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양 요셉 신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예레미야 1,17-19 마르코 6,17-29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수난을 기념하는 우리 교회
오늘은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별 것을 다 기념하지요?
수난을 기념하는 날로는 예수님을 기리는 성주간과 성모님의 통고 축일이 떠오릅니다.
수난이라는 말 자체는 큰 고통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고통을 기념하는 것인데 우리 교회는 왜 이렇게 고통까지 기념하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이 나에게 있어서는 안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통이 없을 수가 없고, 또 그것을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가 없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편 고통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의로운 고통이 있는가 하면 치욕스런 고통도 있지요.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고통을 받았거나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순국
선열로 추앙하며 기립니다. 그 고귀한 희생과 의로운 모습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하지요.
집안의 아버지나 어머니는 가정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가정이 어렵고 힘들 때 부모들은 자기 목숨을 희생하기까지 노력하며 그것을 치욕스럽다거나
그 행위가 무의미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가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고통이라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요.
이 또한 의로운 고통이며 의미 있는 희생입니다.
반면 치욕스런 고통도 많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어느 날 감옥으로 가는 대통령과
그 측근의 모습을 보면 정말 치욕스럽지요.
그때의 고통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받을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고통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 역시
얼마나 많은 국민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세례자 요한의 수난을 기념하는 것은 이런 무의미한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
즉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의로운 고통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고귀한 수난을 우리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날이
오늘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의 의미인 것이지요.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은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된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서 벌써 죽었어야 될 사람이었습니다.
죽이기에 적당한 시간을 보기 위해서 감옥에 가두어 놓았을 뿐이지요.
헤로데 임금이 좀 더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면 감옥에 가둬두거나 적당한 때를 기다리지 않고
당장에 죽여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헤로데 임금은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될 부정한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불의하면 그 밑의 신하들이 그렇게 되고, 그러다 보면 온 나라 사람들이
다 그렇게 흘러가게 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것이 안타까운 것이지요.
그러므로 한 나라의 지도자는 불의와 타협하면 안됩니다.
그 파급 효과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멍이 든 이유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총체적으로
지도자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니까 그 아래 장관들이 그렇고, 장관들이 흔들거리니까
그 아래 사람들이 그렇고, 그래서 온 나라가 온통 진흙탕물 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 일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해야 할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목숨보다는 하느님의 뜻과 바른 삶을 추구하다가 목숨을 잃었지요.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다가
어려운 처지에 빠져들게 됩니다. 두 예언자 모두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또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봉헌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이럴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를 보고도 눈을 감고 또 피해서 간다면
수많은 이웃들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아야 할 것이 있고 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로 생각하고 또 민주주의를 하늘의 뜻인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수의 의견이 존중을 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 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옳고 다 맞는 것은 아닌 것이지요.
우매한 대중이라는 말도 있듯이 다수의 의견에 절대 가치를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천주교회도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절대 민주주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민주주의란 무엇입니까?
민주주의란 다수의 의견에 의해 사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가 결코 민주주의가 될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확고한 뜻이
다수의 의견에 의해 바뀌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주교는 독재주의일까요? 아닙니다. 독재주의가 아니라 '복음주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흔들림 없는 중심으로 자리잡아야지 그것이 다수의 의견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칫 민주주의라는 우상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박해했던 사람들 역시 다수였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반대했고 정치 지도자들 역시 이에 가세하였지요.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
이에 맞서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썩어도 소금과 빛은 썩거나 꺼져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해야 되는 사람들 중에 사제와 수도자가 있습니다.
지도자나 가르치는 사람, 또 사제와 수도자와 같이 모범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놓쳐서는 안되지요.
특히 사제와 수도자는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것을 위해서 나의 고통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집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도 불의를 보고 피해 가는 것은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이런 의로운 고통은 성당 내에서 특히 자주 접하게 됩니다.
