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평안도 - 청천강과 대령강변의 박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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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1. 22:08조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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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과 대령강변의 박천군
정주 동쪽 평안북도 남쪽에 있는 운전군은 1952년 12월 정주군과 박천군의 일부를 분리해서 신설한 군이다. 운전군 서쪽의 정주군과 동쪽의 박천군으로 연결되는 가산령이 운전군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가산령은 서문령(西門嶺) 또는 석문령(石門嶺)이라고도 부른다. 가산령은 가산 관아의 서쪽 2리에 있었다.
깎은 듯한 석벽 높은 봉우리 형세가 하늘로 들어가는데,
말발굽 높았다 낮았다, 간신히 오르네.
구름 깊으니 산에 길이 없는 것 같고,
나무 늙었으니 이곳에 신선 있는 것 알겠네.
비를 등진 찬 바위에는 아직도 눈이 남았고,
바람에 임한 약초에선 향기가 나려고 하네.
머리를 돌리니 황홀한 저 하늘 밖에,
한 줄기 소나무 소리, 시냇물 소리 섞였네.
김식이 지은 시다.
중국 사신 동월도 서문령을 넘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어지러운 돌에 소나무 백 리 길 왔는데,
노려보는 굶주린 호랑이 걸터앉았네.
사람은 가다가 대낮에도 놀라고,
새는 알아서 넘다가 황혼을 겁내네.
돌고 구부러져 말 돌릴 데 없는데,
하늘로 통하는 한 문이 보이네.
고개가 높고 험하다 보니 온통 첩첩산중이고 호랑이나 새밖에 보이지 않는 고개를 넘어야 새로운 길이 열리니 넘지 않을 수 없는 그 고개 동쪽에 박천군이 있다. ‘서남쪽은 낮은 평야로 바닷가에 이어지고, 동북쪽은 높은 지대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박천군의 고려 때 이름은 박릉군(博陵郡) 또는 덕창(德昌)이었다. 조선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군의 일부가 이곳저곳에 편입된 박천군의 청천강과 대령강(大寧江) 하구 연안에는 박천평야가 펼쳐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박천강의 옛 이름은 대령강인데, 『대명일통지』에는 대정강(大定江)이라고 쓰여 있다. 군의 서쪽 15리에 있으며, 근원은 창성부의 부운산에서 나와 태천현을 지나 안주의 노강과 합쳐져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기를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남쪽으로 도망하여 이곳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물을 건너는 것을 도왔다. 그런 이유로 아주 편하게 건넜다’는 의미에서 대령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박천군의 대령강에는 대령강 장성이 120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진다.
대령강의 지는 해
한편 박천 관아의 서남쪽 60리에 망암(望巖)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옛날 중국으로 가던 사신을 실은 배가 오가던 길목이다. 박천 북쪽에 있는 태천군은 평안북도 중부 내륙에 있는 군으로, 원래 고조선의 땅이었다. 조선시대에 태천군으로 개편된 이 군은 삼각산, 백벽산, 당마산 등의 크고 작은 산들이 많고 소리골 약수와 덕화 용전리의 약수가 이름 있다. ‘산천은 맑고 고우나 토지는 거칠고 메마르다. 백성은 농업과 잠업에 힘쓰고 풍속은 꾸밈없고 순수하다’고 알려진 태천에 삼각산이 있다.
옛날부터 명산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이 산은 산이 높고 계곡이 깊다. 그 안은 막힌 데 없이 넓게 트였고,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늘어서 있다. 동ㆍ서ㆍ북쪽 세 방면은 험난한 지세라서 통행하기 어렵고 남쪽으로만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있어서 1만 명의 장부로도 길을 틀 수 없는 땅이라고 말한다. 병자호란 당시 가산, 정주, 박천, 태천의 백성들이 이곳에서 전란을 피하였다. 세상에서는 성을 쌓을 만한 곳이라고도 한다. 평안북도 중앙에 있는 구성시는 조선시대에 구성도호부가 있던 곳이다.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
삭주 구성은 산을 넘은 육천리요
물 맞아 함빡히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
밤에 높은 산
삭주 구성은 산 넘어
먼 육천리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리
가다 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으로 오며 가며 아니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밤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 텐고
삭주 구성은 산 넘어
먼 육천리
김소월이 「삭주 구성」이라는 시에서 노래한 삭주(朔州)는 발해 멸망 이후 거란과 여진족이 살았던 곳이다. 본래 영새현(寧塞縣)이었다가 1018년 현종 때 이곳에 진을 설치하고 거란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삭주로 고쳐서 방어사를 두었다. 조선 태종 13년에 삭주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세종 때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1899년에 평안북도 삭주군이 되었는데, 1943년에 수풍댐1)이 완공되었고, 당시 이 군의 가구 수는 1만 1821호, 인구는 6만 2536명이었다.
