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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리산 천년 3암자길 원문보기 글쓴이: 향상일로
무아론(無我論) -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 “일체 현상은 인연화합의 결과일 뿐 실체는 없습니다.”
▶ 강병균 교수는 “사람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사람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는 것처럼 절대로 원인이 되는 것이 없이 결과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 무아·연기론”이라고 강조했다.
무아론(無我論)에 대해 강의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아론은 사실 쉽다고 하면 쉽고 또 어렵다면 굉장히 어려운 이론입니다. 그래서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아론은 사실 연기론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무아가 곧 연기입니다. 용수보살이 ‘중론’에서 열심히 설파하셨듯이 무아가 곧 연기입니다.
무아·연기는 현대과학 정수
무아·연기 아니면 설명 안 돼
무아 알면 자비심도 생겨나
사람이라고 여기는 존재는
오온의 연기 작용이 만든 것
초월적 존재 있다는 건 오산
무아·연기는 현대 과학의 정수입니다. 무아·연기가 아니면 현대 과학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무아라는 것은 일체에 상주불변하는, 변하지 않고 항상 있는, 실체가 없다는 그런 이론입니다.
연기론이라는 것은 생명이건 무생명이건 일체 현상 모두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돼서 생길 뿐이지 따로 그걸 주재하는 실체가 없다는 이론입니다. 무아나 연기론을 알게 되면 거기서 자비심도 나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세울 자기가 없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요. 요즘 많이들 얘기하는 ‘더불어 살기’도 저절로 가능해지겠지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앨리스가 어떤 고양이와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서서히 희미해지더니 사라져 버립니다. 신기하게도 허공에 이빨만 드러내고 웃는 모습으로 딱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앨리스가 굉장히 신기해하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나. 자기는 지금까지 웃지 않는 고양이를 본 적이 있지만 고양이 없는 웃음은 본 적이 없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없는데 사람 모습만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지는 전등은 없는데 전등불만 남아 있다든지, 초는 없는데 촛불만 남아 있다든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웅전에 초는 없는데 촛불만 남아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좀 더 과학적으로 얘기하자면 ‘물질은 없는데 중력만 있을 수 있는가?’ ‘자석은 없는데 자력만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 무아론이나 연기론에 의하면 절대 그런 일은 없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사람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는 것처럼 절대로 원인이 되는 것이 없이 결과만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설명한 것이 바로 무아·연기론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시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고려 후기 문인으로 이규보가 있습니다. 그분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이 백운거사였습니다. 그분이 읊은 천하의 명시가 있습니다. ‘영정중월(詠井中月)’이라는 시입니다. ‘우물 속의 달을 노래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산승탐월색(山僧貪月色)
병급일병중(幷汲一甁中)
도사방응각(到寺方應覺)
병경월역공(甁傾月亦空)
산에 사는 스님이 달이 탐나서. 물을 긷는 김에 달도 같이 길어서 물병 속에 넣었습니다. 산사에 다다르면 비로소 깨달으리. 물을 비우면 병도 공한 것을.
그분이 어떤 계기로 이런 걸 썼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의 특권은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대로 상상해 봤습니다.
스님이 하루는 탁발을 하러 마을로 나갔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 돌다가 어느덧 해가 저물었습니다. 그런데 목이 말라서 우물에 가서 물을 길으려고 합니다. 두레박을 내리다 보니 우물 바닥에 휘영청 달이 있는 겁니다. 그 달빛이 너무 고와서 물을 긷는 김에 달도 길어 가지고 자기 물병에 다 집어넣습니다. 산사에 돌아와서 호롱불을 켜고 조심스럽게 대접에 물을 따릅니다. 그런데 달이 없습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달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걸 노래한 게 이 시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이 기가 막히지요. 병을 기울여서 물을 비우면 병도 공하고, 병은 원래 빈 것 아닙니까? 달도 없지요.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하늘에 달이 뜨고 땅에 물이 있어야지 영상이 생기지 않습니까? 둘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절대 생길 수가 없지요. 그걸 불교에서는 연기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이 텅 빈 것을 파초의 비유를 들어서 얘기를 합니다. 파초의 줄기를 아무리 벗겨도 결국 속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그 텅 빈, 그러나 속이 텅 비었지만 분명히 파초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공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규보는 달을 통해서 불교에서 얘기하는 공을 기가 막히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독일 이야기입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것을 들어 보셨습니까? 동화인데 원 제목은 ‘피터 쉴레밀의 기적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은 피터라는 사람이 악마에게 자기 그림자를 팝니다. 대신 끝없이 황금이 나오는 가죽 주머니를 받습니다. 거래를 끝낸 악마는 피터의 그림자를 똘똘 말아서 들고 가 버립니다.
