전 범죄 처럼 물을 채워 놓았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왠지 그렇게 웃음이 나왔던지.......
나는 그렇게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서 우역곡절 끝에
그렇게 모은 용돈으로 어느날 어머님 생신
때
시장에 가서 하얀 고무신을 어머님께 선물을 사드렸다.
1973년도 어머님께 생신으로 사드린 하얀 고무신의 추억도
어느덧 세월이 많이 지나 그런 어머님이 이제 나이가 84살 이시다.
아침에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어머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서
하얀 고무신을 물어 보았더니 아주 또렷이 기억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님을 생각하며 내 마음이 편치 않는 것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아침에 커피 마시며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효를 너무나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을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