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증거자가 달려가야 할 길과 생명 버림의 삶” 합신 채플 설교(2018. 3. 6) 행 24:10
제가 합신에서 교수할 때와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는 합신 채플에서 자주 설교를 했는데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여기 와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저를 불어주신 정창균 총장님과 안상혁 교수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그리고 여러분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합신 채플에서 마지막으로 설교를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1년 6월 3일 합신 종강예배 때였습니다. 그때 “내가 물려 받은 영적 유산” 이란 제목으로 제가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의 첫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지난 5월 2일 합신교단 30주년 기념대회에 가서 “우리가 물려 받은 영적 유산” 이란 제목으로 간증 설교를 했는데, 오늘 6월 3일 합신 1학기 종강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물려 받은 영적 유산” 이란 제목으로 거의 같은 내용의 간증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려고 던킨 도넛 370개를 가져왔습니다. 지난 30여 년을 돌아볼 때 우리 합신과 합신교단의 허물과 실수가 많았던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너무 비판적이었고 위선적이었습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력을 다하지도 못했습니다. 온유와 겸손과 포용을 지니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의 귀중한 삶과 가르침으로, 박윤선 목사님 노진현 목사님 장경재 목사님 박도삼 목사님 등 선배님들의 귀중한 삶과 가르침으로 우리 신학교와 교단이 한국교회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신학교와 교단으로 발전했고 국내외에 인정과 존경을 받는 목회자들을 많이 배출했고 세계 곳곳에 인정과 존경을 받는 선교사들을 많이 배출하게 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신앙의 선배님들에게 존경과 사랑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로 그리고 하나님의 일꾼들로 존재하게 된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이기 때문이지만 둘째는 신앙의 선배님들이 우리들에게 물려 준 영적 유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7년 전에 여기서 제가 이렇게 설교를 시작한 다음 “내가 물려 받은 영적 유산” 일곱 가지에 대한 간증 설교를 했는데 그 제목들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저는 평양에서 순교하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으로부터 순교 신앙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 받았습니다. 둘째로, 저는 6.25 사변 때 대구에서 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새벽기도와 은혜 사모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 받았습니다. 셋째로, 저는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면서 한국의 예레미아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새벽기도와 은혜 사모와 전도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 받았습니다. 넷째로, 저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으로부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 받았고 특히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과 희생과 순교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 받았습니다. 다섯째로, 저는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 눈물과 참회, 긍휼과 사랑 그리고 화해와 협력과 화평의 영성을 보물로 물려 받았습니다. 여섯째로, 저는 박윤선 목사님으로부터 기도와 말씀,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영성을 보물로 물려 받았습니다. 일곱째로, 저는 방지일 목사님으로부터 순수함과 섬세함과 정확함과 따뜻함과 눈물의 영성을 보물로 물려 받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내가 물려 받은 영적 유산” 일곱 가지에 대한 간증 설교를 한 다음 설교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할 것은 세상의 유행도 아니고 세상의 가치관도 아닙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멋진 행사나 프로그램에 치중할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우리들에게 물려준 값진 영적인 유산들을 귀중하게 여기고 고이 간직하면서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합신의 교수님들과 학생 여러분들! 우리들이 모두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로부터 물려 받은 새벽기도와 주일성수의 영적 유산을, 순교 신앙의 영적 유산을, 회개와 은혜 사모의 영적 유산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영적 유산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과 희생과 순교의 영적 유산을, 온유와 겸손, 눈물과 참회, 긍휼과 사랑, 화해와 협력과 화평의 영적 유산을, 기도와 말씀,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영적 유산을, 순수함과 섬세함과 정확함과 따뜻함과 눈물의 영적 유산을 물려 받고 고이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의 선배님들로부터 물려 받은 값진 유산은 회개와 믿음, 사랑과 눈물, 헌신과 섬김, 희생과 소망과 같은 값진 영적 유산입니다. 이와 같은 보석과 같은 아름다운 영적인 유산을 물려 받고 고이 간직하시는데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7년 전에 설교를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의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복음 증거자가 달려가야 할 길과 생명 버림의 삶” 입니다. 