이후 피터는 굉장히 부자가 됐는데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여러분 누구하고 길을 같이 가는데 이 사람 그림자가 없으면 이상할 것 아닙니까. 친구들이 다 떠납니다. 피터가 낙심을 하고 악마한테 찾아가서 다시 부탁을 합니다. 그림자를 돌려 달라고 했더니 악마가 조건을 겁니다. 당신 영혼을 주면 그림자를 돌려주겠다. 그런데 피터는 자기가 그래도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그리고는 황금 주머니도 버리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자연에 대한 탐구로 위안을 삼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도 얘기를 드렸지만 사람과 그림자를 분리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림자를 사람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연기법을 부정하는 겁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태양과 사람의 연기 작용이지 따로 분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오온을 떠나서 따로 자기가 있다고 얘기를 안 하셨습니다.
오온이라고 하면 색수상행식인데 색은 우리 몸입니다. 그 다음에 수상행식은 우리 정신입니다. 쉽게 말하면 수는 감정이고 상은 생각, 행은 의지, 식은 기억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 생각, 의지, 기억을 떠나서 따로 자기가 없다고 얘기를 하셨습니다. 오온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거기에 자기라는 건 없지요. 결국 자기라는 것은 오온의 연기 작용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오온을 떠나서 초월적인 어떤 존재가 있어서 그 존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게 아니냐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만 팔천리 어긋난 것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윤회를 얘기할 때 상속(相續)으로 얘기합니다. 즉 전 찰나의 오온을 인으로 해서 후 찰나의 오온이 생긴다고 얘기합니다.
사실 우리 몸도 보면 매순간 끝없이 변하므로 그것도 크게 보면 윤회의 일종입니다. 만약 생을 바꿔서 윤회를 하더라도 그것은 상속이지, 중간에 어떤 존재가 있어서 전생의 업을 짊어지고 후생으로 가는 게 아니다고 설명을 합니다.
‘나가세나왕문경’ 혹은 ‘밀린다왕문경’에 보면 그런 얘기들이 나옵니다. 윤회라는 것은 장사가 팔을 펴듯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 이유는 어떤 주체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온의 화합으로써 사람이라는 게 존재할 뿐이지 그걸 떠나서는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본다고 하는 것도 결국 연기 작용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뇌 속에 어떤 화면이 있겠습니까? 영상이 있겠습니까? 영화관 같은 자막이 있어 가지고 거기 여러 풍경들이 상영이 되겠습니까? 안 된다는 거지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뇌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DVD나 CD에 보면 그 속에 영상이 들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습니다. 오직 0과 1이라는 기호 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DVD 녹화기나 이런 데 집어넣으면 거기서 비로소 영상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뇌 속에도 아무런 영상이 없습니다. 사람의 뇌는 뇌신경세포 1,000억개와 1,000조개의 뇌 회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뭘 보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가 뭘 보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불경에 놀라운 얘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근·경·식 삼자의 연기 작용이라고 얘기합니다. 근은 시각기관인 눈을 얘기하고, 경은 시각 대상, 식은 본다는 작용인데, 요즘 말로 하면 시각중추의 작용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경에서 또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근과 경이 연해서 식이 생긴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식이 미리 있는 게 아니고 근과 경이 연해서 그 인연으로 식이 생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현대 과학에서 얘기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식이라는 것은 미리 존재하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미리 존재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뿐입니다. 우리 뇌, 뇌 신경세포, 뇌 회로 그런 것들이 하드웨어고 그다음에 뇌 신경세포가 어떻게 배선이 돼 있느냐는 게 소프트웨어가 됩니다. 그럴 때 그걸 이용해 가지고 우리가 보게 되는 거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장미꽃을 본다, 벚꽃을 본다 그러면 벚꽃에 반사된 빛이 우리 수정체를 통과해서 망막을 때립니다. 그러면 그 망막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시각 신경세포에 생체전기가 발생합니다. 다시 이 생체 전기가 생체 전깃줄인 신경을 타고 뇌로 갑니다. 정확히는 뇌 시각중추로 갑니다. 그러면 뇌 시각중추에서 그동안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모아 놓은 것과 비교를 합니다.
