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강제노동에 대한 청구권 소송은 미국인들도 제기...美 연방법원, "앞으로 올 평화와 교환되었다"며 기각
국민연금과 與圈인사들의 對일본 투자제한 법안...'국민감정'이 투자여부 가르는 변수인가
일본의 보복이 더 뼈아프다...일본은 '민중주의'에 휩쓸리지 않는 강대국
윈스턴 처칠의 "현재가 과거와 싸우면 미래가 없다"는 말 유념할 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국가”가 되겠다. 올 8.15 경축사의 핵심 메시지다. 한국이 자주독립국가라면 당연히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국가’를 지향해야 하고, 또 그런 국가여야 한다. 하지만 앞뒤 문맥을 보면, ‘아무도’는 일본을 의미한다. 그럼 다른 나라는 어떤가? 중국과 북한은 한국을 마구 흔들고 있다. 북한은 아무 때나 미사일을 쏘아올리고 있다. 그런 북한에는 왜 침묵하는가?
중국은 10월 10일까지 자국으로 신규 취항하는 항공편 운항을 일방적으로 금지 시켰다. 왜 금지인지에 대한 뚜렷한 설명이 없다. ‘중국 멋대로’다. 지난 6월엔 베이징 내 한국기업 옥외광고판 120여개가 사전 통보 없이 하룻밤 만에 철거됐다. 뿐만 아니라, 중국정부는 LG화학, 삼성 SDI 등 한국기업이 현지에서 생산한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음으로써 중국내 판로를 막았다. 그런 중국에는 묵묵부답이다. 부지불식간에 한국은 중국의 ‘호구’가 됐다.
O 일본 침략이 없었다면 조선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동안 켜켜이 쌓여온 반일감정이 폭발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이 뇌관역할을 한 것이다. 1910년의 아픈 상처가 근본적인 원인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서 ‘불편한 질문’을 던져본다. 만약 ‘일본에 의한 합방이 없었다면’ 조선은 과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1905년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전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한반도로 내려왔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소련은 승전국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1945년에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건국도 그만큼 늦어졌을 것이다. 창씨개명을 했듯이 우리는 모두 ‘스키’란 이름으로 불렸을 수도 있다. 일본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왜 조선은 나라를 잃었는가’를 성찰해야 한다.
조선은 일본에 총 한방 쏘지 않고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그것만큼 국가적 수치는 없다. “일본에 다시는 지지 않겠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국가를 만들겠다”라는 식의 반일감정에 기초한 결기가 ‘극일’일 수는 없다.
최근 한·일 갈등의 본질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손해배상이 종료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해석차이다. 우리는 아니라고, 일본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작년 10월 우리 대법원이 강제징용에 대해 배상 판결을 내리면서 한·일 간 긴장이 촉발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강제징용 노동자 배상은 사법부 판결’이므로 삼권분립의 원칙에 의거 한국 정부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만약 어떤 나라가 조약을 체결하고 그 나라의 사법부가 이를 뒤집는 판결을 내리면 어떤 조약도 맺을 수 없다. ‘사법부 판단이기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대응은 국제 외교에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국가와, 그 국가에 속한 대법원이 별개일 수 없기 때문이다. 국내여론을 조성해 외교 갈등을 풀 수는 없다. 촛불집회를 열고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벌인다고, 북 치고 장구 친다고 국제 여론이 한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는 보장은 없다. 논리와 명분 축적이 중요하다.
강제노동에 대한 청구권 소송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1941년 태평양전쟁 포로였던 제임스 킹(James King)은 낮에는 일본 철강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고통 받다가 종전과 함께 석방됐다. 그를 포함한 피해자들이 캘리포니아 법원에 일본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당시 미국 연방법원은 이를 기각했다(김태규 부장판사 페이스북 포스팅. 2019. 7).
미 연방법원은 “일본과의 평화협정(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원고들의 주장을 막고 있지만, 원고가 받아야 할 충분한 보상은 앞으로 올 평화와 교환되었다”고 판결했다. 연방법원은 ‘원고들의 희생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면서도’ 청구를 기각함으로써 평화조약을 수호했다. 미국 연방 법원의 판결은 그 자체가 문명사적 기록인 것이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로부터 한일청구권 자금으로 ‘무상 3억불, 장기 저리 자금 2억불’을 받았다. 이 돈은 오늘날 경제건설의 종자돈(seed money)으로 쓰였다. 강제징용당한 그들의 수고는 ‘앞으로 올 조국의 눈부신 경제건설’과 맞교환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 보상이 필요하다면 경제건설의 결과로 축적된 부(세금)에서 지불하는 것도 방법이다. 오히려 그것이 더 떳떳할 수 있다. 그리고 국격(國格)을 높이는 것이다.
