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산책
손광성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날은 마음이 가라앉는다.
낮게 떠 있는 구름, 명주실처럼 부드러운 빗줄기, 그리고 나직한 빗소리.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빗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부풀어 있던 감정의 보풀도 비에 젖어 차분히 가라앉는다. 화창한 날씨에 느끼던 그런 외로움 같은 것도 없다. 비는 창가에 와서 속삭이고, 마음은 귀를 열어 그 속삭임을 듣는다. 전에 아무도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 없기에 온 몸을 기울여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이런 날은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도 예외로 해 두고 싶다. 그리고 한 잔의 커피. 이따금 바람에 실려 오는 물보라의 찬 기운 속에 느끼는 커피의 따스한 온기와 그 진한 향기. 잠시 커피 잔 언저리에 어리는 우수의 그림자. 희미한 그림자와 함께 빗줄기 사이로 꼬리를 끌며 사라지는 긴 담배 연기의 여운. 마음의 어느 후미진 곳에 응결되어 있던, 알 수 없는 감정의 응어리들이 이제 비를 맞아 서서히 풀려 나가는 것일까? 아니면 이루지 못한 꿈의 잔해일까?
비는 가끔 우리를 철학자로 만든다.
그러나 사변思辨의 나선형 계단보다는 감성의 부드러운 오솔길이 우리를 이끈다. 우산을 받쳐 들고 문을 나서 본다. 비와 함께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이런 때는 인적이 드문 뒷골목보다는 바닐라 냄새가 향기로운 빵집이 있는 거리가 더 좋다. 젊었을 때 이런 날은 강둑을 따라 거닐거나 아니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긴 철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는데…….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심에 사는 우리 대부분은 그런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지 오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비의 감촉만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발을 옮길 때 마다 우산 속으로 들어와 얼굴을 비벼 대는 이 가벼운 존재들. 눈썹에 닿으면 이슬로 맺히고 입술에 닿으면 싸늘한 감촉으로 남는다.
비에 젖은 입술의 싸늘한 감촉. 영화「애수」의 한 장면 또는 「쉘부르의 우산」의 포스터에 실린 사진(우산 밑에서 여인은 발돋음을 한 채 연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또는 젊은 날의 오랜 기억의 창고에 숨어 있던 빛이 바랜 몇 장의 스냅 사진. 이런 때는 우산 위에 듣는 빗소리조차 정겹다.
그러나 이런 달콤한 회상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다. 짓궂은 물웅덩이가 우리의 진로를 가로막기 일쑤다.
예기치 않은 도전 앞에 걸음을 멈춘다. 옆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뛰어넘을까?
돌아가는 지혜보다는 뛰어넘는 용기 쪽을 택한다. 우리의 감정은 이미 비가 상기시킨 회상 때문에 조금쯤 들떠 있는 상태이니까. 두 발이 허공에 머무는 짦은 순간. 그 짧은 순간, 가슴 저 밑에서부터 일어나는 가벼운 흥분. 타다 남은 젊은 날의 낭만이 아직 우리 몸의 어딘가에 조금쯤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아, 길가 철책 너머에서 비를 맞고 있는 풀꽃들. 찬물에 샤워를 하고 나온 애들같이 싱그럽다. 단발머리 같이 깔끔한 개망초꽃, 참 많이 아쉬운 듯 피어 있는 청보라색 달개비꽃, 그리고 키 작은 민들레꽃의 환한 모습, 무심한 사람에게는 얼굴을 내밀지 않는, 너무 작고, 그래서 더 안쓰러운 아기별꽃과 누운아기별꽃, 어딘가에 분홍색이 은은한 메꽃도 몇 송이쯤 피어있으리라.명아주 줄기 사이에 걸려 있는 거미줄도 아름답다.
정연하게 짜 놓은 그 은실 그물에는 수많은 물방울들이 방사선으로 달려 있다. 어느 이집트 여왕의 목걸이보다 더 정교하게 세공된 순수의 결정체들.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느다란 탄성이 일어난다.
어쩌면 우리의 심금은 이런 작고 순수한 것에 부딪혔을 때 더 크게 울리는 것인지 모른다.
비가 만들어 놓은 이 걸작품 앞에 잠시 쭈그리고 앉아 본다. 지나가던 시간도 옆에 와서 멈추어 선다. 다시 일어나서 걸음을 옮길 때쯤이면 이미 풀밭은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도회에 사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연의 혜택이란 그리 많지 못하다는 사실에 잠시 실망한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때는 잘려 나간 풀밭을 아득히 먼 곳까지 연장시키기 위해서, 언제인가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 추억의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 보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풍경화 몇 폭은 기억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게 마련이니까.
7월에 들른 월정사月精寺. 울창한 전나무 숲에는 소리 없이 비가 내리고, 간간이 들려오던 독경 소리도 비에 젖고 있었다.
문경새재의 박달나무 숲에 물보라를 자욱이 일으키던 소나기. 우산도 받지 않고 그 소나가를 맞으며,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친구들과 함께 걷던 어느 여름 한나절의 싱싱한 기억. 무슨 이야기 끝엔가 우리는 배를 잡고 웃었다. 무슨 이야기였을까? 빗물에 젖고 있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우리는 또 웃었다. 스무 해 하고도 또 다섯해, 지금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7월의 지리산 노고단老姑壇은 온통 안개와 구름과 가랑비 세상이었는데, 그 자욱한 물안개 속에는 보라색 비비추가 수줍게 피어 있었고, 그 옆에 신부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란 각시원추리의 환한 얼굴과 비에 젖어 주홍색이 유난히 곱던 동자꽃들... 운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시 일어나고 가는 빗방울이 얼굴을 적셨다.
그리고 1년 365일 가운데 200일이나 비가 온다는 러시아의 드넓은 초원에 내리던 비, 라인 같 연안 구릉지대의 포도밭과 밀밭에 내리던 빗줄기. 7월의 초원에 내리는 비는 언제나 풀빛처럼 푸른색이었다.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우리는 더 풍요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비가 오고 있다. 7월의 풀밭에 푸른 비가 내리고 있다. 공원벤치에도 무성한 잣나무 숲에도 그리고 아스팔트 위에도 달려가는 자동차 위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한 사흘 내릴 듯이, 아니, 한 열흘 내릴 듯이, 오이 냄새를 풍기며 비가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