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렌티노의 성 니콜라오
선원,고해자, 거룩한 영혼들,불쌍한 영혼들의 주보성인, 성아우구스티노수도회.
성 니콜라오는 젊어서 성 아우구스띠노회에 입회하여, 1275년부터 죽을 때까지 고향인 마르까에서 그리 멀지 않는 톨렌티노에서만 살았다.
그는 주로 지칠줄 모르고 사목활동만 했는데, 매우 뛰어난 설교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적까지 행한 것으로 전해온다.
이 성인은 기적을 3백번 이상 하셨고, 돌아가신 뒤에도 정기적으로 매년(액체) 피를 흘리셨다고 한다.
그는 임종할 때 다음과 같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형제들에게 남겼다: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읍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톨렌티노의 성 니콜라오는 성인으로 시성(諡聖)된 최초의 아우구스띠니안 수도자이다.
그는 고행자, 기도의 사람, 영혼의 지치지 않는 목자로서 알려졌다.
그의 죽음 이후 오래지 않아, 그의 삶에 대한 기억들은 대중적인 신심으로 발전 하였다.
그의 양친은 매우 열심한 신자였으나 오랫동안 자녀가 없는것을 한탄하며 미라의 성 니콜라오의 전구를 청하면서 하느님께 자녀 하나를 낳게 해 주실것을 애원하며 파리에 있는 성인의 무덤을 참배하고 왔더니 과연 얼마 후에 옥동자를 낳게 되어 성인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니콜라오라고 했다.
니콜라오의 출생지는 성 안젤로라는 시골이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겼으며 공부할 생각으로 톨렌티노 시에 있는 성 살바도르 성당 비서 신부를 만나 그 뜻을 전했을 때 그 신부도
소년의 재주가 뛰어남을 알고 장래 사제로 양성하기 위해 쾌히 장학금을 알선해 주었다.
1265년 열아홉 번째 봄을 맞이한 어느 날, 성 아우구스티노 관상 수도회의 사제 한 분이
’이 세상의 허무함과 하느님께 봉사하는 자의 행복’이란 제목으로 강론하는 것을 듣고 이에 대단히 감동하여,그렇지 않아도 세속과 교제하기를 싫어했던 그는 수도자가 되기를 결심하고 즉시 그 수도회의 입회를 청했다.
이에 수도원장도 청년의 좋은 뜻과 재주의 비상함을 기뻐하며 곧 승락했다.
성 아우구스티노 관상 수도회의 일원이 된 그는 그 회의 준엄한 규율을 충실히 지키며 동료들이 감탄할 정도로 어려운 고신 극기의 생활을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부모, 친족들은 그의 몸을 생각하여 좀더 쉬운 수도회에 들어가도록 권고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고행을 책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편안한 생활을 찾아서 이 수도원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니콜라오는 성품 성사를 받아 사제가 되었고 그의 특별한 임무는 순회강론(巡廻講論)과 고해 성사를 주는 것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극히 엄격했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극히 부드러웠으며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은 온정으로 죄인을 회개시키기에 노력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성사를 보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든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 신자들의 감탄을 사게 된 것은 죄인들의 보속을 자신이 도맡아 극기 생활로 대신해 주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심한 고행과 활동은 그에게 피로를 가져왔다.
니콜라오는 마침내 병석에 눕고 예수 수난의 성화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때는 1306년 9월 10일이었으며, 나이는 60세였다.
임종하면서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도 바오로(Paulus)의 말씀을 남겼다.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1446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