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차 창문이 열리자 그린랜드 형이 보였다.같은 차량에 타고 있었군.그런데 막 뛰신다.늦었나,왜
? 알고보니 오전 9시1분에 용문행 열차가 이곳 왕십리역을 출발하는 것이었다.
느긋하게,정말 간도 크게 에스컬레이터에 우뚝 선 채로 플랫폼에 오르니 컴불 형이 외친다.여기다!
컴불 형 뒤쪽에서 용문행 열차의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간다.
둘러보니 한 명이 안 보인다.뜬구름이다.애가 단 컴불 형은 빨리 탔으면 했지만 그럴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기다립시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나중에 돌아보니 75,76,82,83 두 명씩-학번 대표들?
-이 참석해 여덟 명이 산행에 참여했고 한 분이 산행 중에 잠시 합류했다 헤어졌다.)
덕소까지만 가는 열차를 그냥 보낸 뒤 용문행 급행에 올랐다.회기역과 팔당역만 서고 바로 그 다음이
운길산역.더욱이 열차 안은 한적해 모두가 자리에 앉아갔다.'성격 특이한 한 사람'만 빼고.
차량 안은 그야말로 30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린 것 같다.희끗한 중년 분위기인데 MT 생각이 절로
난다.그 때 이런 느낌으로 MT 가곤 했지! 영률 형과 우리 예비역 동기 XX 씨가 술 먹다가 한판 붙고,
종원이 형은 술 취해 문에 기댔다가 넘어지고,지금 베이징에 있는 산바람 형은 평생 반려자와 강가에
둘러앉아 통기타 연주하고 등등.
그런데 지금 중년들은 그때만큼 패기도 없이 얌전히 앉아 있다.가 운길산역에 내려 와르르 산으로
몰려간다.오전 10시 어림이다.6시간 산행이라고,멀리서 새벽 도시락 싸들고 나온 돼지엄마에게 은
근히 겁을 준다.꽤나 힘들 것이라고,
정말 운길산 아래는 모든 게 달라졌다.3년 전 그린랜드 형과 똑같은 코스를 자동차로 이용해 왔는데
그 때와는 영판 다르다.강변 안개를 다 빨아들일 듯 싶은 위치에 운길산역은 버티고 있는데 그곳에서
산에 오르는 모든 길이 철저한 상업적 계산에 의해 각종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오르는 길이라 망정이지 내려오는 길이었으면 그 유혹 떨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털고 50분 남짓 된비알을 올랐다.예전 수종사 오르던 포장길 대신,등산객을 털어내기 위해
만든 것이 분명해 보이는 계곡길을 오르니 금세 숨이 가빠진다.
돼지엄마 발에 힘이 무척 없어 보인다.난? 그동안 산을 멀리했던 것이 바로 나타난다.땀이 나는데
이게 운동을 많이 해서 나오는 땀과 다르다.여기저기 다니며 촬영하고 녹화하고 편집하느라 바쁜 나
날에 빠지지 않고 반주를 곁들인 결과다.참담하다.산에 좀 다녀야겠구나,마음을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
수종사를 오른쪽으로 내려보며 운길사 정상 오른쪽 능선 오르는 길에서 10분쯤 쉬었다.
그리고 왼쪽으로 오르니 운길산 정상.제법 산그리메가 예쁘다.
이 시기 나무의 색깔을 정확히 묘사하기란 정말 어렵다.이런 걸 파스텔 톤이라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흐릿한 느낌도 주고 먹먹한 느낌도 주고 제색깔은 아닌 것 같다.
낙엽들은 아무 데나 뒹굴고 있다.사람들 발길에 밟혀 널부러져 있다.예쁘지 않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편안히 만드는 구석이 있다.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 시절의 멋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쉽지도 어렵지도 않은 오르막내리막을 반복하며 세상살이를 저마다 털어놓는다.
돼지엄마는 연신 비명이었다.몸도 힘들고 수능 치른 아들녀석 땜에 마음의 갈피도 못 잡는 눈치다.
위로의 말? 그런 걸 잘못 건넸다 혹 상처 주지 않을까 모두들 조심한다.아니 그래 보인다.어려운
시기를 보낸 피플러버 회장님도 본인의 힘듦을 드러내는 한마디를 우연히 던졌다가 이내 입을 다무신다.
섣부른 위로를 받을까 저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이고 모두 힘드네.잠깐 옆길로 빠져보자.다음날 쉬면서 아시안게임 여자양궁 단체전 준결승과 결승을
챙겨보는데 해설자가 그런다."강팀은 이런 위기에 버틴다.그렇게 버티다 기회가 왔을 때 살리면 이기는
거고 그런 버티는 힘이 부족하면 다 잡은 기회를 놓친다.강팀과 약팀은 거기서 갈라진다."
그러고보니 회장님이 은연 중 많이 하셨던 주제도 '버티자'였다.
버티려는 사람 여덟 명이 산을 오른다.
