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언덕을 지나 작약 꽃밭으로
-거침없는 수다를 위해-
오월의 나무와 숲은 청량함으로 우리의 시력을 회복시켜 준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시선에 단호하게 초점을 끌어드리는 것은 단연 화려한 색감의 꽃이고 장미이다. 지금이 장미의 계절이라 온 땅에 장미의 축제가 열린다.
그 장미의 향연을 잠시 엿보았다. 다람쥐 광장에서 총동창회 일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테마가든 장미원을 들렀다. 같이 오던 친구들은 강렬한 햇빛으로 피곤한지 그냥 돌아가고 이 회장과 인파를 피하며, 느리게 숱한 색감을 즐겼다. 시원한 물가에는 삼삼오오 돗자리를 깔아놓고 유유자적하게 봄날의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놀랍게도 나이 드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할머니들이 장미 무리 곁에서 귀여운 모습을 취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이처럼 꽃구경은 노령층이다. 왜일까? 아마 이들은 자기의 지나간 꽃의 계절을 아쉬워하며 추억에 잠기는지도 모른다. 한편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꽃이니 구태여 또 다른 꽃을 찾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장미원에는 영국을 비롯한 다양한 원산지의 화려한 장미들이 색깔에 따라 피어있었다. 그러나, 내가 한때 살았던 독일 프랑크푸르트 교외의 크론베르크 슈로스 호텔 장미가든에서 본 푸른 장미는 볼 수 없었다.
한낮의 꽃구경도 쉬어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장미원을 지나 작약꽃밭으로 이어지는 곳에 기다란 벤치가 놓여있었다. 이미 몇 명의 여자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끝 쪽에 앉은 여자분이 사용료를 내라고 웃으며 시비했다. 이 회장이, 공유시설을 불법으로 청구하면 오히려 벌을 받는다고 받아치며, 빈자리에 앉았다.
오가며 꽃들을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지만, 멀찍이 앉아서 여유롭게 아름다움을 완상하는 것 또한 즐거움이다. 이 회장이 끓여온 커피를 마시는 동안, 옆자리에 있던 몇 사람이 자리를 뜨자, 그 쾌활한 여자분이 자기들 곁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예상 밖의 제안이라 조금 얼떨떨했으나 그분은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며 자연스레 말을 걸어왔다.
그 두 사람의 여자분 중 활달한 분은 산악인이었다. 산이란 산은 매주 다닌다고 했다. 후지산행의 경험담도 늘어놓았다. 그래서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이런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다.
“산이란 산은 모두 오르세요
높고 낮은 골짜기 모두
샛길이 보이면 들어서고
길이 나타나면 따라가세요.
산이란 산은 모두 오르고
개울이란 개울은 다 건너세요.
무지개가 보아면 뒤쫓아가세요.
자신의 꿈을 찾을 때까지
혼신의 사랑을 바칠 수 있는, 그런 꿈!
사는 동안 끊임없이
사랑을 쏟을 수 있는, 그런 꿈
모든 산을 오르고, 모든 개울을 건너고
모든 무지개를 뒤쫓으세요.
자신의 꿈을 찾을 때까지”
그 벤치 뒤쪽 둔덕에 보라색 꽃을 가리키며 무슨 꽃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몰랐다. 수레국화가 피어있었다. 그래서 보라색이 제왕의 고결한 색감이어서 보통 사람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 산악인이 자기는 보라색 옷이 잘 어울린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래서 이즈음에 호숫가나 연못에 피는 붓꽃과 노란 꽃창포 이야기하면서, 그 꽃잎들을 유심히 본 일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 모습이 여성의 비밀스러운 상징이라고 하자, 그녀는 문득 여성봉을 오른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꺼냈다. 사실 그 꽃잎 이야기는 진화론을 쓴 다윈의 다른 책에서 보았던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한때 북한산 ‘숨은 벽’을 비롯하여 ‘여성봉’과 도봉산 ‘자운봉’을 들락거리던 패기가 있었다. 그런데 적지 않게 보이는 그녀의 나이에 아직 그런 봉우리를 넘나들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여성봉을 오른 사람은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할 것이다. 단단하게 생긴 몸매가 그런 체력을 만들었나 보다,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거침없이 세상 살아 온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자유인으로 여겨졌다. 같이 가는 산행 인들이 산행보다 자기를 더 알고 싶다고 한다는 말도 주저함 없이 했다. 그녀의 언행으로 보아 꽃구경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산행이 없는 날이라, 친구가 오자고 해서 왔다고 하나,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해거름까지 작약꽃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던 참이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곧 떠날 때가 된 것 같아, 작약꽃 보러 가지 않겠냐고 했더니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덕분에 맛있는 음식 대접받고 즐겁게 보냈다는 고마움의 말을 전하고 헤어졌다. 아마, 술 한잔하자고 했으면 따라 나올지도 모를 텐데, 우리가 너무 무정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어찌하든 평생에 처음으로 거침없는 수다를 보너스로 들은 오월의 한낮이었다. 내일은 그녀가 또 다른 산행을 한다는데 건강하게 다녀왔으면 좋겠다.
2024.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