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일만권과 동해안의 육로·해로의 길목, 나루끝
오늘날 포항시민은 물론 포항을 찾는 방문객들도 ‘나루끝’이라는 지명을 들으면 무슨 말인지 의아해 한다. 설사 나루끝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아차린 경우라 해도 포항 도심지 한복판에서 배를 타고 다녔다는 나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궁금해 하긴 마찬가지다.
포항의 다른 지역은 거의 상전벽해가 되었지만 나루끝 지역은 수십년동안 그 모습을 변치않고 일제강점기의 철길 형태가 덕수동과 우현동을 이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동안 이 지역이 철도청의 시설녹지로 묶여있어 개발이 늦어진 까닭이다.
나루끝은 浦項津(포항나루)의 끝지역 명칭이다. 이 명칭과 위치는 1832년의 ‘영일현읍지’에서 처음으로 밝혀지고 있다.
예로부터 영일과 장기 등 남부 지역 사람들은 각종 특산물을 흥해를 비롯한 청하·송라·영덕 방면으로 운송할 때 모두 나루끝 지역을 거쳐 올라갔으므로 조선전기에는 이러한 통행인의 숙박과 주막 역할을 하는 여천원(余川院)이 설치되어 성시를 이루었다. 이러한 ‘院’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상공업의 발달과 장시의 번창으로 소멸하게 된다.
나루끝은 현재 그 모습이 초라하지만 수백년동안 흥해군과 영일현을 잇는 영일만권의 육로·해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하천을 이용한 강운의 교통수단은 소형선박이 주종을 이루었기 때문에 포항지역에서는 이러한 역할의 중심지가 형산강 하류의 注津(현 연일대교 부근 나루)과 浦項津이었다.
뿐만 아니라 1990년∼1996년 용흥동과 우현동을 잇는 용흥고가도로의 개통, 1995∼2008년의 동해면 석리와 흥해읍 성곡리를 잇는 포항국도대체우회도로, 1991∼2002년 경주시 강동면과 흥해읍 성곡리를 잇는 4차선(28번 국도)확장공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포항지역의 모든 간선도로는 이곳과 연결되었고, 영덕·울진·삼척·강릉 등의 동해안 지역과 청송·영양·안동 등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육로교통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7번 국도의 길목과 동해안 해안도로의 관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형산강 나루끝을 지나 동빈 내항으로
포항의 지형 특성을 살펴보고, 고로들의 전언을 참고하면, 오늘날 포항시내는 갯벌지역으로 3호 5도를 형성하고, 형산강과 시내 서편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로 이루어진 여러 내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상도·대도·해도·죽도의 형산강 지류와 감실골·대흥골·아치골·소티골 방면의 골짜기에서 발원한 계곡물이 만나 형성된 칠성천·양학천·학산천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영일의 注津을 거쳐 시내 서편을 따라 흘러 형산강 지류를 이룬 칠성강이 포항나루의 시발점이 되고, 소티골과 아치골에서 발원된 냇물과 합쳐져 나루끝과 학산천을 경유하여 동빈내항으로 유입되었다 한다.
조선 후기(1832년 전후) 나루끝을 형성한 지류가 서산의 토사와 지형변화로 매몰되고, 1914년부터의 형산강제방축조공사 등으로 논밭이 형성되고 택지가 조성되면서 제모습을 잃고 명칭만 남게 되었다. 또한 지류 부근의 개간으로 지형이 변모하는 중에서도 근래까지 동빈내항 쪽에 학산천 하구의 흔적을 볼 수 있었으나 최근 롯데백화점 앞길(동서로)이 개설되어 배수로로 복개되면서 그 형태는 완전 소멸되고 말았다.
3. 나루끝 지역, 조선시대에 영일현에서 흥해군치역으로 개편
오늘날 포항시내 지역은 영일현의 연혁과 고려말(1387년) 통양포수군만호진(通洋浦水軍万戶鎭)의 행정구역으로 보아 영일현의 행정구역이었음이 분명하다.
고려 말 이종인의 ‘영일읍성기문(迎日邑城記文)’(’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일은 계림의 속현으로 동쪽 해안에 위치해 있고 그 치역은 또 통양포에 임해 있으니 …’와 ‘이인부 : 통양포의 만호로서 현의 감무(監務)를 지냈다’는 기록이 그러한 사실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영일만 내의 바닷가는 통양포까지도 영일현의 치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이러한 치역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달라지게 되었다. 이 지역이 둘로 나누어져 남쪽의 포항리 부근지역과 형산강의 지류지역은 영일현에, 북쪽의 여천에서 통양포에 이르는 지역은 흥해군에 소속된 것이다.
이로부터 오늘날 포항의 북부지역은 점차 흥해군지역으로 편입되어 갔다. 1425년의 ‘慶尙道地理志’에 관방(關防)의 요충지인 통양포(通洋浦)를 흥해 땅이라고 명기하고 있는 것이나, 더욱이 통양포보다 훨씬 남쪽지역의 여천원(余川院:여천리 소재)이 영일현에 소속되지 않고 흥해군에 소속되어 있는 사실(’신중동국여지 승람’, 1530년 )은 이를 입 증해 주고 있다.
