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싯다르타』를 처음 펼쳤을 때 나는 이 소설이 불교 경전을 소설화한 이야기이거나, 어느 성자의 일대기 정도일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깨달은 것은, 이 책이 결국 ‘누군가 대신 찾아준 진리는 나의 진리가 될 수 없다’는 매우 단순하지만 무거운 명제를 온몸으로 증명해 보인 이야기라는 사실이었다.
『싯다르타』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헤세라는 인간이 이 작품을 쓰던 시기에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함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헤세는 본래 개신교 선교사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교에 강제로 진학했으나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인물이다. 아버지가 정해준 길, 교단이 정해준 정답에 몸이 먼저 거부 반응을 일으켰던 셈이다. 이 개인사만으로도 그가 훗날 ‘타인이 정한 진리’에 얼마나 예민한 작가가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싯다르타』 집필 시기인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반, 헤세는 인생에서 가장 참혹한 시절을 지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반대하는 발언으로 조국에서 매국노 취급을 받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며, 막내아들은 큰 병을 앓았고, 아내는 정신분열증으로 입원해야 했다. 이 복합적인 상실과 붕괴 속에서 헤세 자신도 심각한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겪었고, 결국 정신과 의사이자 융의 제자였던 요제프 랑에게 수십 차례의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다. 이후에는 카를 융과도 직접 교류하며 그의 분석심리학, 특히 무의식과 개성화(individuation) 개념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소설의 주인공 싯다르타는 훌륭한 브라만(승려 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한다. 그는 제사와 경전, 교리를 누구보다 완벽하게 습득하지만, 타인의 가르침이나 이론적 지식만으로는 마음 깊은 곳의 궁극적 해탈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싯다르타는 부모의 반대와 안락한 지위를 뒤로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사문(고행자)이 되어 금욕과 고행을 실천한다. 나아가 당시 인류 최고의 성자로 추앙받던 고타마를 직접 찾아가 그 깨달음의 위대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고타마의 가르침이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의 경험’은 스승의 언어나 설법을 통해 제자에게 그대로 전수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관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가르침이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 아름다운 카말라를 통해 세속의 사랑과 욕망을 배우고, 카마스바미라는 상인을 통해 돈과 권력,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타락과 회의를 몸소 겪는다. 금욕주의자의 삶부터 세속적인 번뇌와 쾌락의 삶까지, 극과 극의 세계를 스스로 통과하며 경험한 끝에야 비로소 그는 관념적 지식이 아닌 ‘체화된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싯다르타』의 집필이 도중에 완전히 멈췄다는 사실이다. 헤세는 1부, 즉 싯다르타가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사문이 되고 고타마 붓다를 만나는 대목까지 쓴 뒤 일 년 넘게 붓을 놓았다. 정신적 위기가 너무 깊어 더는 써 내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펜을 든 것은 오랜 심리치료와 요양, 그리고 인도·중국 사상에 대한 몰입을 거친 뒤였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후반부, 즉 싯다르타가 세속의 쾌락에 빠졌다가 환멸을 느끼고 강가에서 뱃사공 바주데바를 만나 다시 삶을 배워가는 이야기는 헤세 자신이 실제로 붕괴와 회복을 온몸으로 통과한 뒤에 쓰인 부분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단순한 사상 소설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정신적 병력이 고스란히 새겨진 자전적 기록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설의 후반부, 세속적 삶에 대한 극심한 혐오와 자살 충동 속에서 강가에 이른 싯다르타가 늙은 뱃사공 바주데바를 만나는 장면은 내게 가장 오래 남는 대목이었다. 바주데바는 그에게 어떤 교리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강물 소리를 들으라고 말할 뿐이다. 강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는 하나의 흐름이며, 그 안에서 모든 목소리가 뒤섞여 하나의 ‘옴(청정함으로의 전환)’을 이룬다는 것을, 싯다르타는 누구의 설명도 아닌 자신의 오랜 귀 기울임을 통해 스스로 알아차린다. 이 대목에서 나는 헤세가 정신분석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았던 경험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융의 분석심리학이 강조하는, 이성적 설명보다 앞서는 어떤 전체성의 체험. 싯다르타가 강물에서 얻은 깨달음은 정확히 그런 종류의 것이다. 논리로 설득된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받아들인 앎이다.
말년의 싯다르타에게 가장 큰 시련은 놀랍게도 깨달음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집착이었다. 카말라와 자신이 낳은 아들이 자신을 떠나려 하자, 이미 지혜를 얻었다고 믿었던 싯다르타는 그를 붙잡으려 하며 젊은 날 자신이 아버지에게 안겼던 상처를 그대로 되풀이한다. 이 장면이 나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헤세가 진리를 향한 여정을 결코 한 번의 깨달음으로 완결되는 것으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잃는 고통을 다시 한번 온몸으로 통과한 뒤에야, 모든 아버지와 아들이 이 강가에서 똑같은 이별과 그리움을 반복해 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반복이야말로 강이 하나로 흐르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진리는 한 번 손에 쥐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던지는 새로운 고통마다 다시 확인하고 다시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는 이 통찰이 나는 이 소설에서 가장 정직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싯다르타』를 덮으며 내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문장은, 지혜란 전달할 수 없으며 오직 지혜로운 자가 그것을 전달하려는 순간 그것은 언제나 어리석은 말처럼 들린다는 구절이었다. 이 문장은 헤세 자신의 삶과 정확히 겹친다. 그는 아버지가 정해준 신학교의 정답을 거부했고, 전쟁이 요구한 애국의 정답을 거부했으며, 붕괴 속에서도 기존의 종교나 철학이 건네는 기성의 위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 정신분석의 방을 통과하며 자신만의 언어를 벼려냈다. 싯다르타가 브라만의 가르침을, 사문의 고행을, 붓다의 완벽한 교리를 차례로 통과하고도 끝내 아무도 아닌 자신만의 길에 이르렀듯이, 헤세 역시 그렇게 이 소설을 완성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이미 정해진 답’에 기대어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좋은 책, 존경할 만한 어른, 검증된 이론이 건네는 답들은 분명 소중하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고타마 앞에서 그러했듯, 그 답이 아무리 완전해 보여도 결국 내가 나의 발로 걸어 확인하지 않은 진리는 언젠가 부서질 얇은 얼음과 같다는 것을, 이 소설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