12시30분쯤 점심을 먹겠다고 생각했는데 적갑산 바로 못 미쳐 된비알 하나 앞에서 밥을 먹을까,아니면
된비알 너머에서 먹을까로 옥신각신하다 결국 사니 형 뜻대로 된비알 너머,딱 우리 인원에 맞춘 듯
차려진 사이트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도시락을 싸오라고 했더니 누군 프렌치 토스트를,누군 컵라면 두 개를 싸왔고 나와 돼지엄마만 보온 도
시락을 챙겨왔고 나머지는 운길산역 근처 등에서 사온 김밥을 들고 둘러앉았다.
사니 형은 내가 싸온 도시락 밥-찹쌀 햅쌀과 검은쌀 현미를 넣은-을 먹더니 "이렇게 밥 해먹으면 따로
반찬 만들 필요가 없겠네"라고 말한다.홀살이의 애환 같은 게 묻어나 먹먹해졌다.
재미있게 얘기 나누니 30분쯤 흘렀던 것 같습니다.족발 하나가 남았길래 사니 형 조금 떼주고 제 입으로
막 가져갈 찰나,
느그들 여기 있을 줄 알았다.낯익은 목소리.
그냥 형이 고교 동문들과 함께 정반대 방향에서 오르다 양지 바른 곳에 또아리 튼 저흴 발견하곤
특유의 인토네이션으로 우릴 반겼다.그러면서 원숭이란 말이 처음 나왔다.
사니 형이 컴불 형 휴대전화로 인증샷을 날리자 원숭이들 모여봐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뒤 여러
차례 원숭이란 단어가 튀어나왔고 애프터 자리에서도 누군가 장황하게 설명했던 것 같은데 다음날,다음
날,또 다음날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왜 하고 많은 동물 가운데 원숭이일까,이런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튼 그냥 형을 아쉽게 떠나보내고 일행은 전체의 3분의 2 일정을 밟는다.평탄하다.여덟,또는 여섯
명이 줄 지어 가는데 사실 이 길은 혼자 쓸쓸하게 걷는 게 제맛이다.
운길산에서 말발굽 모양으로 한바퀴 도는 길이다.오르다 내려가다 또 오르다 그야말로 반복이고 되
돌림이다.
그리고 오르내림의 폭이라 해봐야 100m가 되지 않는다.진폭이 크지 않아 오히려 믿음이 가는 길.그리고
지금 우리 발밑의 낙엽이 이 겨울을 견뎌내면 싱싱한 봄의 활기로 번져나올 것임을 약속하는 그런
산행이다.고즈넉한 산길을 따라 걸으며 상념은 깊어만 간다.
그렇게 3시 조금 넘어 철문봉 아래에 이르렀다.멍게와 뜬구름이 왼쪽으로 조붓한 우회로를 택하고
난 철문봉 오르는 길을 택했다.철문봉은 옛 앙평 가는 길에 있던 마현마을에 머무르던 정약용 선생이
동생 약전을 데리고 올라 왜 세상을 제대로 살기 위해 공부가 필요한지를 일깨워주던 길이다.지금 예
빈산이나 그린랜드 형이 얘기했던 견우미륵봉 쪽을 통해 이곳까지 밟았다고 한다.
그 깊은 뜻을 새기고 동시에 오붓한 산행을 고집하고 싶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철문봉 들러 내려오니 우회로 탄 이들이 막걸리에 멸치와 마늘머리로 요기를 달래
고 있다.
참았다.1시간여 조붓한 능선을 좇아 예봉산 활공장에 이르렀다.날은 흐릿하고 평소같으면 보이던 북한
산과 도봉산 마루가 보이지 않는다.하지만 시원한 풍광은 여전하다.
벌~써 햇빛이 팔당대교 한강에 푹 젖었다.
예봉산 정상에서는 가파른 내리막.30분 동안 정말 조마조마하며 내려왔다.그리고 나무 계단,예전에
꽤나 험하게 내려섰던 길을 편안하게 한강을 내려다보며 내려온다.그렇게 4시30분 조금 넘어 산행을
마쳤다.10시30분 산행을 시작했으니 딱 6시간 산행,매뉴얼 그대로의 산행이었다.
팔당역 근처도 운길산역과 마찬가지로 상전벽해를 경험하고 있다.역으로 향하는 모든 길은 등산객을
유인하려고 설계된 듯하다.
그 유혹을 떨쳐내고 왕십리역까지 40분을 달렸다.역을 나서니 보름달이 두둥실 떠있다.그 보름달을
머리에 두고 빈대떡집을 들어갔는데 컴불 형이 일전에 맛집 순례를 하던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집
이라 한다.영 안주가 늦게 나온다 싶었는데 웬걸,생각지도 않은 맛집을 골랐다.생굴전을 시작으로
모듬전,빈대떡이 차례로 나왔는데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이 일품이었다.