그런데 그 이미지라는 건 영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기호로 존재합니다. 그것과 비교를 해서 ‘아, 이게 벚꽃이구나.’ 하고 인식을 합니다. 그래서 식(識)이라는 것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이라는 게 미리 존재해서 그것이 보지 않나 이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그것은 원래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크게 잘못된 거지요.
예를 들면 참나가 보고 듣고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연기법에 위배됩니다. 그러면 옛날 사람들은 왜 그렇게 귀신이 보거나 참나가 뭐 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했느냐 하면 기본적으로 눈의 구조나 그다음에 시각 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뇌의 구조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이 지금 세상에 태어났으면 그런 얘기 안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 “무아론을 이해하면 세계는 평화롭고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왜 무아론을 공부해야 할까요? 무아론을 알게 되면 세계가 더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집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유아론적인 종교들이 피를 부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장 선한 사람이고, 자기들이 신의 종이라고 생각을 해서 같은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불교 역사에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불교를 많이 선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불교가 좋은 것은 과학기술과 결합이 됩니다. 과학기술은 좀 무심합니다. 그렇지만 불교는 자비심이 있지요. 그래서 무심한 과학기술과 불교를 잘 결합하면 세상에 평화가 오게 됩니다.
유아론적 종교가 피를 불러
자기 종교를 최고로 여기며
종교 다르다는 이유로 학살
불교역사에선 그런 일 없어
불교, 과학시대 적합한 종교
토인비 등 석학도 불교 극찬
불교는 지혜 호소하기 때문
유아론과 근본적으로 달라
그런데 현재 상황이 어떠냐 하면 전 세계적으로 종교가 굉장히 급감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 인구가 한 해, 한 해 계속 감소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6~7년 전부터 학생들한테 질문을 해 봅니다. 종교가 있느냐, 손을 한번 들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60~70명이 들어가 있는 대형 강의실에서도 한 6명 정도가 손을 듭니다. 일관된 현상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종교가 없어요.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을 해 봤더니, 첫째 세상이 많이 살기 좋아졌고, 둘째는 종교에서 하는 얘기에 문제가 많아요. 특히 생명과 우주의 기원이나 발생에 대해서 종교가 하는 얘기가 믿을 수가 없고, 사실은 참 무리한 얘기가 많거든요. 진화론을 부인한다든지 6,000년 전에 지구가 생겼다든지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세계 인구의 절반은 그런 얘기들을 믿고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뉴턴이 있습니다. 아이슈타인 이전에 최고의 천재 과학자라고 하지요. 그분이 세계에 종말이 온다고 자기 원고에다가 써 놨어요. 2,060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43년 남았습니다. 통일을 하려면 그 전에 빨리해야 됩니다. 그래야지 한민족이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믿으시겠습니까? 뉴턴의 종말론이 어떻게 발견됐느냐? 뉴턴은 방대한 원고를 남겼습니다. 특히 연금술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했어요. 사실 물리학보다 연금술, 신학 이런 것에 더 몰두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정열은 거기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물리학을 한 것도 신의 영광을 보여 주기 위해서, 신이 만든 우주가 이렇게 정교하다 이런 걸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남긴 방대한 자료와 원고 이런 게 경매에 나와서 팔렸는데 그걸 유태인들이 사 갔습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그것을 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리하다 보니까, 그 가운데 뉴턴이 2,060년에 세계 종말이 온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뉴턴이 친필로 쓴 것을 다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 대천재인 뉴턴도 그랬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부처님 제자들이야 그런 일이 없지만 다른 데서는 그런 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어릴 때 부모 손에 이끌려 절이나 교회에 갔습니다. 요즘 부모들이 절이나 교회에 옛날보다 덜 데리고 가나 봐요. 수능시험 공부하려면 시간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언제 거기 가겠습니까?
