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에제키엘 34,1-11 마태오 20,1-16
오늘 복음에는 일꾼들의 ‘공로’와 ‘성과’에 대하여 세상의 통념과 다른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주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마 대부분 오랜 시간 열심히 일한 사람과 남들이 일하는 동안
빈둥거리며 놀다가 늦은 시간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액수가
품값으로 지급되는 일을 공평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 말씀에 나오는 주인의 생각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인은 이른 새벽부터 일꾼들을 부르러 광장에 나갑니다. 수확에 매진하였던 그는 일꾼들을
더 불러 모으기 위하여 적어도 네 번이나 더 집을 나섭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이고, 일꾼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삶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입니다.
포도밭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낮’은 모든 사람의 인생을, ‘저녁’은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순간을 상징합니다. 저녁이 되자 주인이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주고자 줄을
세웁니다. 그런데 가장 늦게 와서 일한 이들이 가장 먼저 불려 나가 품삯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생각과 주인의 생각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맨 먼저 나와 열두 시간씩 일한 일꾼들은 겨우 한 시간 남짓 일한 일꾼들이 못마땅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맨 처음 나와 일한 이들에게도 나중에 온 이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주인의 논리에 따르면,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행동에는
‘공로’를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은 공로가 아니라
일꾼들의 필요에 따라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논리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행하시는 놀라운 방식입니다.
우리는 ‘공로’의 종교, ‘보상’의 종교에 익숙한 나머지,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선행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 두고 평가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보상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기는 공로에 따라 지불하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워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포도밭에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은 복됩니다. 그들은 수고하며 땀도 많이 흘렸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님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운데 먼저 부름을 받고 응답한 이들은 맨 나중에 와서 품삯을 받은 이들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히 살아간 인생이 최고의 보상이고 감사한 인생이 아닌가?’
비유 속 포도밭 일꾼들의 태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 앞에서 의아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포도밭을 일구고 있습니까?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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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에제키엘 34,1-11 마태오 20,1-16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의 목자를 거슬러 하신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에제키엘 예언서 34,2-3)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슬러 말씀하십니다. 양 떼를 보살피는 목자는 아픈 양을 고쳐주고
다친 양을 싸매주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못된 목자의 양 떼는 길을 잃고 헤매며
흩어져서 들짐승의 먹이가 되고 약탈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 양떼를 돌볼 목자가 되시겠다고 하십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에제키엘 예언서 34,11)
요한은 예수님께서 구약시대부터 예언되었던 착한 목자이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4-15)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에서 일할 일꾼들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주권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한 포도밭 주인이 아침에 일할 일꾼들을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자기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다시 아홉 시쯤, 또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 나가서 일할 사람들을
구해 자신의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저녁 때가 되지 품삯을 주는데 모두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더 받으려니 기대했기 때문에 늦게 와서 일하는
사람도 똑같은 품삯에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오 20,12)라고 투덜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불평하는 그들에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20,15)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포도밭 주인은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오 20,16)
라고 덧붙여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비유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선 이스라엘 사람들을 빗대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민으로 선택된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적으로 오래된 이 사실을
자부심과 타 민족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갖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택은 시간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각자가 현재에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집안이 역사를 들추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나는 구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또는 '우리 집안에 순교자가 있다.'라고 말하며 자부심과 함께
은근히 자랑까지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면
그 사실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이야기에는 열심히 하면서 정작 자신의 신앙생활은
뒷전이라면 그 사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통해 구원은 인간의 계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따지는 것을 앞세우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주권이며 선물인 은총과 사랑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조들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어온 유대인들 뿐 아니라 구원은 이방인들과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에 대해 이런저런 뜻으로 해석하려고
하지만 사실 하느님께서 구원을 좌지우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부르시는 주님께서 그 권한을 갖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권한인 것입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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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수 야고보 신부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에제키엘 34,1-11 마태오 20,1-16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마태 20, 1-16)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아보자.
첫째 우리는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예수님께 채용된 일꾼들이라는 것이다.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포도는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복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두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채용된 예수님의 일꾼들이다.
따라서 모든 크리스챤의 첫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바로 그곳에서 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유치원에서 일을 하던지, 가정에서 가정 주부로서 일을 하던지, 직장에서 일을 하던지,
또는 병원에서 일을 하던지, 크리스챤의 첫째 의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성직자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병원, 학교, 유치원, 사회복지, 양로원 등을 가보면
운영자체에 역점을 두고 있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만일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일에 중요성을 두지 않고 사업체의 운영에 또는 일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먼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모든 사업체는 복음전파의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가정의 가장들이나 주부들도 어떻게 하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직장에 가면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으로 채용된 주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저의 매일 복음 묵상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이 내용만이라도 가족들과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는 것도 아주 훌륭한 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것이다.
두 번째, 포도밭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을 말한다.
이사야서에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서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 말인가? ..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이사 5, 1-7)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해주시고
그들을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복지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보살펴준 백성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도 않았고 야훼의 계명도 지키지 않았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말인가?"라고 한탄할 정도로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은 백성이었다.
이제 옛 계약을 폐기하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포도밭으로서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야훼께서 새로 만든 포도밭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가 송이송이 맺게 해야 한다.
포도송이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포도밭은(장소는) 바로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정, 직장 등은 포도송이를 맺어야할 포도밭이다.
포도송이를 맺으려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그곳이 집안이든 아니면 직장이든 그곳은 나의 포도밭이 아니라
주님의 포도밭이다.
따라서 우리는 채용된 일꾼답게 성실하게 일해서 많은 포도송이를 맺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 빈둥 노는 사람,
자기가 관리해야할 포도밭은 팽개쳐 놓고 다른 사람의 포도밭에 가서 그 사람도 일을 하지 못하도록
훼방노는 사람 등은 자기 몫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세 번째 우리는 주님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한 사람들이다.
한 데나리온이란 하루 일한 노동의 대가의 비용이다. 즉 우리가 하루 생활할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우리가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떤 노동의 대가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한 데나리온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노동의 대가를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일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가 잘나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 같은 이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시어 당신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러 주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드리며 기쁘게 일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루 일한 대가를 바라보고 일을 한다면 그것은 노동자로서 노동을 하는 것이요
일종의 노예로서 일을 하는 것이지 사도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일한 대가에 목적을 두고 일을 한다면 즉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창조적인 복음 전파를 할 수 없고 다만 마지못해서 시키는 일이니까
억지로 하는 복음전파가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떤 대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도록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노예로 일하도록 불러 주신 것이 아니다.
일할 것이 없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김으로서
일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신다.
따라서 포도밭에서 일하는 이는 일 자체에서 즉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아야 한다. 한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보너스로 받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내가 얼마를 더 받을까 다른 사람들은 얼마를 받을까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말고
오직 나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을 10년 한 사람이나 5년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주님의 일꾼들이다.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리움을 받았고 그 일을 얼마나 충실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성바오로회 유광수 야고보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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