고구려 고국원왕 때의 이름난 국상(國相)인 을파소가 이곳 삭주 출신이고, 수풍면에 우리나라 최대의 수력발전소인 수풍수력발전소가 있으며, 삭주온천이 이름 높았다. 이 군에 천연 요새라고 불릴 만한 여러 고개들이 있다. 계반령(界畔嶺), 계반령에서 이어진 산줄기인 온정령(溫井嶺), 돌로 쌓은 성이 있는 연평령(延坪嶺), 판막령, 대장방령, 소장방령, 대속사령, 대성현(大城峴), 소성현 등 수많은 험준한 고개들이 압록강변에 자리한 이 지역을 지키는 산줄기였다.
귀성이라고도 부르는 구성은 고려 때 만년군(萬年郡)이었고, 여러 변천 과정을 거쳐서 1967년 구성리로 개편되었다. 이 군의 풍속은 “학문과 배움을 숭상하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힘쓴다. 간소하고 질박한 것을 숭상하며 농사와 잠업에 부지런하다”라고 『여지도서』에 실려 있고, 진산은 보십산(甫十山)이다. 구성 관아의 서북쪽 80리에 극성령(棘城嶺)이라는 큰 고개가 있고, 동쪽에 주운정(籌雲亭, 住雲亭)이라고 불리는 정자가 있다. 동쪽으로 시내와 연못, 숲과 들을 굽어보는 경치가 고을의 제일 풍경이라고 알려진 이 정자는 구성8경 중 동쪽 물가를 의미하는 ‘동고(東皐)’를 일컫는다.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1830년대 구성군 관내에는 관전장과 방현의 난장, 사기면의 신장이 있어 주로 쌀, 콩, 밀, 깨, 포목, 솜, 생선, 과일, 놋그릇 등이 거래되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구성의 남시장은 정조 10년(1788)부터 5일과 10일에 열렸다. 교통이 편리하므로 농산물과 가축, 생선, 목탄 등의 집산지로 유명해서 소달구지들이 줄을 이었다. 정주, 선천 일대에서까지 몰려들어 평안도에서 선천시장 다음으로 큰 시장이었고, 우시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대령강
대령강 주변은 평야가 넓고 온화한 땅이다. ‘강은 평평하고 산은 끊기려고 하는데 복숭아꽃 살구꽃 핀 두어 집 사는 마을’이라는 시와 잘 어울리는 고장이다.
인조반정 이후 평안병사로 좌천되어 이곳 구성에 머물고 있던 이괄이 난을 일으켜 서울까지 점령한 것은 인조 2년(1624)의 일이다. 이괄은 부하 이수백ㆍ기익헌, 구성부사(龜城府使)인 한명련과 함께 가까운 병영의 군사 1만여 명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으로 먼저 개천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전 영의정 기자헌 등 35명을 처형하였다.
반란군은 평안도의 순천ㆍ자산ㆍ중화, 황해도의 수안ㆍ황주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평산으로 진격하였다. 반란군이 승승장구하여 경기도의 개성ㆍ벽제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인조는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난을 갔으며, 곧 한성까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이괄은 1624년 2월 11일 선조의 열째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堤)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바로 그날 밤 반란군은 관군에 의해 한성 근교의 안령에서 크게 패하였다. 패잔병을 이끌고 광희문을 빠져나온 이괄은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정충신의 추격을 받았다. 이에 이괄의 부하 기익헌, 이수백 등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괄, 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함으로써 반란은 평정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활쏘기와 말타기에 힘쓴다. 간소하고 질박한 것을 숭상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구성에는 길상산 기슭에서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달천강이 있고, 거란의 침략 때 강감찬 장군이 적을 격퇴한 귀주성이 있으며, 구성시 남쪽 상승동에는 10만여 거란군을 섬멸한 귀주대첩 전적지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천강과 대령강변의 박천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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