조선초기의 통양포와 여천지역이 영일현 소속에서 흥해군 소속으로 바뀌게 된 까닭은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행정·군사·교통·운수를 위한 도로망·역원제·봉수제가 발전하여 그 일환으로 포항북부의 나루끝과 두호동에서 흥해로 넘어가는 도로가 개설되고, 나루끝 가까이에 여천원(余川院)이 번창하게 된 때문이다. 따라서 포항 북부지역과 흥해의 교통·운수가 포항 북부지역과 영일현의 것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두호동이나 환호동 지역에서 흥해로 가는 길, 즉 ① 두호동→새밑못→장성동 침촌→ 불말골(불밋골)→망천(망천역이 있던 곳)→흥해읍, ② 환호동→새깃재→갯거랑→감태고개→새터→망천→흥해읍으로 가는 길이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길을 통하면 흥해로 가는 거리가 연일쪽보다 10리 정도 가깝다.
4. 흥해와 영일의 경계선 여을천(나를내→나루내)
행정구역의 경계가 대개 산천과 도로로 이루어지고 있듯이 포항 지역의 경우도 내(川)를 경계로 하여 구분되고 있다. ‘경상도지리지’(1425)의 흥해군조에「동으로 영일현과의 경계는 여을천(余乙川)인데 15리 거리에 있다」하고, 영일현조에 ‘북으로 흥해군과의 경계는 余乙川으로 14里 202步의 거리에 있다’하여 각각 여을천을 경계로 하였음을 명기하고 있다. 기록이나 거리상으로 보면 여을천은 현 연일읍 사무소와 흥해읍 사무소의 중간 지점이 된다. 오늘날 여천이라는 이름이 여을천에서 유래되었음이 분명하다. 현재로서 여을천이 어느 곳이었는지를 확증할 수 없으나 여을천의 고지명 해석과 여타의 방증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우선 여을천의 기록은 1425년(세종7), 즉 세종이 한글을 반포 (1446)하기 이전의 것으로 당시는 옛부터 내려오는 이두로 지명을 표시했던 관계로 여을 본래의 우리말 명칭인 ‘나를’이 한자로 표기될 때는 ‘여을’로, 즉 ‘나를 내(물건을 옮겨 나르는 내)’가 ‘余乙川’으로 표기 된 것으로, 이러한 ‘나를’이 점차 ‘나르’에서 「나루」또는 ‘나’와 ‘르’의 ‘나르’에서 ‘나루’로 변천되어 불리워졌다고 보는 것이다.
5. 여천 마을의 이동
여천리는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행정구역의 변천 또는 취락의 발전에 따라 중심마을의 위치나 마을의 범위가 변화되고 있다.
그동안 여천리의 영역이 오늘날의 우현동 동남부에서부터 나루끝을 거쳐 중앙동의 고려산부인과의원 부근까지 변천되고 있다. 중요 과정을 살펴보면 첫째, 15세기 후반의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1469)에 ‘興海郡 여천리(余川里) 제비제(濟非堤)’라는 기록이 있다. 제비제는 ‘제비못’이라는 우리 말을 이두식으로 표시 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성문화회관 뒷산을 연산(燕山:제비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1990년대 창포로 개통으로 산허리가 동강나 그 형세를 잃어가고 있다. 그곳 골짜기의 못을 우현시영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도 연지(燕池:제비못)라고 불렀다.
둘째, 조선시대 전기에 흥해군 동상면 여천원이 설치되었다가 조선후기 상공업의 발달에 의해 폐지되고 대신 여천동 남쪽에 여천시장이 형성되었다.
위의 자료를 고구(考究)하면, 흥해군과 영일현의 경계선인 여을천을 어디로 비정하느냐 하는 문제의 실마리가 풀린다.
우선 오늘날의 우현과 아치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하나의 내를 형성해서 항구동이나 동빈로 앞바다로 흘러내려간 것이 여을천이었다고 비정해 본다.
조선초기부터 여천리는 나루끝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흥해와 영일을 잇는 육로와 해로의 길목 역할을 하였으며, 여천원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설치되어 한 때 번창한 것이다.
조선후기 흥해군 동상면에 신흥리가 생길 때까지만 해도 포항리와 나루끝 여천리 사이에는 민가가 형성되지 않았다가 여을천과 나루끝의 역할이 지형적인 변화와 상권의 이동으로 제구실을 하지 못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면서 돛단배가 출입하는 칠성강 안쪽의 포항장과 견줄만한 여천장을 동빈부두 남쪽으로 옮겨 개설하게 된 것이다. 여천장 부근은 새로 개척된 지역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다수 이주하여 큰 상권이 이루어지면서 여천리의 중심마을은 점차 오늘날의 여천동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근래까지 여을천 경계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주목되는 말이 전해져 오는데, 1960∼70년대까지도 속칭 학산천 북쪽의 사람들이 학산천 남쪽 시내로 가는 것을 ‘포항간다’라고 말한 사실이다. ‘흥해군 사람이 영일현 포항으로 간다’라는 의식이 두 지역이 합쳐진 후에도 그대로 존속되고 있음을 반영해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출처 : 경북매일(https://www.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