단체장이나 반장,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하다보면 공동체의 일부가 바르지 않은 흐름으로
가는 것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잘못된 길을 따라가면 안 되지요. 바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욕을 먹고 힘에 겨운 난관에 부딪히게 되더라도 끝까지 내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바르지 못한 흐름으로 흘러가 버리고
많은 이웃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신자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고통은 피해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그저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살아가고
부정과 불의는 피해가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이지요.
삶의 현장에서 의롭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내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때 따라오는 수고와 고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인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또 예수님께서 그에 맞갖은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로운 고통이고 의로운 죽음인 것입니다.
바르고 의롭게 살고자 노력하며 그 과정 중에 받게 되는 어려움은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때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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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덕 베드로 신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기념일
예레미야 1,17-19 마르코 6,17-29
찬미예수님,
우리 신자분들은 혹시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고등학생때 조금은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특별한 일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어느날 학교에서 도난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께서 모두 책상 위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으라고 했고,
“누가 친구의 돈을 훔쳐갔는지, 조용히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책상에 오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담임 선생님은 저희에게 책상에서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혼자 “누군가가 손을 들어서 자수를 했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도난사건이 또 다시 일어나게 되었고, 우리 반은 거의 짜증에 가까운 불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은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었는데, 또다시 금새 책상 위에서
내려오라고 하시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더니 한 학생에게 다가가서 뺨을 힘껏 치시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크게 소리치셨습니다.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 또 너냐?” 하시는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였습니다.
“선생님, 저는 돈이 얼마나 없어진지는 알 수 없지만 도둑으로 의심받기도 싫고,
다른 동급생들이 도둑으로 몰리는 것도 싫습니다.
잃어버린 돈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제가 물어드리죠!”하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일순간 반은 조용해졌고, 담임선생님께서도 말씀이 없어지셨고, 그 학생을 끌고 교무실로
가셨습니다. 그 친구가 반으로 다시 돌아왔고, 그 이후에는 도난 사건도 없었고,
담임선생님도 다시는 저희 모두를 단체로 기합주거나 의심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오늘 세례자 성 요한의 수난 기념일을 통해서 요한은 누구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게 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더불어서 하느님의 외아드님. 이사야서에서 예언하고 있는 야훼의 종을
위해서 그는 주님의 앞길을 닦아놓았습니다. 진정 그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일지는
몰라도 이 세상에서 그만한 사람은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는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는 가장 커다란 사랑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진정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에는 분명 많은 어려움과 조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기억해야 할 것이란 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작은 것이라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더불어 그 희생의 댓가를 희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 모두에게 그 갚음을 해주시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오늘의 기념일 강론을 준비하면서 저 역시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떠한 마음으로
희생을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실상 제 자신이 희생을 한다고 하지만 그 또한 하느님의 은총없이,
그리고 하느님의 살펴보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봅니다.
“저의 입은 주님의 행적을 이야기 하리이다” 아멘
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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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철 시몬 신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예레미야 1,17-19 마르코 6,17-29
세례자 요한의 죽음
신구약을 잇는 위대한 예언자라면, 주님의 머리에 물을 부어 세례를 베푼 이라면,
그 죽음도 뭔가 비장한 의미가 있어야 어울림직한데,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너무나 허무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헤로데가 그저 호기로 말한 것뿐인데, 그만 헤로디아의 술수에 넘어가 세례자 요한은
그렇게 목이 잘리우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고, 애도하는 이도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저는 제 죽음이 폼 나기를 바랐습니다.
풍선 바람 빠지듯이 이 세상을 떠나기보다는, 콜베 신부님처럼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거나,
배문한 신부님처럼 강물에서 교우를 살리려다 죽기를 바랐습니다.
위대한 죽음이었다는 애도의 물결 속에 장례가 치러졌으면 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시신 기증으로 몇 사람이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철이 들었는지, 그저 하느님께 순응하는 죽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저 “예, 갑니다” 하고 달려갈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제주교구 임문철 시몬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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