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1 200184039 김호영
생명 3 199894127 전용찬 :불참
환경 2 200084016 김민석 :불참
환경 2 200084031 김태성 :불참
환경 3 200084133 최석길
지역 3 199982061 정건호
지역 3 199893082 홍순형
정통 2 200195087 이재홍
정통 2 200195110 진용우
멀티 2 200195105 정종현 : PPT작성자
멀티 2 200095042 김태현
멀티 2 200095132 황병주
관경 4 200196063 손경림 : 불참
무역 1 200197081 한동화
국통 2 199997144 손병기 : 발표자
경정 4 200196014 권정영
세무 2 200391059 윤선미
세무 2 200391091 황지영
1.도교(道敎)란 무엇인가?
중국의 민중종교는 다수의 평범한 인간의 정신 생활로부터 발전하였다. 즉, 평범한 민중들
에 의해 영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종교들은 온전하게 발전해온 제도 종교보다는 민간신앙으로 구성된 신앙체계이다. 당시 민간사회는 세속적 측면에서 화를 막고 복을 불러
오기 위해 종교를 필요로 했다. 이들 종교는 당시 전쟁, 반란, 혁명, 침략 등의 어지러운
시대에 민중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하기 위해 필요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중국의 중심종교로서 불교, 유교와 함께 발전한 도교에 대해 알아보고 우리
나라에 끼친영향과 시대적흐름과 함께 그 발전사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겠다.
(1) 도교의 정의
일상적으로 도교를 지칭할 때 도교와 도가를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개념으로 축약되지만, 도교의 올바른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이들 사이에존재하는 의미의 차이를 먼저 구분하여 이해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중국철학사에서는 가(家)와 교(敎)의 개념을 엄밀히 구분한다. 가 란 하나의 철학파를 지칭하는 것이며, 교 는 일정의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는 교단을 가리킨다. 이러한 구분이 도교의 경우에도 적용되어 도가(道家)와 도교(道敎)의 개념을 구분하는데 사용된다. 도가는 주로 춘추전국 시대에 성립된 노자와 장자를 기초로 하는 하나의 철학사상을 지칭하며,philosophical Taoism이라고 번역한다. 한편, 도교는 민간신앙의 여러 요소들을 포함하여 종교적 의례를 갖춘 종교형태를 의미하며, religious Taoism이라고 번역한다.
이러한 철학사적 방법론에 의해서 양자가 구분되기는 하나 사실 도가와 도교사이의 상식적인 개념 구분은 그 의미와 사상형태에서 실제로 그다지 정확하지는 않다. 의미면에서는 후대도교가 성립되고 전개되는 과정에서 도교라는 용어가 philosophical Taoism과 religious Taoism을 모두 포괄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상형태면에서는 도교가 중국민족의 현세주의적 신앙의 여러 요소들인 신선술, 장생술, 연단술, 방중술 등의 방기 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질병과 단명에서 벗어나는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과, 도가의 노장사상이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의 정신적인 초탈을 지향한다는 점은 도교와 도가 모두 현세주의적 관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양자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도교와 도가 사이에 의미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도교란 도가의 철학과 중국인의 민간신앙이 결합된 형태의 중국적 민족종교라고 정의되고 있다.
(2) 도교의 특징
20세기초, 중국의 철학가들은 서양의 철학사에 대한 자각의식에서 자신들의 철학사를 기술해야 한다는 요구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철학사를 구분하는 데에 있어서 가 와 교 의 방식의 도입은 이러한 조류에 영향을 받은 풍우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양의 역사, 철학, 문학의 전통과 다른 학문관 및 학문 분류방식을 가진 중국의 경우 이러한 구분방식을 통한 연구가 전통사상들의 일면을 살피는 데에는 유익할 수 있겠으나 참다운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효한 방법일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은 1960년대 주로 일본의 도교 연구자들에 의한 도교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보충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요약된 도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도교는 중국인 및 중국사회의 종합적인 문화 형태이다. 그 요소에는 철학, 종교, 미신, 민중생활, 풍습, 관행, 도덕, 문화예술, 과학 등이 있다. 도교는 중국의 역사를 통하여 풍토, 지역적 조건을 토대로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요소의 관련 아래 전개되어 왔다.
