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성 다미아노 신부
연중 제21주일
여호수아 24,1-2ㄱ.15-17.18ㄴㄷ 에페소 5,21-32 요한 6,60ㄴ-69
제자가 스승을 떠나는 까닭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누군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께 자신의 인생을 거는 사람을 제자라고 부릅니다.
참스승을 만났을지라도 제자가 스승을 떠난다면 가장 불행한 일이지요.
그런데도 제자들이 스승 예수를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제자는 스승의 말을 듣고 스승의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자 열망하지만 제자는
스승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스승은 깨닫고 가르침을 베풀었지, 듣고 깨달은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言語道斷 不立文字)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가 스승의 깨달음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자 한다면 잘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이유입니다. 스승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고 그 말이 귀에 거슬렸던 것,
그로 인해 결국 떠나감은 그들의 ‘들음’의 자세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로마 10,17) 믿지 않는 자들은 듣지 않은 자들입니다.
스승의 말을 듣되 듣지 못한 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알음알이’의 세계를 견고히 쌓아가고
조각난 지식들을 진리라고 착각하였습니다. 화려한 언어들과 정교한 논리들을 스승의 가르침과
동일시하며 자신의 뜻에 스승이 동의할 것으로 믿게 되거나(루카 9,54 참조),
높은 자리를 원하며(마르 10,35 참조), 머지않아 스승을 배신하는 낭패를 보기도 합니다.
(요한 6,71 참조)
지금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나의 판단과 생각을 잠시 내려놓으십시오. 자연의 소리를,
세상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는 연습을 하면, 어느 순간 그들과 내가 일체(一體)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마저 없는 완전한 들음이 될 때, 비로소 스승의 마음을 듣게 되고
그분이 나를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제자도 더 이상 듣고 깨닫는 사람이 아니라 깨닫고 말하는 스승처럼 되었습니다.
스승과 하나가 되어버려 떠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신이 듣고
신이 말하고 내가 듣고
서로 말하지 않고 서로 듣고
서로 말하지 않고 서로 듣지 않고
부산교구 손태성 다미아노 신부
2024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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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섭 요한 사도 신부
연중 제21주일
여호수아 24,1-2ㄱ.15-17.18ㄴㄷ 에페소 5,21-32 요한 6,60ㄴ-69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갈등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나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의 갈등 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
판단 기준, 욕심, 바람 등을 내려놓지 못해서 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부분을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을 하고 자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신앙인들은 이런 신앙적 갈등 앞에 누군가는 믿음이 부족함을 느끼며
다시금 하느님을 바라보고자 노력하지만, 누군가는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아'라며
신앙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신앙적 갈등을 겪는 이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바로 예수님 앞에 선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기적을 보며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전해들은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갈등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극히 세속적이고도 현실적인 생각과 이를 뛰어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대놓고 불편함을 드러내며 말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려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아있는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이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적 갈등 앞에서도 예수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분명, 열두 제자들도
떠나간 다른 이 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 또한 아직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주님'이라는 단어가
영어 번역본 안에는 'Lord'가 아닌 조금은 더 인간적인 의미의 'Master'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에도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부족함은 하나 둘 채워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신앙적 갈등 앞에 중요한 것은 부족함마저 예수님께 맡겨드린 채
예수님을 따르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신앙적 갈등 앞에 예수님을 떠나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떠나가기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끝까지 그 갈등을 극복할 수도,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 매달린다면,
우리는 우리를 위해 손수 마련된 좋은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적 갈등을 하나 둘 극복해 나감으로써 우리들의 신앙은 조금씩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마주하게 되는 신앙적 갈등에도 예수님을 따르기를
선택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원주교구 이태섭 요한 사도 신부
2024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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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베드로 신부
연중 제21주일
여호수아 24,1-2ㄱ.15-17.18ㄴㄷ 에페소 5,21-32 요한 6,60ㄴ-69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요즘 지방 군소도시들이 앞으로 소멸할 위기가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구는 감소하고 출산율은 저조한 가운데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 수도권으로
몰리고 있으니 그런 전망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말이 있지만 이 시대의 떠남은 싫어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생존을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닐까요?
누구나 더 좋은 것을 찾아 떠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떠남이라는 선택은 항상 올바르지만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떠남은 하느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가운데 일어난 떠남이고
복음 말씀의 비유 중에 아버지 집을 떠난 작은아들의 비유는 잘못된 선택에 해당하는
떠남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떠나는 새로운 삶을 향한 여정에 하느님께서는 함께하십니다.
하지만 작은아들과 같이 아버지를 떠나는 어리석음에는 그에 맞는 시련이 허락되기도 합니다.
잘못된 선택이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주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예수님의 제자들 중 많은 수가 예수님을 떠났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받아먹으라는 말씀이 거북하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그들은 내비칩니다.
그보다 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그들은 원했을 것입니다.
육적인 양식만을 먹고 살기를 바라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영적 양식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고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떠났다고 보여집니다.
그들의 떠나는 모습은 하느님께 충실했다가 다시 멀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같고,
세례 때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그에 맞는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다가 그 마음이 시들어
다른 것이 더 나에게 행복을 줄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바로 내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성체성사로 영적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는 것은 세례 때 다짐했던 그 약속에
충실하고자 하는 새로운 서약임을 기억하며 주님을 떠나는 일 없이 그분 안에 머물며
살아가는 참 행복을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대전교구 김영삼 베드로 신부
2024년 8월 25일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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