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2테살로니카 2,1-3ㄱ.14-17 마태오 23,23-26
마태오 복음에는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행복 선언(산상 설교의 시작, 마태 5,3-12 참조)
의 말씀과 “불행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말씀(마태 23,13-37 참조)이 나옵니다.
복음 안에서 이 두 선언이 서로 교차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맞서고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길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일곱 가지
불행한 삶에 관한 말씀 가운데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경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의 위선의 가면을 벗겨 내십니다.
위선자는 한마디로 연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위선자의 행동에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자 하는 목적과 지향이 담겨 있습니다. 위선의 깊은 뿌리에는 자기애와
자기만족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기주의는 정확히 참사랑과 반대됩니다.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땅히 옳은 일, 명시적인 바른 규정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 경우 모든 사람이 그것은 잘못된 일이고 그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다른 방식의 악행이 있는데, 이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훨씬 더 나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에 해당하는 일들입니다.
이를테면 법의 준수라는 가면을 쓰고 저지르는 숨은 악행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겉으로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아 스스로 만족해하지만,
실제로는 작고 약한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 양심을 해칩니다.
‘십일조 규정은 지키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더 중요한 하느님의 법은 지키지 않는다.’
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오늘 하루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특히 의로움과 신의 사이에 있는 중심 말씀인 ‘자비’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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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2테살로니카 2,1-3ㄱ.14-17 마태오 23,23-26
"잔과 접시의 겉은“
과거에 한동안 교회의 일부 수도자들, 심지어는 성직자 몇 분이 불교의 선과 교회 전례의
기도와 접목을 한다고 스님들과 왕래를 하던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예불에도
함께 하며 참선을 통해 묵상의 새로운 접목도 시도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다른 종교라도 서로 왕래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또 한가지의 모습은 불교의 누구도 수도회나 성당을 찾아와 강의는 한 적은 있어도
적어도 수도자들과 일부 성직자들이 했던 모습처럼 불교의 누구도 수도원에서 함께 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일부가 불교에 귀의하거나 아니면 교회를 떠나는 모습은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을 들어보면 전통의 가톨릭 교리 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가톨릭의 일부에서는 가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닌 또 하나의 전례의 모임을 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도 놀랍게도 가톨릭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들이 가톨릭의 전통은 낡은 것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그래서 자신들이야 말로
새로운 개척자로 자처하는 모습도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일치의 첫 걸음은
자기의 것을 정통으로 잘 알고 교회 사랑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도 교회를 비판하거나 적어도 자신이 옳다는 것만을
내세우는 경우도 볼 수가 있습니다. 백성의 공동선 추구에 같은 방향을 하고 있는 종교와 정치는
어쩔 수 없이 밀접한 연결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진세력은 무조건 보수세력을 그릇된 것으로 몰아 세우고 국민의 지지만을 추구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한 정치는 아닐 것입니다. 이제까지 쌓아온 보수의 정치도 그 나름대로
나라를 사랑하고 자신의 정치 연륜을 세우는 것이지요.
보수와 신진세력이 이제까지의 정치전통을 존중하면서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가리며
비판받을 것은 비판받고 인정할 것은 인정할 때 민주정치의 밝은 미래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가치관, 경력만 주장한다면 서로의 공유는 불가능하겠고 발전보다는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더 크겠지요. 종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전통과 가치관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종교의 바탕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 공동체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라며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2테살 2,14-15)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시면서도 그들이 지키는
전통에 대해서는 존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지키지 않는 그들의 위선을 탓하시는 것이지요.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오 23,23)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눈먼 인도자,’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면서
속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한 자’로 신랄하게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이 군중에게서 군림하고 대접받으려 하지만 그들은 실천은 없는 위선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종교이든지 나름대로 고유한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는 것입니다.
사막에서부터 가나안 정착과 왕제, 그리고 유배의 쓰라림의 역사와 고유의 전통을 갖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전적으로 배타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일부 종교에서는 가톨릭에 호의적이고 일치운동의 희망을 갖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일부 교회에서는 무조건 배타적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 중에 대부분은 가톨릭 고유의 역사와 전통과 함께 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유대인들에게서 받는 배타적인 모습을 지금 또다시 일부 교회에서는
가톨릭에 배타적인 모습을 강하게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상대방의 전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서로의 대화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지요. 남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나 외에 상대방의 이제까지 살아온 것들을
존중해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구약의 전통을 존중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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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2테살로니카 2,1-3ㄱ.14-17 마태오 23,23-26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사실 여러 가지 부패 중에서도 종교적 부패는 항상 가장 신랄한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부패는 더욱 그렇습니다. 또 종교지도자들의 윤리적 부패 못지않게
탐욕에 의한 부패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부패와 분열은 요한 묵시록에서는
세상 종말의 징표로 제시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 선언은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네 번째 불행 선언은 그들의 십일조에 대한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었고 철저했고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행하는 일은 실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태오 23,23) 그들의 마음을 탐욕으로 채웠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불행 선언은 속은 감추고 은폐하면서 겉은 기만과 허위로 깨끗이 닦는 정결법에 대한
경고입니다. 곧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마태오 23,25)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차원을 넘어서, 애초에 그릇 안에
담고 있는 음식을 정당하게 취득하였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방종에 대한 경고입니다.
앞의 첫 번째에서부터 네 번째 불행 선언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냐?’ 하시며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을 깨우쳐주신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오 23,26)
동시에 루카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깨끗해지는 방법, 곧 더러움을 비워내는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결국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운 그릇을 비우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정결법의 정신이 자신을 지키는 데 있기보다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잔 속을 깨끗하게 하는 일, 그것은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입니다(루카 11,41).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마음 속 탐욕과 방종을 비우소서!
깨끗한 것을 깨끗한 채로, 더러운 것을 더러운 채로 드러내게 하소서!
속은 탐욕과 이기로 채우면서 겉모양만 깨끗이 닦고 치장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채우소서.
제 잔과 접시를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로 채우소서!
제가 당신의 것인 까닭입니다.
제 잔은 당신의 피요, 제 접시는 당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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