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원 니코메데스 신부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마태오 23,13-22
마태복음 23장은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이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선언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인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선언은
오늘과 내일에 걸쳐 우리가 듣게 될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곱 가지 불행선언 가운데 첫 번째부터 세 번째 불행선언에 이르는
말씀입니다. 불행선언이란 말은 7개의 단락이 모두가 “불행하다.”라고 하는 말씀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선언은 불행에 대한 암시적인 심판을 수반하는 말씀으로
진복팔단의 말씀과 정반대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말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1절). 우리는 이로 인해 이 말씀을 해석학적으로 교회공동체와 지도자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비판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위선이 아니라 오늘 교회 공동체와 지도자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위선에도 해당된다고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13절부터 시작되는 불행의 선언은 ‘율법’이나 ‘모세의 자리’가 아니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범한 그들의 가르침과 위선에 대한 경고와 교훈입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가 늘 경계해야할 교훈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당하게 될 불행은
3절 후반부터 4절까지 언급된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그리고 무거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그것들을 얹어놓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3절부터 15절에서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불행의
선언입니다. 때문에 이 불행은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의 잘못된 시각과 관행, 이런 잘못된 시각과
관행에 그 책임이 있는 율법학자들에 내리시는 통렬한 불행선언입니다.
본문에 다섯 번이나 나오는 “外飾하는 者” 또는“위선자, 연기자(배우)”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선행을 하는 동기’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 위해서’, ‘어떤 이익과 보상을 얻기 위해서
말이나 행동을 거짓으로 꾸미는 者’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때문에 이 단어는 자기기만(自己欺滿)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기만(欺滿)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문적인 율법 연구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유대교의 지도층으로 지칭되는 것은 그들이 공동체 안에서 모세의 가르침인 율법을 해석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이 그릇되게 율법을 해석하고 사람들을 가르친다면
그들은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문을 사람들 앞에서 열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과 행동이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나,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문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닫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13절)
더구나 그들의 잘못된 인도 때문에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된다는 것입니다(15절).
16절부터 22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
그들의 그릇된 궤변적인 해석과 가르침을 정죄하시는 세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불행하다. 바리사이 위선자들아!”라는 지금까지의 호칭을
16절에 와서 아주 통렬하게 “불행하다. 너희 눈먼 길잡이들아!”로,
그리고 18절에 서는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로 저들을 부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의 무지와 위선, 무책임이
자신 뿐 아니라 공동체에 얼마나 큰 죄악이 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이러한 무지와 위선, 무책임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아멘
부산교구 박승원 니코메데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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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환 프란치스코 신부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마태오 23,13-22
주님을 따르는 겸손한 생활
오늘 아침에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은 당신을 믿는 우리들이 겉과 속이
분명한 믿음의 생활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속에는 썩은 시체를 놓아둔 무덤이지만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회칠을 해두었다고 해서
그 곳이 깨끗한 곳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순백의 믿음이 아니라
자신을 돋보이고 싶은 얄팍한 마음이 존재한다면 우리들 역시도 겉과 속이 다른 소위
[표리부동]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부드럽고 온유하고 친절하고, 끊임없는 용서를 스스로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만큼은 위선의 삶을 살고 있는 대표적인 무리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꾸중하시며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하는 무리](마태 23,14),
[개종시킨 사람을 자신보다 갑절이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무리](15절),
[눈먼 인도자](16절), 그리고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18-22절 참조)이라는
극단적인 표현마저도 서슴지 않고 사용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거짓으로 가득찬 사람, 하느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영욕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에게 벼락같은 분노를 나타내시는 이유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잣대로 상황을 거짓 재단하고,
진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그 진실을 무시해버리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자신들의 소행을 계속해 나갈 수 없으리라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매일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에게도 하루의 삶 전체가 주님의 뜻을 찾고 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노력이 어렵다고 해서 진실을 외면하며 나름대로 편한 구석을
찾아 다니다보면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주님의 꾸중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 앞에서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주님을 섬기고 두려워하여 겸손한 생활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서울대교구 박선환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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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마태오 23,13-22
사제로서 투명한 삶을 꿈꾸며
사제로서 가장 편안한 만남은 동료 사제들과의 만남입니다. 아니 어쩌면 사제들과의 만남이
가장 편안한 만남일 수밖에 없도록 안팎의 여건이 강요하는지도 모릅니다.
왜 사제로서 사제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편할까요? 단지 같은 길을 걷기 때문에, 같은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이런 이유만은 아닙니다.
사제들의 삶,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많은 부분 감추어져
있습니다. 비단 사제들의 삶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지요.
사제는 말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에서 많은 부분을 감추도록 강요당합니다. 사제는 자의든
타의든 많은 부분을 감추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면 믿는 이들이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다 드러내면 자칫 의도하지 않았던 분열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 교회의 누가 될 수 있습니다.
신자분들을 만나면 참 조심스러워집니다. '혹시나 나 때문에...' 하는 마음이 들곤합니다.
이런 저런 응어리들을 내 자신 안에 꼭꼭 감춥니다. 그리고 친하게 지내는 동료 사제들에게
풀어놓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고, 욕도 해대고, 자신의 부족하고 못난 모습들
부끄럼없이 벌려놓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어찌보면 위선자입니다. 적어도 제 자신은 위선자입니다.
일상 생활 안에서 만나는 많은 믿는 이들이 바라보는 제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감추어진,
그래서 동료 사제들에게만 살짝 풀어놓는 추한 제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감추는 것이 믿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싶기도 합니다. 사제를 향한 믿는
이들의 꿈과 사랑을 깨뜨릴 수는 없으니까요. 사제로서 감수해야 할 고통을 그대로 믿는 이들에게
전할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감추려는 인간적인 추함이 자신을 감추는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은...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대더라도 겉과 속이 다르니 위선자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안타깝게도.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참으로 수치스러운 이름이지만,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저의 이름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믿는 이들이 보시기에, 동료 사제들이 보시기에 한 점 부끄럼없이
겉과 속이 똑같은 삶을 살고 싶은데... 언제나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노력할 따름입니다. 한 사람의 사제로서 투명한 삶과 '다름'을 기쁘게 받아 안는
넉넉한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