설교 본문은 행 20:24 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너무너무 귀중한사도 바울의 고백이라고 생ㄱ가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사울은 자기를 부드럽게 부르시는 주님을 만난 다음 한 평생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복음만을 전하면서 달려가다가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달려가면서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십자가의 복음만 전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복음 증거자가 달려가야 할 길과 생명 버림의 삶”이 어떤 길과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주님 만남"의 "은혜의 체험"에 대한 “감사”와 자신의 죄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회개”가 넘치는 길로 달려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인 사울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라고 부드럽게 불러주시고 그리고 이어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라고 말씀해주신 성자 "예수님 만남"의 "은혜 체험"에 사로잡혀서 눈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하면서 달려가는 삶을 살았고, 자기가 저지른 살인과 훼방과 핍박과 포행의 죄를 “회개”하고 또 “회개”하면서 달려가는 삶을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의 주님 만남의 “은혜 체험”에 대한 “감사”와 온갖 죄악과 허물에 대한 처절한 “회개”의 고백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2-15).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결국 죄인중의 괴수인 사도 바울은 자기를 만나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사로잡혀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면서 달려가는 삶을 살다가 죽었고 자기의 온갖 죄악과 허물을 “회개”하고 또 “회개”하면서 달려가는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주님 만남"의 "은혜 체험"과 자기의 죄와 허물을 처절하게 회개하는 “회개의 체험"이 부족한 사람은 마지막까지 달려가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자기가 자랑하던 가문이나 학문이나 지혜나 부귀 영화 등을 모두 배설물로 내어버리고 “약함”과 “어리석음”을 귀중하게 여기며 예찬하는 가치관 변혁의 길로 달려가면서 약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만 전하면서 달려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의 특성이 “약함”과 “어리석음” 이라고 올바로 지적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2-25). 십자가 복음은 역설적입니다. “약할” 때 강하고 “어리석을” 때 지혜롭게 되는 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참된 복음 전도자의 특성도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파벌을 만들어 분쟁하던 고린도 교회가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높이며 우상화 하려고 했을 때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묘사하면서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고전 3:5)라고 말하면서 중성 명사를 사용했고 그 다음에는 “아무 물건도 아니로되”(고전 3:7) 라는 부정적인 말을 사용했고 조금 더 내려가서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고전 4:13) 라고 멸시적인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존 스토트 박사는 오늘날 세계 곳곳을 다녀보아도 사도 바울처럼 자기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진정한 기독교의 지도자들을 찾아보기가 너무나 어렵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헬라의 지혜로 포장하지 않고 로마의 웅변술로 각색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설교를 너무 지혜롭고 너무 유창하고 멋지게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1,2). 사실 한국교회의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인 길선주, 이기풍, 최봉석, 이성봉, 한경직, 박윤선 목사님들은 “약함”과 “어리석음”을 몸에 지니고 사셨는데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은 모두 너무 강하고 너무 지혜롭고 너무 부요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수많은 교회가 “나는 부자라” 라고 자랑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지녔던 “환난”과 “궁핍”을 싫어하고 사도 바울이 지녔던 “약함”과 “어리석음”을 싫어하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달려가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자기가 귀중하게 여기던 평안과 건강과 장수 등을 모두 그림자 같이 헛된 것으로 여기면서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귀중한 것으로 여기는 "생명 버림"의 세속관 변혁의 체험을 지니고 오직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만 전하면서 달려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온갖 종류의 “고난”과 “핍박”과 “괴로움”과 “생명 버림”을 힘들어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면서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결박과 환난이 자기를 기다려도 죽음을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고 계속해서 달려가게 되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고난과 핍박을 수고와 위험과 생명 버림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모든 종류의 “고난”과 “핍박”을 “수고”와 “위험”과 “생명 버림”의 길로 달려가고 또 달려갔다고 고백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 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다메섹에서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후 11:29-33). 그와 같은 “고난”과 “핍박”을 “수고”와 “위험”과 “생명 버림”의 길을 “감사”와 “기쁨”을 지니고 달려가신 분들 중에는 스데반 집사와 사도 바울의 뒤를 따라 주후 155년 소아시아 서머나에서 불에 타서 순교의 제물이 되신 폴리캅 감독이 계셨고, 1866년 9월 5일 대동강변에서 목이 짤려서 순교의 피를 흘리신 토마스 선교사님이 계셨고, 1944년 4월 21일 평양 감옥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신 주기철 목사님이 계셨고, 1950년 9월 28일 여수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해 순교의 제물이 되신 손양원 목사님이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고난”과 “핍박”을 “수고”와 “위험”과 “생명 버림”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달려가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복음 증거자가 달려가야 할 길과 생명 버림의 삶”이 어떤 길과 어떤 삶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와 같은 귀중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길로 달려갔고 귀중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삶을 살다가 죽었는데 “복음 증거자가 달려가야 할 길과 생명 버림의 삶”의 비결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주님 만남”의 “은혜 체험”에 대한 “감사”와 자신의 