그것을 보면 신앙이 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보살의 능력으로 공부 안 해도 잘 볼 수 있게 해야 될 텐데 그런 일은 없어요. 그것 참 이상하지요. 그래서 종교 인구가 자꾸 줄어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구에서는 지금 불교인구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도 불교인구가 수백만 명이 있고, 유럽과 미국에서도 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기복으로 불교를 하는 게 아니고 주로 명상을 합니다. 명상을 통해서 자기 마음의 평안을 얻고 내적인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건강한 불교지요. 저와 같은 분야에서 연구하는 오스트리아의 한 여성학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매년 방학이 되면 몇 달씩 명상캠프에 가서 지냅니다. 굉장히 신기하지요? 우리나라 교수들 중에 그러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한데 외국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로 불리는 토인비가 일찍이 한 말이 있습니다. 그는 20세기에 서구에서 일어난 가장 최대의 사건 가운데 하나는 불교의 서구 전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슈타인도 20세기에, 그러니까 과학 시대에 가장 적합한 종교는 불교라고 얘기했습니다. 이처럼 세계적인 석학들 가운데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종교에 대해서 혹독하게 비판했던 버트런드 러셀도 그랬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겠지만 그분은 종교의 몽매성, 헛소리, 잔혹함, 폭력 이런 것들에 대해서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해서는 극찬을 합니다. 이분은 “불교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주의 실상에 대해서는 얘기를 한다. 그리고 지혜와 덕에 있어서 불교가 최고다. 자기는 종교가 없지만 꼭 종교를 가져야 한다면 불교도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인류의 지혜에 호소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불교에서 지혜라는 것은 삼법인이고, 삼법인의 가장 핵심은 무상·고·무아인데 무상·고·무아라는 것은 결국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을 본다는 것은 곧 지혜입니다.
여러분들 생각에는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7일 동안 뭐 했을 것 같습니까? 뭐 했을까요? ‘내가 왜 출가했나?’하고 후회했을까요? ‘6년 간 죽도록 고행만 했는데 도대체 이게 뭐야’ 이렇게 했을까요? 아니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무념무상으로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거기 앉아 있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면 바둑이도 고양이도 가만히 보면 무념무상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물끄러미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부처님이 그 7일간 보리수 밑에서 뭘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흔히 우리 불교에서 부처님이 샛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니까 샛별을 본 게 원인이고 깨달은 게 결과인 것처럼 얘기합니다.
그런데 초기 경전에 보면 무수히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12연기를 깨달았다, 연기법을 깨달았다고 나옵니다. 그러면 결국은 부처님이 7일 동안 하신 것은 사유(思惟)라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불경에도 보면 부처님이 그렇게 토로하십니다. ‘만약 나에게 인내력과 정진력이 없었으면 나는 깨달음을 못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유력과 인내력이 없었으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사유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우리 불자님들은 사유에 대해서 좀 거부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과학의 시대, 그 다음 세계화 시대에서 살아가려면 사유를 안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면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다시 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곰곰이 살펴보면 인류 종교의 역사는 무아론과 유아론의 역사입니다. 유아론의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왜 유아론인가?’라는 생각을 안 해 보셨지요? 하나님은 유아론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최고의 아(我)는 바로 하나님이거든요. 보세요.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까? 우주를 창조하기도 파괴하기도 하고 그다음에 구원을 해 주기도 하고 지옥에 보내기도 하고 자기 마음이거든요.
캘빈의 예정설 같은 것을 보면 모든 사람의 구원은 미리 예정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이 생겨나기 전부터 구원할지 안 할지를 정해 놨습니다. 최고의 아지요. 뭐든지 마음대로 하니까.
