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에제키엘 37,1-14 마태오 22,34-40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어릴 적 캄캄한 밤하늘에 아름답게 빛나던
별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십계명 가운데서 한 계명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따르면 십계명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법,
하느님께서 돌판 위에 직접 새겨 주신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십계명이 아닌 신명기와 레위기에서 한 구절씩
선택하셨습니다. 십계명은 부정형의 엄중한 명령문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계명,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놀라움을 주는 것은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입니다.
본래의 질문은 가장 큰 계명 하나를 뽑아 달라는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에 이어
둘째 계명을 더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서 두 번째 계명이
첫 번째 계명과 같다고 하십니다. 누가 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그 두 계명을 다르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만 하고 살 수 없습니다.
기도와 침묵, 피정과 묵상을 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고, 내적이며 영적인 삶을 가꾸는 일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사람들과 멀어지게 하는 경향을 낳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가 사람들에 대한, 또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낳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성경의 전통, 교회의 가르침에서 모두 동떨어진 것입니다.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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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태 야고보 신부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에제키엘 37,1-14 마태오 22,34-40
첫째가는 계명
유다인들이 십계명을 근간으로 6백여 가지가 넘도록 율법 조항들을 세분화시킨 일을
너무 가볍게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삶의 모든 차원에서 극도의 경건함을 실현하려는 그들만큼 신앙의 열정을 지닌 민족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까닭은 너무도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고 있지만,
그런 일들이 그 율법의 근본 바탕을 이루는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일 안에서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45년 4월 9일, 개신교 신학자 본 회퍼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는 죄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목사요 신학자가 어떻게 십계명의 제5계명인 사람을 죽이는 일을 시도할 수 있을까요?
본 회퍼는 감옥에서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사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본 회퍼의 이런 행동을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하는 잣대로 재서는 안 됩니다.
그에 앞서 도대체 십계명과 모든 율법 조문의 근본 정신이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율법 조문 중 첫째 가는 계명과 둘째 가는 계명만 언급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주교구 김광태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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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에제키엘 37,1-14 마태오 22,34-40
오늘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구원과 희망의 신탁을 전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라는 표현은, 새로운 신탁 또는 새로운 장을 나타내며,
상징적 표현인 ‘바싹 말라 버린 뼈들’은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이어져,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구원과 희망의 문을 열어 놓습니다.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 인간이 보기에는 조그마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만이 구원을 이루실 분이라고
제시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별적인 육신의 부활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불충으로 그들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졌지만, 그 관계의 회복은 온전히 하느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영의 그 뜨거운 ‘숨’을 다시 불어넣으시어 말라 버린 뼈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한처음에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던 창세기를 떠오르게 합니다(창세 2,7 참조).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 더 절실한 오늘날에 다시금 그분의 ‘숨’이 우리 안에
불어넣어지고, 그분의 ‘손’이 우리에게 내리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이를 준비하도록 예수님께서 큰 계명을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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