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잠단지 (先蠶壇址) 지 정 번 호 : 사적 제83호
지정연월일 : 1963년 1월 21일
시 대 : 조선 성종
2년(1471)
규 모/양 식 : 1,745㎡(461평)
소 유 자 : 서울특별시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4-1

선잠단지는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상고 황제(皇帝)의 황후 서릉씨(西陵氏)를 누에신(蠶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 성종 2년(1471)에 처음 쌓은 것이며, 인근에 뽕나무를 심어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선잠(先蠶)의 의(儀)는
중국의 옛 제도를 본받아 고려초에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왕비의 임무 중의 하나는
친잠례(親蠶禮)를 지내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500년간은 농업과 잠업을
국가의 기간 산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농업을 주관하는 신을 동대문구 제기동의 선농단(先農壇)에서, 잠업을 주관하는 신은 선잠단에 모시고 국가에서
매년 제사를 지냈다.

나라에서는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기 위해
국왕은 친경(親耕)을 하고, 왕비는 궁중 안에 단을 꾸며 내명부ㆍ외명부들을 거느리고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매년 늦은 봄(음3월) 길한 뱀
날(巳日)에 혜화문 밖의 선잠단에 풍악을 울리고 제사를 지냈다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소개되어 있다. 이 날 조정에서는 선잠제가
국가의식이므로 대신을 보내어 제사를 주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세종은 누에치기, 즉
양잠(養蠶)을 크게 장려하여 각 도마다 적당한 곳을 골라 뽕나무를 심도록 강력히 종용하였고, 한곳 이상의 잠실을 지어 누에를 키우도록 하였다.

누에실이 생산되면 국가에서 엄밀하게
심사하는 것을 제도로 삼았다.
성종 8년(1477)에는 창덕궁 공원에
채상단(採桑壇)을 신축하여 왕비의 친잠례를 거행하고, 선잠단에 관리를 보내 제향의식을 매년 3월에 행하여 오다가 중종 원년(1506년)에는 여러
도의 잠실을 서울 근교로 집결하도록 시켰다.

현재 서초구 잠원동과 송파구 잠실동이 그런 잠실이 있었던 지역이다. 한말까지 이
지역에는 수령이 300∼400년 되는 뽕나무가 있었다.
세종 때에 심었던 나무로 알려지고 있다.

단은 사직단(社稷壇)과 같은 방법으로
쌓아 서릉씨의 신위를 모셨으며, 단의 남쪽에는 한 단 낮은 댓돌을 두었다.

융희(隆熙) 2년(1908년) 7월
선잠단이 선농단(先農壇)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 배향되면서 그 터는 어느덧 폐허화되고, 지금은 큰길과 집들로 둘러싸인 조그만 터전을
'잠단지(蠶壇址)'라 새긴 표석만이 지키고 있다
첫댓글 여기는 못 가 본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