힌두교를 보더라도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우주적인 아가 있습니다. 그게 모든 개별적인 아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우주적인 아와 개별적인 아가 같다 해서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게 한국불교에도 들어와서 그런 유의 얘기들이 나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철저한 무아론입니다. 우리 한국불교는 유교적인 토양 속에서 자라지 않았습니까? 유교의 공자님과 부처님을 비교해 보면 공자님과 부처님은 결코 ‘아’에 대해서, ‘아’를 찾으라거나 그런 얘기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지금 당면한 고를 해결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거든요. 그래서 공자님 같은 경우는 죽음에 대해서 질문을 받고 내가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에 대해 논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부처님도 여래가 사후에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만약에 어떤 사람이 화살에 맞았는데 화살을 쏜 사람의 이름이나 성이나 나이나 출신 부족이나 이런 것을 다 알기까지 또는 화살의 종류, 깃털의 종류, 날아온 방향 이런 것을 다 알고 나서 화살을 뽑겠다고 하면 화살을 뽑기 전에 죽을 거라고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씀하셨습니다. 만동자(말룽카풋타)를 그렇게 타이르신 게 기록에 나오거든요.
우리가 길을 가다가 발에 가시에 박혔다고 합시다. 그러면 다른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가시부터 뽑아야지요. 그때 아트만, 브라흐만, 하나님, 불보살 그런 것들은 없습니다. 이걸 어떻게 뽑을까라는 그런 생각만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렇듯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가 당면한 고를 해결하는 게 가장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신 분들이 공자님과 부처님입니다. 공자님은 사회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고(苦)를 줄이려고 했고, 부처님은 개인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고(苦)를 줄이려고 한 겁니다.
사회 개혁이나 개인의식의 전환이라고 할 때 사회라는 건 기본적으로 무아입니다. 국회가 있다고 할 때 국회에 ‘아’는 없거든요. 1대부터 20대까지 국회가 이어져 왔지만 옛날 국회의원은 지금 한 명도 없습니다. 직원 역시 한 명도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국회라고 얘기하고 국회가 어떤 결정을 내렸다고 할 때 마치 어떤 실체가 있는 것처럼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변하기 때문에, 끝없이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는 기본적으로 무아입니다. 그래서 사회를 통해서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면 사실은 그게 무아론입니다. 또 구성원들이 굉장히 서로 영향을 주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연기론이기도 합니다.
■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은 불교의 무아론
불교의 무아·연기론은 진화론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제가 볼 때 불교의 무아론이라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입니다. 언제인가 과학자들을 상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 무엇인지’를 묻는 앙케이트를 한 게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인 것 같습니까? 진화론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진화론은 좀 어설퍼 보이지만 그게 최고의 발견으로 뽑혔습니다. 진화론이라는 것은 결국 몸의 무아론을 증명한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무아론이라는 것은 마음의 무아론입니다. 부처님은 얘기하실 때 몸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를 안 하셨습니다. 마음, 즉 수상행식(受想行識)에 대해서 얘기하셨지 색(色:몸)에 대해서 얘기하신 게 없어요. 마음에 대한 무아를 얘기한 게 불교의 무아론입니다. 당연히 마음에 대한 무아를 얘기한 게 훨씬 더 위대한 일이지요. 부처님의 무아론은 다윈의 진화론에 비해 2,300년 앞선 이론입니다. 만약 노벨상을 우리가 만들었다면 노벨상이라기보다는 ‘부처님 무아상’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정도로 위대한 발견을 하신 겁니다.
