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유산이 즐비한 도심 산책로 서울 정동길
정동과 경운궁이 간직한 옛이야기
서울특별시 중구에 속하는 ‘정동’의 지명은 원래 ‘정릉동’이었다.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있었던 데서 유래됐다. 지금의 주한영국대사관 자리에 처음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릉은 도성 안에 자리 잡았다는 점과 지나치게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지금의 자리(성북구 정릉동)로 이장됐다. 신덕왕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태종(이방원)이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능을 묘로 격하시켜 이장한 것이다. 당시 정릉의 병풍석은 홍수에 떠내려간 광통교를 다시 세우는 데 쓰였고, 나머지 석재와 목재 일부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지은 태평관의 건축자재로 사용됐다고 한다. 정릉동은 일제강점기에 정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동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덕수궁(사적)의 역사는 ‘정릉동 행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의주까지 피란 갔다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를 위해 임시 처소인 정릉동 행궁이 급히 만들어졌다. 이미 창덕궁이 모두 불타버린 바람에 선조는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저택과 주변 민가를 합친 임시 처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정릉동 행궁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복구공사를 마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정릉동 행궁은 ‘경운궁’으로 승격됐다. 하지만 경운궁은 1895년 10월 8일에 일어난 을미사변을 계기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왕이 머물며 국정을 돌보는 궁궐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비밀리에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왕실 가족들도 경운궁으로 처소를 옮겼다.
정동, 대한제국의 중심이 되다
러시아공사관에서 1년쯤 머무르던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지 234일 뒤인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 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경운궁 태극전(지금의 즉조당)에서 황제 즉위 조서를 반포했다. 대한제국의 황궁이 된 경운궁은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한 뒤에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880년대부터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의 공사관이 들어서기 시작한 정동 일대는 정치, 외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과 함께 서양의 문물과 문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인 정동구락부,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이 이곳에 들어섰다. 정동을 가로지르는 842m의 정동길은 외교의 거리이자 문화의 거리였고, 선교의 거리이자 교육의 길로 빠르게 변화했다.
정동길의 근대문화유산을 본격적으로 둘러보기 전에 먼저 들러야 할 데가 있다.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의 13층에 자리한 ‘정동전망대’이다. 현재 주말과 휴일에만 개방되는 정동전망대에서는 중화전, 석조전, 석어당, 즉조당 등 덕수궁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독특하고 아름답다. 정동교회, 중명전, 구 러시아공사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등 격동의 근현대사가 아로새겨진 정동 일대의 정취와 분위기는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정동길에서 만나는 근대문화유산
정동전망대가 있는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옆에는 서울 구 대법원 청사(국가등록문화재)가 자리 잡았다. 일제는 1928년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경성재판소 건물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법기관이었던 평리원 자리에 새로 건립했다. 광복 이후 1995년까지는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다가 2002년부터는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건물은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앞쪽의 현관부를 제외하고 모두 신축되었다.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의 회전교차로 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서울 정동교회가 있다. 정동교회의 여러 건물 가운데 광무 2년(1898)에 준공된 벧엘예배당은 1977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처음에는 380m²(115평) 규모의 십자형 건물이었지만, 1926년 원래 건물은 그대로 두고 양쪽 날개 부분을 넓힘으로써 578m²로 규모가 커졌다.
정동교회 맞은편의 짧은 골목길 끝에는 중명전이 자리 잡았다. 1899년 황실도서관으로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1층 건물이었으나 1901년 화재로 소실된 뒤에 현재와 같은 2층 건물로 재건됐다. 고종은 1904년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 건물들이 대부분 불타버리자 1907년 강제 퇴위될 때까지 중명전에 머물렀다. 1905년에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체결되기도 했다. 중명전 입구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는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붉은 벽돌 치장 쌓기로 건축된 서울 구 신아일보 별관(국가등록문화재) 건물이 있다. 1930년대 준공된 이후 오랫동안 미국 싱거미싱회사 한국지사의 사옥으로 사용됐다. 1969년 신아일보사에 매각되어 1980년까지 신아일보사 별관으로 쓰였다.
정동길을 사이에 두고 신아일보사 별관과 마주보는 이화여자고등학교 내에는 1915년 미국인 사라 심슨이 위탁한 기금으로 세워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국가등록문화재)이 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이 건물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붉은 벽돌로 외벽을 쌓았다. 다면체의 입체 건물이어서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외관이 달라진다는 점이 특이하다. 현재는 이화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이화여고 맞은편의 주한캐나다대사관 앞에는 ‘정동길의 터줏대감’인 회화나무 고목이 있다. 수령이 560년쯤 됐다는 이 회화나무는 높이가 17m, 밑동의 둘레가 5.16m에 이른다. 동구 밖 느티나무처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든든해지는 고목이다.
주한캐나다대사관의 오른쪽 골목에는 아관파천의 역사현장인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사적)이 있다. 고종 27년(1890)에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로 지어진 이 공사관은 6.25전쟁 당시 심하게 파괴됐다. 탑과 지하 2층만 남아 있다가 1973년에 복구되었지만, 지금은 공사 중이어서 외관 일부조차 볼 수 없다. 구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 북쪽의 돌담길 사이에는 길이 120m의 ‘고종의 길’이 이어진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미국공사관의 북쪽을 지나 영국공사관에 이르던 이 길은 1892년 미국공사관의 이면도로로 개설됐다고 한다.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르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할 당시에도 이 길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인지 짧은 이 길을 걷는 동안에는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무겁고 마음이 숙연해진다.
글, 사진. 강훈(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