② 도교는 중국의 민족종교로서 중국사회의 여러 계층, 특히 서민층의 요구에 부응한 종교이다. 관료지배층도 개인으로서의 사생활에서는 도교를 신앙하였다. 관료사회에서 벗어난 일민들이 그 교리를 정리하였다.
③ 도교는 고대의 민간신앙과 신선설, 노장사상을 결합하고 노자를 개창자로 삼아 유교의 도덕론과 불교의 인과응보사상, 불교의 경전 및 교단조직을 모방하여 성립된 것이다.
④ 도교의 내용과 형식은 둘로 구별된다. 하나는 도사의 교단조직을 가진 성립도교이며, 다른 하나는 민중 사이에서 행해지는 일체의 도교적 신앙을 포함하여 총칭하는 민중도교이다.
⑤ 도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기본으로 하는 불교에 버금가는 자연종교이다. 도가의 철학 참위, 무축, 음양, 신선, 복서 등의 술수적인 부분 벽곡, 복이, 조식, 도인, 방중 등의 의술적인 부분 그리고 민중윤리부분이 그것이다.
⑥ 도교는 신비주의적인 은둔, 명상의 노자를 세우고, 주술에 의한 병의 제거나 자연력의 지배를 말한다.
(3) 도(道)의 개념
도(道)의 개념은 도가철학의 도덕경에 의해 정의된다.(기독교의 성경책 정도로 이해) 도 는 길의 뜻으로 노자와 장자에게는 궁극적 실재, 지고의 원리,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절대적 실체에 대한 묘사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눠서 조명한다. 그것은 우선 인간의 인식 범위를 벗어난 근원으로서의 측면과 인간이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현상으로서의 측면이다.
1)무(無)로서의 도(道)
인간의 인식 범위를 벗어난 근원으로서의 측면에서 도 를 고찰해보면,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무(無), 또는 무명(無名) 등의 부정적인 언어로 표현된다. 도덕경의 여러 장에서는 도(道)가 인간의 오성과 감각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왜 도 의 절대적 측면은 부정적인 용어로만 묘사되는가?
세상 만물의 근원을 추적해 보면, 모든 사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라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어느 하나와 만나게 된다. 서양에서는 대개 여기서 그치지만 동양에서는 그 하나는 어디서 왔는지를 다시 묻는다. 결국 이 하나는 무(無)에서 왔다고 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을 종결지었다. 즉, 있음의 근원을 없음으로 상정한 것이다. 도덕경에서는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道生一 一生二…], 있음은 없음에서 왔다[有生於無]”하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무(無)는 언어적 표현으로 표출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그 표현에 한정되기 때문에 절대적 실체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도덕경에서는“도를 도라고 하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맨 첫머리에 적고 있다.
인간의 이성이 사용하는 논리는 이원론적 논리로서 사물을 항상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어 생각한다.“이것이 책이다.”라고 하면 그것은 책 이외에 다른 것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궁극적 실재의 영역에서는 이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제한을 받는다면 그것은 전체가 아닐 뿐더러 궁극적이지도 못하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궁극적 실재에 대해서 어떤 특성이나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없다’,‘비었다’라고만 표현한 것이다.
2) 도(道)의 모습
도(道)를‘없다’,‘비었다’라고만 하면 이 세계 안에서 우주가 작용하는 모습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도덕경에서는 도를 상징적으로 비유하는 이름이 여럿 나온다. 이는 언어를 초월해 있는 것을 억지로나마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① 도 는 어디에나 있고 무한하다 하여 대(大),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은밀한 곳에 있다 하여 소(小)라고 한다. 즉, 도 는 세상 가장 큰 것보다도 크고 가장 작은 것보다도 작다는 것이다. 이는 이원론적 구분을 모두 떠나 있는 도 이다. 도덕경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거나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② 도 는 공정하고 사적인 감정이 없는 냉정한 자연의 법칙으로 묘사되는데 자연지도(自然之道)라고 한다. 도덕경에서는 하늘과 땅은 인자하지 않다[天地不仁]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대로 굴러갈 뿐이라는 게 도가의 주장이다.