진화론, ‘몸의 무아론’ 증명
불교무아론은 ‘마음의 무아’
2,300년 앞선 무아론 더 위대
4만년전의 크로마뇽인들도
현 인류와 같은 뇌구조 가져
삶 차이는 문화가 갖는 힘
유신론은 개인 구원만 강조
대승불교는 함께 가자는 것
연기·무아론에 관심 가져야
부처님이 얘기하신 무아, 연기 이런 것을 지혜(智慧)라고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곧 불성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고 할 때 그 불성이 바로 지혜거든요. 이것을 진화론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이나 뇌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4만여년 전인 크로마뇽인 시대의 인간은 현 인류와 거의 같은 수준의 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두개골을 조사해 보거나 두개골 구조로 미루어 뇌의 구조를 짐작해 보면 그런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크로마뇽인의 아이를 현 시대에 데리고 와서 교육시키면 국회의원도 되고 판검사도 되고 교수도 되고 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스마트폰도 못 만들고 냉장고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약도 없이 그렇게 살았을까요? 그것은 문화의 부재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대한민국 어린이 100만 명을 엄청나게 큰 무인도에 데려다 놨다고 합시다. 거기에 먹을 것이 있어서 그 아이들이 생존한다고 하면 과연 이런 문화를 다시 이룰 수 있을까요? 아마 못 이룰지도 모릅니다. 문화라는 것은 선대가 축적을 하고 그걸 후대에 물려줌으로써 유지되거든요. 마찬가지로 크로마뇽인에게는 그걸 전해줄 선배가 없었던 거예요. 지금도 석기시대 문명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의 부시맨이나 뉴기니의 원시인들이나 아마존의 야노마미 족을 보면 여전히 현 시대의 인류하고는 전혀 다르게 거의 수만 년 전 시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냥 석기시대로 삽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그 아이들도 현대 문명에 데려다 놓으면 똑같이 적응을 합니다.
그러면 이게 뭘 얘기하느냐? 이미 4만 년 전의 인간에게도 불성이 있었다는 겁니다. 즉 무아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거지요. 단지 그들에게 연기법이나 무아를 깨달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몰랐다는 거지요. 그게 바로 제가 새롭게 해석하는 불성의 뜻입니다.
그런데 4만년 이후 부처님이 최초로 나오셔서 우리에게는 연기법을 깨달을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자신이 그걸 깨닫고 우리에게 나눠준 거지요. 그래서 승가가 형성이 되고 그 승가를 통해서 깨달음의 전통이 이어지면서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문화의 위대성이 있는 거지요.
불교에서 인간은 오온(五蘊)이라고 그럽니다. 오온의 모임, 오온의 쌓임이라고도 하지요. 무릇 만나면 헤어지고, 모인 것은 흩어집니다. 우리가 죽으면 오온이 흩어지지요. 그런데 살아 있을 때도 오온이 분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아까 얘기를 드렸듯이 수상행식이라고 할 때 수상행식이 분리가 될 수 있습니다. 수와 행이 분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수는 보통 좋다 나쁘다 하는 감정으로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감정과 의지가 분리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내가 누구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면 굉장히 재미있고 좋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혼자 있을 때는 ‘드라이브를 할까?’라는 의지가 잘 안 생깁니다. 그런 현상이 생깁니다. 왜 그러냐면 감정과 의지를 담당하는 부위의 연결이 부실하거나 한쪽에 고장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안 생깁니다. 감정이 있는 변연계와 의사결정을 하는 전두엽 그 사이를 연결하는 신경회로가 좀 부실해지거나 그중에 하나가 고장이 나면 거짓말처럼 그런 의지가 사라집니다. 사고로 뇌가 상한 사람들의 경우는 감정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소위 감정이 분리가 가능하다는 이런 얘기가 됩니다.
또 하나는 해마의 예를 들 수가 있는데 해마는 기억을 담당합니다. 좌우에 해마가 2개 있거든요.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해마가 고장이 나면 기억이 얼마 못 갑니다. 다음날 그 전날의 것을 기억 못합니다. 영화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1,000번째 키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프러포즈를 하면 여자가 좋다고 승낙합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우리 결혼해야지요?’라고 하면 ‘댁이 누구시더라?’라고 말합니다. 그게 1,000일간 되풀이 되는 거예요. 1,000일 동안 사랑에 빠지고 키스를 하고 프러포즈를 하고 그게 1,000일이나 되풀이되는 거예요. 해마가 파괴되면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치매가 대표적인 일이지요. 저희 어머님도 치매, 장인어른도 나중에 치매 걸리셨는데 직접 당해 보면 절감을 하지요.
