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 사이로(1)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늦가을에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지는 비가 며칠 계속된다. 이른 아침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는 봄의 그것과는 사뭇 다름을 느끼게 한다. 차를 몰고 큰길로 나서면서 만난 가로수. 그 주변에는 지난밤 조금씩 내린 빗물의 무게를 버거워 하다가 끝내 잎을 떨군 샛노란 잎새들이 소복이 쌓여있다. 밤새 조용히 내린 눈이 대지를 덮어 온통 새하얀 세상을 만들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과도 사뭇 다르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달고 있던 잎새를 떨구어 만들어 놓은 정경은 왠지 쓸쓸하지만 그래도 밟고 싶지 않고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밤새 내린 비에 젖었기에 더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인지? 소복인 쌓인 은행잎들은 길손의 마음과 발걸음을 붙잡는다. 마지막 가는 가을을 함께 아쉬워하자는 것이 아닐까. 그냥, 모른 척 지난다면 끝내 마음에 남겨질 아픔이 있을 것 같아 결국 잠시 차를 세워야 했다.
은행잎이 쌓인 가로수 아래로 다가갔다. 비에 졌었기에 바스러지는 소리도 없고 내려앉은 그대로 가을을 보내고 있다. 잠시 가로수 아래서 추남(秋男)이 되어본다. 지나는 차량들 속에는 누가 타고 있는지. 혹여, 아침부터 정신나간 놈이구나 싶어 고개를 저으며 지나는 사람은 없을지. 그렇게 혼자 잠시 마지막 가을을 맞았다. 무심코 지나는 세월은 이미 한해를 접으려 한다. 허나, 무엇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하면서도 창조주가 주는 선물조차 챙기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냥 침묵과 함께 머물고 싶다. 하지만, 지나는 차량들이 그 분위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기에 다시 차에 올라야 했다. 잠시 머물렀던 자리를 뒤로하고 차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은행잎들은 내게 말한다. "너도 별 수 없구나..." 하는 비아냥이 뒤통수를 가렵게 한다. 그래도 고마웠다. 찌든 공해와 자동차의 소음 속에서도 샛노란 잎새를 남겨 길손의 마음을 머물게 하고 아름다움을 나누게 하니 말이다. 세월이 지나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무엇에 쫓기는지 헐떡이는 현대인들인데, 그래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여 지나는 이들에게 가을이 지나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으니 고마울밖에 없다.
얼마 후 교정(校庭)에 들어섰다. 작은 교정이지만 은행나무가 많기에 해마다 이맘때면 주변 사람들이 은행을 주우려 찾아들곤 한다. 계속되는 비는 교정에도 여전했다.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가슴이 멎는 듯한 아름다움이 눈앞에 펼쳐져 있지 않은가. 지난주까지만 해도 그렇게 노란색이 아니었는데, 샛노란 물감을 입혀놓은 듯한 은행잎들이 소복이 쌓여 만추의 살아있는 그림을 내게 선물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 이상 차를 몰수 없었다. 빙돌아 차를 다른 곳에 세우고 쌓여있는 은행잎으로 다가갔다. 출근길에 만났던 가로수가 떨구어놓은 은행잎을 애써 잊고 왔는데, 여기 교정에 남겨진 은행잎은 다시 내게 지나는 세월 잊지 말고, 무뎌진 마음 다시 깨쳐보라고, 아예 길을 가로막아 멍석을 곱게 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바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야만 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생각할 것, 느껴야 할 것, 나누어야 할 것, 누려야할 것들을 모두 팽개치고 살아왔지만 남겨진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면 세월의 덧없음뿐 아닌가. 아니, 그저 아쉽다는 느낌의 허허로움 뿐이 아닐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바쁘다 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물쓰듯하고 있는 것인지. 그렇게 해서 남겨진 것이 무엇인지... 그래봐야 세월의 계급장이 이마에 점점 뚜렷해지는 것 뿐 아닌가.
빗물에 젖은 은행잎은 그렇게 가는 세월을 내게 깨우쳐주고 있다. 이 가을 다 가기 전에 철이 들려나. 철없이 헐떡거린들 덧없는 세월만 탓하련만 한 장 낙엽에 담겨진 깊은 가을의 멋은 아리게 아픈 것으로 마음에 담겨진다. 그렇게 무심코 지나는 가을 끝자락에 겨울을 재촉하는 비는 잃었던 시간감각을 깨우쳐준다. 2003년의 마지막 가는 가을이 은행잎 사이로 촉촉이 젖어든다. 가지말라고 애써 붙들려는 듯 은행잎 사이로 젖어든 빗물은 이어지는 바람에도 은행잎을 꼭 품고 있다. 해서인가 다시 가는 이 가을의 아쉬움이 더 애섧게 마음에 담겨진다.
<2003.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