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 동학사의 風景과 心景
새해 들어 진달래 첫 나들이를 공주 동학사로 정했습니다. 계룡산 동편에는 동학사, 서편에는 갑사, 남쪽에는 신도안 신원사가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이 갑사가 있는 계룡면이고 처가는 신원사에서 가까운 노성면 입니다. 내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추억 계룡산 갑사와 동학사간 산길을 쌀을 지고 넘나들던 그 시절이 생각납니다. 우리부부는 일산에서 오후2시에 출발하여 화성 - 평택 간 고속도에 접어들자 함박눈이 내리더니 천안에 이르러서는 해가 비추더군요. 기상청이 충청, 전라지방 서해안 일대 대설주의보를 발령하여 긴장되었으나 숙소인 동학사 J2호텔에 이르는 데는 별다른 무리는 없었습니다. 이 숙소는 무인호텔로서 차량파킹과 숙소진입이 다른 곳과는 전혀 내통할 수 없는 구조로 처음에는 불편을 느꼈으나 몇 번 사용하니 불편감이 사라지고 또한 숙소는 깔끔하고 방도 넓고 가성비도 좋았습니다. 우리부부가 호텔에 도착하니 이미 총무인 이영휘 부부가 도착했고 봉진이 부부가 도착하고 내윤이부부가 들어오고 대전에서 종각이가 혼자 도착했습니다. 청주에서 박건호와 황정자여사님이 같이 늦게 출발하여 예약된 저녁시각을 지체할 수 없어 일단 도착한 우리 모두는 식당으로 출발 했습니다. 차량은 4륜구동인 내차와 봉진이 차량을 이용했습니다.
저녁은 박정자 삼거리 솔내음 식당에서 오리훈제와 가져온 와인 과 양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였습니다. 다 같이 한잔씩 하니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차려 논 식단에는 식당된장찌개가 일품이고 시래기 무침이 맛깔스럽고 단 호박 위 오리훈제가 입맛을 돋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정다운 친구들과 같이 있으니 입에서 술을 부르더군요. 그래서 나수 들이켰습니다. 총무님이 집에서 가져왔다는 양주가 잉크색으로 좋은 술임을 단박에 알았습니다. 나눠 마셔야할 양주를 내가 좀 더 마신 것 같습니다. 봉진회원님 말로는 1/3정도 내가 다 소비했답니다.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행복을 누리는 순간입니다. 근데 와인과 양주를 같이 마시니 기분은 따불로 좋더군요. 한 시간 후 청주에서 건호와 황정자 여사님이 도착해서 준비한 오리훈제 중자로 저녁을 드셨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술이 거나해서 집사람이 핸들을 잡았습니다. 밖을 보니 밤중에도 흰 눈이 선명 합니다 그 옛날 시골에서 흰 눈을 밟으며 마실 다니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숙소에도착하고 조금 지나 이석범 부부가 도착해서 가져온 연잎 밥으로 저녁을 해결 했습니다 우리진달래 총원 14명중 13명이 한자리에 같이했습니다. 이 동학사는 우리 학창시절 수시로 애용하던 정든 고장입니다.
온 천지가 흰 눈 일색인 동학사 주변은 나에게도 감회가 깃든 곳입니다. 대전공전 학창시절 대전시 가양동에서 자취생활로 인해 공주 계룡에서 쌀을 지고 계룡산 갑사를 거쳐 동학사를 경유 유성에서 버스를 타고 자취집에 도착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장소중의 한곳이 동학사 입니다. 과거를 회상해보면 내가 대전시 유천동 큰댁에서 대전공전을 통학할 당시 기술을 배우고 시험을 보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내 삶의 미래에 행복이 다가오는 줄만 알았던 숙맥 같은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취할 땐 그 행복을 위하여 어떤 때에는 쌀3말을 지고 계룡산을 넘는 그토록 힘든 길을 가야만했는지 지금에서 돌아보면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그런저런 현실적 이유가 있었고(가난) 심리적 이유도(출세욕) 분명 있었습니다. 우리사회에서는 어떤 개인이 자신의 주관적 평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개관적인 증거물이 타인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수많은 자격증과 증명서를 취득하려는 노력 또한 이런 동기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고 사회에 진출하여 보다나은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나 행복은 나를 세상에 증명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고 자신이 이와 같은 경험의 주인공이자 평가자입니다. 비빔냉면이 물냉면보다 좋은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듯이 내가 행복할 자격을 세상에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생각에 확신을 가지면 행복해진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옛날 대전공전 재학당시 내가 쌀을 지고 갑사 대웅전 뒷길을 거쳐 가파른 산길을 올라 땀을 흘리며 금잔디고개 북쪽 용수 고개 길을 넘어서면 인적이 뜸해지고 계곡사이 물소리는 청량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기운에 행복한 기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추억의 고갯길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나의 인생에서 쌀을 지고 고개 넘는 이런 인생길을 선택하는가? 결국은 오지선다형(五肢選多型:객관식 시험문제중 하나) 판단의 기술적 사고를 습득하기위한 강의를 청취하기 위해서라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이러저런 판단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인데 그러하지 못한 50년 세월이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있습니다. 요즘 나이가 들면서 추억의 장소를 그리워할 때가 종종 있지만 내 이력의 일정부분 시대의 한 인간의 행로(行路)로 치부하기에는 인생의 굴곡이 너무 깊습니다. 인문학적 교양과 예술적 영혼을 살찌우는 인생보다 어찌 보면 경제개발에 소용되는 기술적 부품으로 양산되는 이력이 전부인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나의 회상은 과거를 주관적으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자기망상의 연속이었습니다. 인생이력의 스토리가 표면과 심층으로 나뉘고 인생 전개방식도 명시와 암시가 갈마들면서 내 자신이 심적으로 복잡 미묘해지는군요. 인간은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할 수도 완벽하게 옹호할 수도 없습니다. 망상(妄想)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도 지배합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고 싶다는 망상을 했고 그 망상이 지금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이 나이쯤이면 더 깊은 사유의 세계로 자유로이 헤엄쳐야할 자신이 아니던가! 어쩌다 십 수 년 학창시절은 OX,와 흑백판단으로 갇혔는가! ‘긍정이냐 부정이냐’ 맞는냐? 틀리느냐? 식의 이분법적 판단을 재촉하고 더욱이 나의 삶에 필요한 질문과 해답도 자신이 직접 찾아가는 진정한 사유의 물꼬를 차단해 버리는 교육행정 편의주의에 익숙하게 단련을 받고 사회에 흘러들어왔습니다. 교육행정 편의주의에 따라 모두가 시험에 매달리는 것은 스스로 보는 자기모습보다 사회의 인정에 무게를 두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신의 다채로운 개성을 말살해버리는 판단의 성급함은 사유의 과정 자체를 향유하는 인간정신의 탐험을 말살하고 가치를 부정합니다. 지금 내가 예술을 그리워하고 사유를 즐기고 싶다는 것은 또 다른 망상일 지도 모릅니다. 판단의 본질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수동적 리액션이라면 사유의 본질은 자신의 창조적 액션이입니다.