그다음은 언어입니다. 언어에는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이라고 있습니다. 이 두 영역이 고장 나면 말을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브로카 영역은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역할을 하고, 베르니케 영역은 말을 알아듣고 글을 읽고 이해하는 역할을 합니다. 각기 다릅니다. 그래서 한쪽이 망가지면 그 기능만 딱 사라집니다. 마치 자동차 부품 망가지면 그것만 딱 망가지듯이 그렇습니다. 이런 게 분리가 가능하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그런데 불경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보면 5위75법이라고 일체만물을, 법을 구분한 게 있습니다. 그중에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에서 구신(句身)이라는 게 있습니다. 구신이 바로 말을 하고 쓰고 이해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기능입니다. 그리고 또 2개가 있는데 명신(名身)과 문신(文身)이 있습니다. 명신은 단어를 쓰는 기능, 문신은 말을 할 때 쓰는 기능입니다. 가령 ‘사과다.’라고 하면 ‘사과’ 하는 음소의 기능을 하는 게 문신입니다.
현대 뇌 과학에서 정확히 그런 부위가 있다는 걸 밝힌 게 언어중추입니다. 브로카 영역, 베르니케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설일체유부라고 하면 법체항유(法體恒有)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아공법유(我空法有), ‘나는 공하고 무아이지만 법은 존재한다.’고 얘기를 해서 설일체유부를 좀 낮추어 보는 경향도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상당히 괜찮은 이론들도 많습니다. 현대 뇌 과학에서 얘기하는 것을 미리 내다봤다고 할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불법을 인구측면에서 봐야 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유신론(하나님이나 신을 믿는 종교)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굉장히 개인적인 현상입니다. 이 우주가 다 망해도 자기 혼자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의로운 사람 한 사람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다 소금기둥이 된다든지, 불로 벌을 받는다든지, 이런 얘기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불교에서 구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게 아닙니다. 저는 그게 대승불교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큰 수레’라는 게 같이 가자는 것이거든요. 불경에서 간혹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 얻을 때 모든 중생이 같이 깨달음 얻었다고 합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문관(無門關)에는 왜 가고, 3,000배는 왜 하는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인구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볼 수 있느냐하면, 제가 아까도 얘기를 했지만 무인도에서 살면 절대 현대 문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35억 년 전에 맨 처음 지구상에 단세포가 생겼습니다. 그 단세포가 다세포로 변합니다. 그다음에 다세포가 몸을 여러 개 늘리는 분신을 합니다. 바로 새끼를 낳는 거지요. 그다음에 그 개체들이 다 모이면 사회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 사람들이 가진 아이디어가 짝짓기를 합니다. 이건 제 표현이 아닙니다. 매트 리들리라는 유명한 학자가 한 얘기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새로운 생각이 막 나옵니다. 다시 그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여서 또 놀라운 생각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곧 무엇을 얘기하느냐? 인류 전체가 하나의 의식체라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 전체가 하나의 새로운 사상과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인류가 처음 나올 때 그 수준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했다면 깨달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없을 것이고 불교적인 전승이나 여러 불경이나 이런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마 사자, 호랑이, 늑대에게 쫓겨 다니느라고 바쁠 겁니다. 쫓겨 다니기 바쁜데 언제 사유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류는 이런 커다란 집단을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 생각을 공유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놀라운 문화도 이루고 하면서 깨달음도 생긴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봐야 되느냐 하면 승려들이나 스님들의 집단은 소위 어떻게 하면 번뇌를 없애나 하는 것을 전문화하는 겁니다. 그리고 속인들은 뭐를 하는가? 속인들은 승려 집단을 제공하는 거지요. 의식주도 제공하고 결혼해서 승려가 될 사람을 만드는 거지요. 그래서 흔히들 종교에서는 자꾸 사람들의 삶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제가 볼 때는 동등하다는 겁니다. 출가자 집단과 재가자 집단이 분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재가자 집단은 그 분업의 역할을 충실히 해서 애도 낳고 그 애를 훌륭하게 키우고, 그래서 훌륭한 스님도 제공하고 그다음에 농부도 키우고 기술자도 키우고, 그래서 세상을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면 더욱더 훌륭한 승가도 나오고 그러겠지요. 결국은 우리 재가자들이나 혹은 불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연기론(緣起論)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강병균 (포항공대수학과 교수)
출처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내용은 강병균 교수가 2017년 5월17일 국회불자모임인 정각회 초청 강연회에서 ‘무아론’을 주제로 강의한 것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무아와 연기가 불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