O 한·일 경제갈등, 실물에서 금융부문으로의 전이 피해야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배제하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지난 12일 파이낸셜 타임즈(FT)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국민연금의 책임투자를 위한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중이며, 국민연금의 일본 전범기업 투자가 책임투자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민주평화당 김광수 의원은 국민연금의 일본 전범기업 투자를 제한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6일 대표 발의했다. 민주당 김경협 의원은 한국투자공사(KIC)로 하여금 일제강점기에 우리 국민을 강제동원한 기록이 있는 일본 전범기업에 투자를 제한하는 ‘한국투자공사법 개정안’을 9일 대표 발의했다.
민주당 김정우 의원은 정부기관이 일본 전범기업과 수의계약을 체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국가계약법 개정안’을 11일 대표 발의했다. 이러한 법안이 실현되어 한·일 간의 투자와 계약이 영향을 받게 되면 한·일 간의 경제마찰은 소재와 부품을 중심으로 한 실물부문을 넘어 금융부문으로까지 전이되는, 명실공이 ’전면전 양상‘을 띄게 될 것이다.
그동안 국민연금의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주식투자 현황’을 살펴보자.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지원위원회’는 2012년에 299개의 일본기업을 전범기업으로 분류했다. 국민연금은 이들 전범 기업에 대해, 2016년 71개 기업에 1.2조원을, 2017년 75개 기업에 1.6조원을, 2018년 75개 기업에 1.2조원을 투자했다.
2018년을 특정하면, 전범기업 299개 중 현존하는 284곳의 26.4%인 75개 기업에 국민의 노후자금이 들어간 것이다.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은 토요타·코마추·닛산자동차·파나소닉·미쓰비시·신일철주금·도시바 등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이다.
상대적 비중을 살펴보자. 2018년 현재 국민연금은 기금적립금 640조원 중 18.6%인 119조원을 해외기업 주식에 투자했다. 해외주식투자액 중 일본 투자액은 8조3천억원으로 7%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일본 주식시장이 전(全)세계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 7.8%와 비슷한 수준이다. 국민연금이 일본 전범 기업에 투자한 액수는 1조 5551억원으로, 일본 전체 투자금액 8조3천억원의 18%이다. 이 역시 일본 주식시장에서 전범기업이 차지하는 비중 21.3%와 비슷한 수준이다.
2017년까지 전범기업 주식투자에 대한 수익률은 매우 양호했다. 김승희 의원실의 자료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투자금액을 기준으로 한 평가수익의 비율인 수익률은 각각 ‘11.4%, 10.4%, 2.2%, 6.5%, 17.4%’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2018년의 수익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증시가 침체했기 때문이다. 2018년 국민연금의 전체 운용수익률은 마이너스 1.5%를 기록했다.
종합해 보면 국민연금은 전(全)세계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일본 증시 비중과 일본 상장기업 중 전범 기업의 비중에 연계해 중립적으로 투자를 집행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18년을 제외하고는 이들 기업에 대한 투자수익률은 양호했다. 그동안 국민연금은 ‘정치적인 이유로 전범기업에 투자를 제한하는 것’이 오히려 자산 운용의 독립성 원칙을 어기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따라서 최근 김성주 이사장의 환경(E), 사회공헌(S), 지배구조(G) 등 비(非)재무적 요소를 감안한 사회적 책임투자 발언은 기존 국민연금이 견지해온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ESG 원칙에 의거한 외국 공적 연기금의 기업 투자 제한은 종종 있어 왔다. 네덜란드 연기금(APG)은 무기제조나 대인지뢰, 화학 및 생물무기 생산기업에 대한 투자를 제한하고 있다. 우리 기업 중 무기를 제조하는 풍산과 한화 등이 이들의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제외된 바 있다. 노르웨이 연기금(NBIM)은 담배 제조나 비인도적 민간살상무기, 아동노동 착취 등 인권침해, 발전용 석탄 채굴 기업 등에 대해 투자를 제한하고 있다.