주관이 모자라면 군중의 노예가 되고 주관이 지나치면 망상의 종이 된다는 논리로 바라보면 객관적 보편성과 소통하지 못하는 주관은 억지요 고집일 뿐입니다..
아침에는 역시 박정자 삼거리 근처인 산시래기 우거지식당에서 시래기국으로 아침을 해결했는데 시원하게 잘 익은 무우 석박지 와 막걸리 두 잔이 좋았습니다. 영하의 혹한에 동학사일대는 적막합니다. 간선도로 외는 흰 눈이 정겹습니다. 오늘 아침을 마치자 총무인 이영휘 부부께서 이사관계로 오늘 일정을 같이할 수 없어 이 후 일정의 관련 정리를 내가 해줄 것을 부탁하고 헤어졌습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202호 숙소에 모여 동학사 경내를 둘러볼 것인지 경하장 온천 후 점신을 할 것인 지를 놓고 의견을 수렴한 결과 날씨와 시간관계로 유성 경하장에서 온천욕을 하고 유성구 금남 구즉리 대청장어가에서 장어로 점심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유성 경하장에서 김종미여사님과 김옥재 여사님은 입욕을 하지 않고 한방차 2잔을 드시고 나머지 8명은 온천욕을 했습니다. 약속대로 12시 반까지 온천욕을 마치고 구즉리 대청장어가로 출발했습니다. 초벌구이를 마친 장어를 다시 숯불위에 구어서 온갖 양념으로 같이 먹는 맛도 좋았습니다. 이곳도 가성비가 좋았습니다.
식당에서 나올 때 시각이 오후 2시 25분이라 노성 처가에 들리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고 귀가 길에 올랐습니다. 올해 처음으로 나들이로 동학사에서 숙식하며 눈으로 덮인 동학사 주변 산세를 바라본 느낌이 떠올랐습니다.
50년 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산세가 동학사전경으로 눈에 들어옵니다. 아! 아름다운 설경은 동심이나 지금이나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19세의 나 자신을 돌아보는 68세의 심경은 이불변응만변(以不變應萬變)의 비유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 글귀는 한학의 조예가 깊었던 베트남 호지명의 좌우명이었고 호찌민답게 주역의 핵심논리인 변을 빌려 이념에 빠지기 쉬운 경직성을 벗어나려했으며 결국 이 원칙으로1954년 프랑스를 몰아냈습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는 김구선생의 귀국전날 쓴 휘호이기도 합니다. 불변의 원칙으로 1만 가지 변화에 대응한다는 뜻으로 동학사의 풍경과 바라보는 심경을 위와 같이 불변의 동학사산세와 만변의 내 심경을 그려보았습니다. 만물의 객관적 판단을 유보하고 주관적 사유의 세계로 떠나봅니다. ‘불변하는 가치로 만 가지 변화에 대응하자.’ 고 마무리하면서 진달래 동학사 관광여행 느낌을 마칩니다. 불변하는 가치는 진달래우정입니다. 갑자기 유토피아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더 좋은 것을 꿈꾸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누구나 소망하는 상상의 공동체가 유토피아입니다. 오늘 나는 현실의 유토피아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행복 했습니다. 진달래 회원여러분! 감사합니다.
2018년 1월 12일 오후 9시
율 천
첫댓글 좋은글입니다
나와 같은 고향이고 내고장 얘기라서
재밋게- 읽었습니다 나도 공주시 계룡면이 고향이거든요
아! 누구신지 모르지만 동향인으로 반갑네요
예 국민학교 6회 졸업생입니다
공주군계룡면에있는 왕
지금은 그모교가 없어 졌네요,
왕흥국민학교에서 좀 더 가면 약300미터가면 유명한 내흥 보신탕집이 있는데 .. 좀 더 가면 계룡산 골프장도있고 ...
맞아요 내리가 바로 내고향 이예요 (동산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