③ 도 는 현묘 하다고 표현한다. 도덕경 1장에서는 현지우현(玄之又玄)이라는 말로써 그 작용이 너무 깊고 미묘해서 범인들은 전혀 눈치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④ 도 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의미로 천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⑤ 노자는 도 의 자연스러운 모습, 인위적인 것에 물들지 않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박(樸 비로 베어낸 원생목) 또는 어린 아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⑥ 마지막으로 도 는 물에 비유되기도 한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의 부드럽고 유순한 면, 어디에나 적응을 잘하는 모습이 도 와 상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나로 종합해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도는 항상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하나도 없다
[道常無爲而無不爲]
(4) 도교의 성립과정
고대 중국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갑골문자는 주로 왕의 행위에 대한 신의 뜻을 질문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자연현상의 신들이 제사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최고의 신인 상체는 천계에서 일반적 관료 조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도교에서의 체제와 같은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고대 중국인들은 자연현상에 깃들인 신적 존재를 귀신이라고 불렀는데 귀신을 천신, 지기, 인귀의 세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이것을 중국에서는 무라고 불렀고, 농업을 중심으로 해서 점성술이 발달했다. 기원 3세기에는 선인 사상인 신선설이 나타난다. 기원 1세기에는 노자와 황제를 신선시하는 황로사상이 유행한다. 이 때 불교는 중국인들에게는 이질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불교가 적응하기 위해 자연 신앙적인 요소들을 받아드렸고 중국인들도 불교를 황로사상, 신선사상과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전한(前漢)의 무제는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유교를 받아들였고 도교는 고통받던 민중들에게 유행을 하였다. 이 때에 도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태평도와 오두미도가 생겨났다. 이 보다 앞서 3세기경에 상청파라는 도교의 일파가 성립을 한다.
(5) 민중 도교와 교단 도교
도교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상립된 자연종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민간 종교적 요소를 많이 흡수하였기 때문에 도교의 명확한 경계선을 확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농민, 민중의 사회적 집단이 주체가 되는 도교를 민중 도교라고 정의한다고 하면 도교의 전문가인 도사, 도교위 사찰에 해당하는 도관을 중심으로 하는 도교를 교단 도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도교를 성의하는 것은 교단 도교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이 조직은 불교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도교의 종파를 보면 2세기에 성립한 천사도(현재 정일교) 3세기에 성립한 상청파, 12세기에 성립한 전진교가 대표적이다.
2. 도교의 역사 전개
(1) 태평도와 오두미도
후한대에는 도가, 황노학, 신선설, 참위설 등의 사상과 신앙이 행해지는 한편 불교도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수용되었다. 아울러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신비적인 경향이 가미된 유학은 후한대에 들어서 참위서의 사상과 신선설 혹은 황노학의 영향도 받게 되었다. 방술, 도술, 참위서 등에 정통한 유가도 꽤 많았고 그들 중에서는 주술적인 힘을 인정하는 경향조차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각기 작은 집단을 만들어 자신들의 주장을 폈는데 이것은 학파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집단에 가까웠다. 당시 촌락공동체의 붕괴로 인해 사회적, 정치적 혼란중에서 신앙과 공동체를 대신할 조직을 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종교색을 띤 많은 반란이 속출하였다. 이들 가운데 세력이 가장 큰 것이 태평도와 오두미도였다.
태평도는 그 어원에서 유추해볼수 있듯이 ‘태평’ 즉, 걱정이 없고 모든 것이 편안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2세기 전반 우길이 창시하고, 후에 그 가르침을 계승한 장각이, 우길의 저서인<태평청령서>(170권)를 소의 경전으로 삼고, 병의 치유와 함께 태평세의 초래를 교법의 중심으로 하였다. 신자에게 신 앞에서 죄를 반성케 하고 참회하게 하며, 영력이 있다는 부록을 마시게 한 다음 기도를 하였다한다. 장각은 포교로 얻은 많은 신자를 조직하여 황허강 하류를 중심으로 하는 일대 종교왕국을 이룩하여, 한때는 후한왕조를 위협하는 세력을 과시하였으나, 장각의 죽음과 함께 급속히 쇠퇴하여 진압되었다. 신자는 황색의 천을 표지로 삼았기 때문에, 이들을 황건의 적이라 하고, 이들이 일으킨 난을 ‘황건적의 난’이라고 한다.