죄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회개”가 넘치는 길로 달려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자기가 자랑하던 가문이나 학문이나 지혜나 부귀영화 등을 모두 배설물로 내어버리고 “약함”과 “어리석음”을 귀중하게 여기며 예찬하는 가치관 변혁의 길로 달려가면서 약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만 전하면서 달려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자기가 귀중하게 여기던 평안과 건강과 장수 등을 그림자 같이 헛된 것으로 여기면서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귀중한 것으로 여기는 세속관 변혁의 체험을 지니고 오직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만 전하면서 달려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합신에서 공부하는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들에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베푸셔서 여러분들이 모두 마지막까지 달려가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7년 전에 쓴 기도문을 그대로 읽어 드리므로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의 모든 죄악을 주님의 피로 도말 시켜 주시옵소서. 나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들과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찾아가서 어루만지시며 돌아보신 것처럼, 나도 작은 교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계속해서 펴게 하시고 그리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펴게 하시옵소서! 나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사도 바울과 주님의 제자들을 본받아서 그리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본받아서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특히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과 모슬렘 형제들을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미움과 분노와 증오가 있는 곳에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심고 분열과 갈등과 대결이 있는 곳에 화해와 일치와 평화를 심는 작은 거름과 씨앗이 되게 하시옵소서!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를 하기 전에 주님이 지니셨던 긍휼의 눈물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이 품으셨던 사랑의 심장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이 지니셨던 죽음의 흔적을 지니게 하시옵소서! 죄인 중의 괴수가 주님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와 순교자들이 흘린 충성의 피를 의지하며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와 인자와 사랑을 의지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국교회와 한국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북한동포들과 일본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멘!』(2011.3.29) 제가 두 달 전에 쓴 “나의 마지막 소원과 기도”라는 제목의 기도문 하나를 더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밤에 들어 누어 자면서 “나의 마지막 소원과 기도”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미쳐서 살다가 미쳐서 죽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인 저도 사도 바울처럼 세상의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즉 나의 지식과 나의 업적과 나의 명예 등 내가 귀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모두 내어버리고 그리고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지니시고 오직 나 위해서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성자 예수님의 사랑에 미치고, 나 대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서 죽게 내어버리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미치고,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나 위해서 탄식하시면서 기도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랑에 미쳐서 살 수는 없을까? 이것이 제가 가슴에 지니게 된 “나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 였습니다. 사실 저는 저도 모르는 가운데 나 자신의 지식과 나 자신의 업적과 나 자신의 명예에 치우쳐서 스스로 속아넘어가면서 위선과 독선을 지니고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처절한 고민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한 평생 목회의 일도 잘 했는데, 내가 한 평생 교수의 일도 잘 했는데, 내가 한 평생 선교의 일도 잘 했는데, 내가 한 평생 섬김의 일도 잘 했는데, 내가 한 평생 구제의 일도 잘 했는데, 나는 지금도 은퇴 후 작은 교회들을 주일마다 방문하면서 순회 목회의 일도 잘 하고 있는데, 나만한 사람도 별로 많지 않을 텐데.” 저는 이와 같은 위선과 독선 의식에 사로잡혀서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처절한 고민을 하나님 앞에서 토로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위선과 독선으로 가득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몽둥이로 쳐 주시옵소서. 신앙의 선배님들 이야기는 너무 많이 하는데, 스데반 집사님과 폴리캅 감독과 성 프랜시스와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 이야기는 너무 많이 하는데, 신앙의 선배님들을 닮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위선자를 몽둥이로 쳐 주시옵소서. 손양원 목사님께서 주님 사랑에 미치시고, 나환자 사랑에 미치시고, 원수 사랑에 미치시고, 순교 사랑에 미치시고, 천국 사모에 미쳐서 사시다가 죽으셨는데,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랑에 미치고, 나환자 사랑에 미치고, 원수 사랑에 미쳐서 살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앞서 가신 신앙의 선배님들이 사시다가 죽으신, ‘미친’ 삶과 ‘미친’ 죽음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살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성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아멘!』이것이 제가 두 달 전인 2017년 12월 28일에 쓴 “나의 마지막 소원과 기도”라는 제목의 기도문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주려고 빠리 빠겟트 빵 370개를 가져왔습니다. 맛있게 드시기 바랍니다. 이제 찬송가 “십자가를 질 수 있나”(519) 1절을 함께 부르고 기도 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