그린랜드 형의 포도 농사 계획이 주된 소재였다.컴불 형이 발동 걸려 베이징의 산바람 형과 8명 모
두가 돌아가며 통화했다.베이징 북쪽의 붉은 사막-중동에나 있어야 마땅한-에 놀러가자는 얘기에
특히 회장님과 사니 형이 눈빛을 번득인 기억이 또렷하다.
그리고 송년 산행.원래 빛고을 무등산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여러 회원들이 연말에는 가까운 곳에 가
고 혹 못 오는 사람도 송년회에는 참석하도록 배려하자고 뜯어말려 무등산 행은 1월로 미루고 북한산
으로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이런 배려를 감안해 올해 유난히도 썰렁했던 산악회 송년회가 조금 더 풍
성해지길 기대해본다.
맞춤한 장소와 이벤트를 아래에 적어주기 바란다.
돼지엄마는 당진 귀가를 위해 서둘러 왕십리역으로 향했다.그때가 9시쯤.그리고 맥줏집에서 2차 하고
일단 헤어졌다.돼지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고맙다고.뭘 내가 한 게 뭐가 있는데?
3차 하자는 누구의 간청을 뿌리치고 집에 들어가니 10시 반쯤인가.
애엄마가 그랬다."당진의 친구도 오고 했다는데 왜 이렇게 일찍 왔나?" 딸애도 뜻밖이란 표정이다.
간만의 산행이라 발바닥이 따끔거릴 정도로 아팠고 침대 위에서 다리를 죽 펴면서 쩌릿한 고통도 느
껴졌다.그렇지만 눈도 즐겁고 상쾌했던 하루였다.
첫댓글 `버티려는 사람 8명이 산에 오른다' 이 대목에서 가슴이 쎄~ 한다...아들 놈이 수능을 망치고 오니 내가 선 자리가 선명해진다...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도...무지하게 반성하고 있는 중...반성을 빙자해 만사 제끼고 싶은 심정도 없지는 않지만...ㅠㅠ...`뜻밖으로' 너무 좋은 산행이었고...너무 좋은 술자리였고...너무 고마운 산악회원들이었고...아들 놈 거취가 결정이 되면 선후배님들 당진으로 한 번 모셔야지 하고 있는데...주변머리 없는 물건이라...쩝쩝...
문수가 수능을 잘 못봤군요. 안타깝네... 그래도 힘내요....지난해 당진 내려가 수험생 엄마 고충 함께 나눈 그 친구 딸은 기대한 만큼 잘 치른 모양이던데.... 운길산역은 전철 타고는 꽤 많이 지나쳐봤는데 한 번도 오를 인연이 나랑은 없네잉...
난 여하튼 그런 얘기 안 쓰려고 노력했는데 기어이 자신이 토로한다.그래 오랜 만에 얼굴 봐서 좋았어.
알대장이 바쁜 와중에도 산행기 빨리 올리느라 수고혔다.늘 그랬지만 알의 산행기 읽는 맛이 쏠쏠하거든.^^
운길~애봉산 종주가 쉬운 코스는 아닌데도 그닥 힘들이지않고 산행한건 여덟명이 함께 해서였을거다.이번에 못 온 친구들,다음달 송년산행에서 모두 보자구.
(고침:문철봉-->철문봉. 확인하려면 산행앨범을 보시길^^)
바로잡았습니다.
빨리도 올리셨구만유.. 간만에 산행기 쓰 볼려고 기억을 더듬으며 정리 중이었는디.. ㅉㅉ. 잼있게 잘 읽었습니다.
뜬구름의 이야기가 눈에 띄네.ㅎㅎ 간만에 알이 쓴 글을 읽으니 새삼 등산할 때의 기분이 기억난다. 오랜만에 몸에 느끼는 적당한 피곤함이 오히려 기운을 내게 해주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고...다음날 일어나니 가뿐해서 의욕을 북돋우기도 했고...근데 나이든 탓인지 며칠 안가더라니깐...해서 결론은 자주 가야한다는 거인디...맴은 굴뚝같으나...쯥! 암튼 잘 읽었다.
산행코스도, 뒤풀이도, 사람도 정말 좋은 산행이었습니다.. 사진도 올려주시죠. 대장님.
네 분부 받잡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참, 알아, 원숭이, 원숭이 한 거는 56년생 잔나비띠가 많다는 야그여. 난중에 그냥에게 원숭이라고 한거는 컴불이 잘못 안거고...그냥은 치킨이여, 그렁께 통닭이란 말이씨. 우린 원숭이고...컴불, 나, 그린랜드, 사니...근데 사니는 그날 잘 갔나 모르것다. 광화문에서 멍게랑 뜬구름에게 술 먹자고 거의(?) 강압적으루다 들이댔는데, 내가 아써 하고 막았걸랑...
그날 범 강남파도 비스무레한 일이.건대 입구에서 내리려는데 잠실 가서 한 잔만 더 하자고 하시는 이 있었는데 뿌리치고 내렸다는...ㅎㅎㅎ 결국 화요일 그 분 사무실 근처에서 순대국 얻어먹긴 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