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세상을 진단하고 표현한 여러 사람들의 말을 모았다.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맑스는 행복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라는 견해에 반대했다. 맑스에 있어 개인의 의식, 심리, 사고의 틀 등은 사회 구조의 영향에 의해 정립된다.
Marx는 (Hegel에 반해)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본다 여기서 존재란 경제적인 생산관계를 뜻한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하부구조로서의 존재 위에 이에 따라 결정하는 상부구조인 의식(문화, 종교 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의식현상(예술, 종교, 철학)은 다만 허위의식(Ideologie =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는 다만 사회적·경제적 현실의 표현이다.
- 안상헌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사회주의'라는 말도, '공산주의'라는 말도 쓴 적이 없다. "생산 수단에 대한 공동의 통제"라는 표현을 쓰긴 했는데, 이것을 "생산 수단의 국유화"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소비하는 사회"를 말했다. "능력에 따라서 일하는 사회"는 생산의 전 과정에서 노동자의 의사가 반영되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욕망을 사회가 더 많이 채워주는 것이 바로 "필요에 따라서 소비하는 사회"다.
자본의 재생산은 노동력의 재생산을 전제하는데, 이 노동력의 재생산은 노동할 영양과 건강의 재생산일 뿐만 아니라, 노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의 결핍과 빈곤의 재생산이기도 하다. 오늘의 가난이 내일의 노동력 판매를 요구하며, 아버지의 가난이 아들의 노동력 판매를 요구한다. '자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축적이 가능한 것은 그만큼의 가난 또한 축적되기 때문임을 폭로한다.
- 고병권 수유+너머R 연구원
결국 맑스는 인간이 불행하고, 인간이 악해지는 이유를 사회의 구조에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맑스는 인류가 진정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구조를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민중에 의한 철저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그리고 이 민주주의가 경제 분야에까지 적용되는 것, 그래서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에서 비로소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
- 철학자 조성택의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논의" 중
역사가 말한다. 똑똑한 소수가 "좋은 사회"라는 답을 내놓고 다수가 그것을 따라가는 식으로는 절대로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는 '천국'보다는 '지옥'이 되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의 수준, 그러니까 그 사회의 노동자의 역량이 사회주의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결코 사회주의의 이상향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 강신준(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마르크스경제학 강의)
부자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부자는 '다른 사람에 비해' 부자인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불평등이 만들어낸 말이다. 빌 게이츠가 하버드에서 연설의 기회를 거머쥔 것은 그가 성공한 부자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바로 불평등 구조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엄청난 부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독점적 횡포를 통한 것이고 그 액수가 엄청난 까닭은 그 횡포가 불평등의 간격을 최대한 벌려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빌 게이츠 자신이 하고 있는 그 방식, 즉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독점적 시장지배 방식을 사회적 합의와 규제의 방식으로 바꾸는 데 있다.그의 얘기는 진정으로 불평등을 없애려는 것이 아닌 오히려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한 구실로만 보인다.
기부와 시장은 모두 불평등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시장은 자유로운 경쟁을 유발시켜 불평등을 확대해 내는 구조이고 기부는 그것을 완화시키는 개인적 행위이다.
- 강신준(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마르크스경제학 강의)
1990년 9월 국제연합에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를 주창했는데 그것은 바로 영미인에 의한 세계제국의 그럴듯한 이름이다. 그것은 런던, 뉴욕, 워싱턴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유럽인들은 그 신세계 질서에 자신의 몫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건 크나 큰 착오이다. 그것은 오르지 영미인에 의한 세계제국일 뿐이다.
오바마의 참모진 목록을 보면 모두 월스트리트 출신이다. 월스트리트의 월스트리에 의한 월스트리트를 위한 정권이다. 중공업계, 자동차업계, 실리콘 밸리, 석유업계, 국방, 노동자, 여성, 은퇴자, 소상인을 대표하는 참모가 전혀 없다. 오바마 내각에서는 월스트리트 금융의 소수 지배자들만 발언할 수 있다.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은 오바마 정부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한마디로 말해 가장 극단적인 월스트리트 행정부이다.
- 웹스터 그리핀 타플리(Webster Tarpley 지정학자, 역사가)
"금권(화페권력)은 평화시에 국가를 잡아먹으려 하고, 역경의 시기에는 반역을 꾀한다. 그것은 군주제보다 더 포악하고, 독재보다 더 거만하며, 관료제보다 더 이기적이다. 나는 가까운 미래에 나를 무력하게 하고 내 조국의 위험 앞에 떨게 하는 위기가 다쳐올 것을 알고 있다. 기업이 왕좌를 차지햇다. 타락의 시대가 뒤따를 것이고 재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공화국이 파괴될 때까지 금권은 대중에게 피해를 끼치며 그 권세를 확장할 것이다.
