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길 위에서 나를 만나다-4. 페달 위에 새겨진 가을의 궤적
박희래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기차 출발 시간에 쫓겨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가 휴대폰과 카드 두고 온 것을 뒤늦게 알았다. 어느새 선글라스와 장갑도 빈손이 된 날이 잦아졌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거라 자신을 다독인다.
가을은 순식간에 지나가기에 더욱 분주해진다. ITX 청춘열차를 이용하려면 한 달 전부터 예약해야 탈 수 있다. 용산역을 떠나 춘천역으로 향한다. 청춘열차의 매력은 자전거를 열차 안 거치대에 싣고 안락한 좌석에서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차창 밖으로 길고 높은 산허리를 두리둥실 감싼 안개는 신비로운 붓놀림으로 추경을 녹여낸다. 경춘선 철로를 따라 지나는 작은 기차역과 고요한 마을마다 내려앉은 붉게 물든 가을 단풍은 그 어떤 필터로도 재현할 수 없는, 곱고 선명한 빛을 품고 있다. 찰칵하는 카메라보다 눈과 마음에 더 깊이 새겨지고 가을의 깊은 숨결에 빠진다.
춘천역에 내려 의암호 봄내길을 따라 페달을 상쾌하게 밟는다. 오늘의 라이딩 목적지는 의암댐, 춘천댐, 소양강댐 등 춘천의 3댐이다. 호반의 도시 춘천은 가을에 맥박이 더 힘차게 뛰는 곳이다. 의암호의 소양강 처녀상이 제일 먼저 반겨준다. 삼악산의 웅장한 능선과 의암호의 잔잔한 물결은 한 폭의 수채화를 이룬다.
의암호를 가로지르는 신매대교를 들어서자 뜻하지 않는 광경이 펼쳐진다. 가을의 전설 속 42.195km를 달리는 “춘천 마라톤”에 참가한 선수들을 응원하는 함성이 가을바람을 가른다. 반환점을 알리는 안내판 주변에 모여든 시민들은 질서정연하게 열띤 응원을 보내고 행사 진행자들은 분주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 거리에서 선수들의 거친 호흡 소리가 내 폐부 깊숙이 전해져 오자 마라토너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진다. 마라톤 대회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신매대교에서 춘천댐으로 가는 길은 데크 길로 우회한다. 바람을 가르는 페달링 소리만 공간을 가득 채운다. 마라톤으로 인해 차량 통제를 하고 있어 춘천댐으로 가는 사성대교와 야경이 아름다운 소양2교 공도도 더 이상 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신매대교로 방향을 튼다. 의암호를 끼고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지와 자연과 문학이 조화를 이루는 ‘춘천 문학공원’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둘러 본다. 산과 호수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삼악산 호수 케이블카’는 멋진 추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게 해준다. 의암댐을 방류하는 보洑가 있는 신연교로 가는 길은 아직도 마라토너의 줄이긴 띠를 이룬다. 길섶에서 마라톤 안내자와 모여든 시민들의 응원 소리가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진다. 나와 아내도 "힘 내세요! 파이팅!" 이라고 외친다. 거친 숨을 내쉬는 10km 코스 달리기 선수들은 기록보다 동행이 더 소중한 지 손을 흔든다. 연거푸 외치는 우리의 응원 목소리에 선수들은 기운이 솟아 주먹 쥔 손으로 다시 화답한다. 호흡조차 가쁜 그들이 건네는 미소는 가을 햇살보다 더 따뜻하다.
의암호를 벗어나자, 함성은 갈대의 속삭임에 스며든다. 춘천시 남사면 백양리 역 앞에서 대원이 쉼터를 묻자, 대장은 고요하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시냇가와 자전거길 사이로 길게 뻗은 갈대와 시냇가 은빛 물결에 비친 하늘과 산이 어우러져 마치 오스트리아 할슈타트를 보는 듯 황홀하다. 햇살에 반짝이는 은빛과 붉게 물든 가을 단풍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가 길게 펼쳐진다.