이처럼 ESG 기준에 따른 사회적 책임투자 적용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또한 ‘당위적’일 수 있다. 하지만 ‘과거 전범기업’에 대해 사회적 책임투자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층위가 다른 문제이다. 역사적 사실을 투자제한의 논거로 삼는 것은 ‘과거를 현재로 소급’하는 것으로, ‘국민감정’이 투자여부를 결정하는 변수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국민감정을 이유로 투자를 배제하는 것은 현명한 정책선택일 수 없다. 상대방의 보복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2018년 우리가 일본 전범기업에 투자한 액수가 1.3조원인 반면 일본이 우리 기업에 투자한 액수는 7조원에 달한다. 일본의 공적연금(GPIF) 규모는 1600조원으로 세계 1위이다. 공적연금에서 차지하는 교차 투자비율이 양국 간에 비슷하다 해도 절대적 투자금액에서는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전범 기업에 투자를 제한하는 경우 그 영향은 제한적이지만 일본이 우리 기업의 보유 주식을 매도하게 되면 시장은 크게 교란될 수 있다. 국민연금 본연의 목적은 국민들의 노후자금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익성과 관계없이 정치·외교 문제로 투자처를 바꾼다면 우리 스스로 투자 원칙을 흔드는 것이다.
한·일관계가 악화되어 확전될 경우 일본의 금융압박을 현실적인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 일본 4대 주요 은행(미쓰비시파이낸셜그룹, 미쓰이스미토모, 미즈호, 야마구치)들이 올 3월말 기준으로 국내 기업들에 빌려준 자금 규모가 총 18.3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한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이 빌린 돈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또한 5월말 현재 주식·채권 시장에도 12.4조원 넘는 일본계 자금이 들어와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금융회사나 기업들이 협조하지 않는 경우,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일본과 글로벌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은 이미 위안부 소녀상 설치를 문제 삼아 한·일 통화스와프 협상을 중단시킨 상태다.
O 에필로그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한·일 관계의 빛나는 전범(典範)이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담긴 최초의 공식 합의 문서다. 한국도 금융·투자·기술이전 등 일본의 대한국 경제지원의 기여를 인정했다.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로 가자고 외친 것이다.
한·일 간의 긴장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으려면 냉정을 찾아야 한다. 친여성향 관변단체의 선동은 도를 넘고 있다. “일본은 이무 것도 아니니 시쳇말로 쫄지 말고 그대로 밀고 나가면 한국이 이긴다”는 주장이 홍수를 이룬다. 2018년 한국의 국민소득은 3.1만 달러이고 일본은 3.9만 달러로, 같은 3만 달러 대라는 것이다. 수출도 한국 6천억불, 일본 7천3백억 달러로 좁혀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고, 한국은 고도성장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인가. 한국은 소재·부품·조립으로 이어지는 모든 가치사슬에서 일본을 압도할 수 있는가.
숫자로 표시되지 않는 또는 숫자로 표시할 수 없는 ‘국력의 차이’는 없는가. 일본은 민중주의에 휩쓸리지 않는다. 복지를 살포한 사회당은 3년만에 사라졌다. 일본은 2016년 현재 기초과학분야의 노벨수상자만 22명이다. 그만큼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에 강하다. ‘Intel Inside’에 비견되는 ‘Japan Inside’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핵심 부품·소재 없이는 스마트폰 자동차 정밀화학 등 국내 산업이 안 돌아간다. 여전히 일본의 달러표시 GDP는 한국의 3배다.
일본을 규탄하는 촛불집회를 열고, 일본제품을 불매하고, 전범기업에의 투자를 제한하는 입법을 통해 일본을 이길 수 있겠는가를 성찰해야 한다. 반일 부추기기’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추구하려 했다면 이는 미래를 착취한 것이다. 일반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이용해 외교 현안을 해결하려 했다면, 이는 ‘외교 무지’를 드러낸 것이다.
“현재가 과거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고 한 윈스턴 처칠의 말을 곱씹어야 한다. 반일은 쉽지만 공허하다. 늘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 극일은 어렵다. ‘진정한 극일’은 일본 보다 더 잘사는 것이고 또 일본보다 더 많은 국제사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