- 16대 대통령 에이브리행 링컨 (링컨은 사설 중앙은행 설립을 경고했고 그 때문에 암살당했다.)
월스트리트가 메인스트리트(대중의 삶)을 죽였다.따라서 나는 바로 지금, 은행들의 나쁜 결정 때문에 모두가 고통을 격고 있을 때 은행을 돕는 것이 얼마나 인기없는 것인지 알고 있다. 케네디 암살과 베트남전 개전 이전까지 미국은 세계 진보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 케네디를 비롯한 60년대의 일련의 암살과 베트남전 참전으로 월스트리트 집단의 절대지배가 시작됐다.
- 제럴드 셀렌테(Gerald Celente 세계에 유명한 추세예측가로 추세연구소 설립자)
1979년 미국의 최고 0.1%가 버는 소득이 하위 90%의 20배였으나 2006년에는 77배로 높아졌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금융위기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금융산업이 절정을 이룰때 미국 기업 이윤의 41%를 차지했다.
이는 20년 전보다 배로 커진 규모다. 금융 부문의 팽창으로 더 비대해진 은행들은 대마불사의 경지에 들어갔다. 결국 은행들이 파산 위기에 처하자 납세자들의 돈으로 구제할 수밖에 없었다. 대접받을 자격이 없는 부자들은 자본주의의 모범이 되기는커녕 자본주의를 해쳤다. 이는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다.
"기업의 탐욕을 깨부수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자. 전 세계의 정의를 불러오자. 우리가 사는 사회는 상품이 아니다." - 2010년 11월 11일, ‘사람이 우선이다! 경제위기 책임전가 G20규탄! 국제민중공동행동의 날' 에 참가한 캐나다의 대표적인 활동가인 토니 클라크씨
코뮨주의는 인간의 끝간데 없는 욕망을 분배할 수 있는 체제가 결코 아니다. 꼼뮨주의는 인간의 욕구를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체제이다.
인간의 욕망은 경쟁적 가치(물질적 욕망)와 비경쟁적 가치(지적 욕망)으로 나눌 수 있다. 경쟁적 가치를 추구함은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불러와 결국 인간을 파편화 시키지만 비경쟁적 가치는 아무리 추구해도 인간을 파편화 시키지 아니한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으나 인간을 기계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물질적인 가치가 정신적인 가치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가 쌓고 있는 막대한 부와 권력은 자본의 소유를 통해 '공동체 차원의 집단적 노력'을 도둑질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본주의를 그나마 더 낳게 만들어온 동력은 '착취 없는 사회'라는 이상과 정의에 대한 이들의 헌신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도우(사회주의 정치신문 해방 59호 8면 '장하준도 말하지 않은 한 가지' 중)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산층’이라는 미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스스로 ‘시민’이라고 믿고 있다.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가며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에 대해 남의 얘기로 믿고 싶어한다. 평등한 세상을 이야기하고 자본주의를 넘어선 세상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자본에 집착하며 스스로 소외되고 20%가 되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경쟁의 덫에 치여 죽는다.
- 사이먼 토미의 '반자본주의' 서평 중
첨예한 현대문명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유일하게 '낙천주의' 뿐인가?
사회주의자는 대중을 위한 말을 해야지 대중이 원하는 말을 하면 안 된다. 대중의 편이 되는 것이 늘 사회주의자로서 옳은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이 인간의 영혼을 이야기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인간다운 삶의 확보와 야만으로부터의 해방은 자본주의의 극복,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노동은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노동의 결과도 가장 인간적이어야 한다.
- 진노 나오히코의 '인간회복의 경제학' 중
비정규직 철페는 계급관계를 역전시켜야 가능하다. 따라서 비정규직 철폐는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계급투쟁이 되어야 한다.
- 김인해(사회주의 정치신문 해방 59호 1면 '비정규직 철폐는 자본주의를 부정한다.' 중)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끌어낸 체제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체제다.” - 토니 클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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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문헌과 언론에 비친 이 사회를 진단한 표현이다.
마르크스의 자본(Capital)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과연 더 필요할까!
'자본'은 자본주의의 멸망에 대한 공허한 저주가 아니다. '자본'이 정작 보여주는 것은 자본주의가 고유한 위기 속에서만 발전한다는 것, 자본주의는 발전을 위해서도 그 위기를 키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근거하는 토대 아래 모순과 역설, 위기와 공황의 심연이 있음을 '자본'은 우리에게 환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