고요함 속에 라이딩의 리듬만이 시간을 메운다. 산과 시냇가의 조망이 삼백육십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백양리에서 잠시 휴식하며 간식을 섭취한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실려 온 생각이 물결을 따라 갈대 군락을 배경 삼아 무대까지 잘 마련된 곳에서 바람결에 서걱거리는 갈대 소리를 들으며 전국 시 낭송대회에 출전할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낭송해 본다. 대원의 기념 사진과 영상 속에는 잔잔한 웃음과 여유가 담겼고, 대장의 마음을 더 풍성하게 살찌운다.
아내와 함께하는 가을 라이딩 소풍은 마음을 깊게 행복으로 물들인다. 가평군 청평면 호명리의 호명산 자락 밭에서 들깨 터는 모자母子의 손놀림에서 고소한 향이 흩뿌려져 달리고 있는 자전거길까지 퍼져 콧속까지 고소하다. 팔랑개비가 있는 가평 대교로 가는 길에 노랗게 물들어 줄지어 서 있는 은행나무 가로수가 눈을 호강시킨다. 상천역 부근의 호명산 자락의 실루엣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닥에 총천연색으로 포근하게 깔린 낙엽이 뒹구는 길은 가을의 심연으로 안내한다. 그 위에서 우리는 가을 속으로 더욱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청평역 부근에 소재한 ‘기타 다리’의 상처는 지난 장마가 할퀴고 가 애잔한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 멋지고 아름다운 다리로 속히 재탄생하길 바란다. 청평면 대성리 파크 골프장을 지나 남양주시 화도읍 구암리 새터삼거리에서의 왕갈비탕으로 늦은 점심 에너지를 공급받고 소소한 휴식과 행복은 덤으로 따라 온다. 조안면 진중리 ‘마음의 정원’을 지날 때는 단풍잎이 흩날리는 길목에서 꽃마중을 나온 관광객들로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피어난다. 북한강 변의 잔잔한 윤슬은 오늘도 평화롭다. 북한강이 품은 가을 이야기 무성하게 자란 갈대가 춤추는 ‘마음의 정원’과 코스모스 군락이 하늘하늘 춤추는 ‘물의 정원’을 지나 한강 팔당대교 아래 삼각주에서 고니가 노는 서식지와 하남 벚꽃길까지 멋진 가을 풍경이 계속 펼쳐진다.
페달을 힘차게 밟는 힘에 가을의 숨결이 실려 간다. 올림픽대로 강동 암사 아리수정수장 부근 한강 변의 3단 ‘아이유 고개’ 오르막에서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대원이 어이~ 어이~ 선창하면 대장도 어이~ 어이~ 로 화답한다. 내리막의 시원한 바람이 생각의 기치를 틔운다.
미루나무가 줄지어서 즐비하고 자전거 연습장이 있는 광진교를 지나 천호대교 아래서 울려 퍼지는 색소폰 소리는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잠실철교 옆 자전거 길에서 멀찍이 한강의 붉은 서녘 하늘 노을을 바라볼 수 있어 감사하다. 해 질 녘은 가을의 발걸음이 빨라짐을 알린다. 한강 다리 조명등이 저마다 개성 있게 빛을 뽐내기 시작한다.
안전하게 라이딩을 마치고 지하철 승강장 안전문에 걸린 시들을 감상하는 것은 가을 소풍의 또 다른 별미이다. "시는 길을 걷는 이의 발걸음에서 피어난다." 어느 시인의 시 한 줄이 가슴판에 새겨진다. 플랫폼에서 시를 읽는 순간 길 위에 물든 가을은 마음 속 깊숙이 번진다. 아내와 오래도록 안전하게 라이딩을 즐기고 싶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우리의 흔적도 가을 단풍속으로 곱게 곱게 녹아든다.
#박희래수필#박희래연작수필
첫댓글 너무 부럽고
너무 멋지십니다!
글도!
부부가 함께 하는 라이딩도!
자연 속에 고요히 물들어가는
그 마음과 정취도~~~
동기 님 시도 멋집니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도
좋은 글벗으로 성장해 가고 있어 감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