오두미도란 입교자에게 쌀 닷말씩을 바치게 한 데서 유래된 이름인데 후한 환령제 때 장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장릉은 신이 전수해 주었다는 신출정일맹성법으로 질병을 고쳐주고 수만의 신도들을 조직화하여 하나의 종교집단을 형성하였다. 다시 그의 손자 장로가 오두미도의 교법과 조직을 정착시키고 신도들에게 <도덕경>을 읽히고 천·지·수신에게 참회문을 써바치는 삼관수서의 법을 시행하고 부적을 먹이고 기도를 하여 질병을 고쳤다. 장릉을 천사라고 호칭한 데서 오두미도를 천사도로 부르기에 이른 것으로, 이것이 곧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정일교의 전신이다.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인용된 <고려본기>의 기사에 의하면 7세기 전반에 고구려인들이 다투어 오두미를 신봉한 것으로 되어 있다.
(2)천사도
오두미도가 <태평경>에서 ‘도’로 상징되는 천신의 말씀의 전달자로서 ‘천사’라는 용어를 쓰고 더 나아가서 후에는 교단의 이름을 천사도라고 했던 사실은 태평도의 교법이 오두미도에 계승되어 실질적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오두미도가 천사도의 명칭으로 불려진 시기는 황건적의 난이 진정되고 태평도교단이 없어진 바로 직후, 즉 3세기 초엽까지 소급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천사도는 남북조시대 동안 문자 그대로 도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후에도 역대 천사의 통솔하에 면면리 이어져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오늘날 장천사의 64대손이 대만에 남아 있는 것도 육조이래로 수많은 도교교파의 융기와 더불어 교학이 복잡하게 성쇠되는 가운데에서 천사도가 어쨌든 정통적인 위치를 지켜 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3) 상청파의 성립과 발전
3세기 전후로 해서 모산의 위화존이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상청파가 성립된다. 상청파가 체 계적인 종교집단으로 조작과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육수정 때부터였다. 그는 도교의 경전을 통진부, 통현부, 통신부로 나누어 분류된 <삼통경서목록>을 편찬하였다. 육수정에 이어 상청파 이론을 완성한 인물은 도홍경이다.
(4) 신 천사도의 성립
기원 전후를 중심으로 해서 알려진 불교가 3세기 이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을 했다. 불교는 도교에 대해서 엄격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을 했는데 그것은 불교가 도교와 혼합된 종교로 중국인들 사이에서 이해되기 때문에 자기종교의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도교측도 불교에 대항할 수 있는 종교적 내용과 체제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해서 구겸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신 천사도이다. 구겸지에 의해서 추진된 것은 도교계의 개혁인데 우선은 천사도의 계통을 잇는 것이다. 노자를 신격화하고 종교 의례면에서는 불교적 요소를 많이 섭취하여 체제, 조직, 이론면에서 정제된 도교 교단을 완성했다.
(5) 도교의 혁신파 신소파, 태일파, 진대도교
1100년에 즉위한 북송의 휘종은 도교 사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의 주변에 임영소라는 측근이 있었는데 이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임영소 계통을 신소파라고 한다. 임영소는 교단의 구별을 없애고 휘종을 정점으로 자기 주장을 최고의 위치에 놓는다. 1120년 임영소가 죽은 후에 신소파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휘종이 즉위하고 있을 때 여진족의 금나라가 성립하고 금나라가 송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게 된다. 이러한 때에 태일교, 진대도교, 전진교의 3교단이 출현하게 된다. 태일교는 금나라 때에 소포진이 하남성에 일으킨 도교교단이다. 부적을 중시하고 음주를 삼갔다는 것 이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진대도교는 태일교보다 조금 늦게 출현한 것으로 태일교보다 자료가 더 없다. 산등성의 유덕인의 의해 성립이 되었다. 진대도교는 자비를 가지고 음사, 욕망, 살생, 음주를 금하고 주술적 신앙행위를 금하고 신선수로 금단을 멀리하고 현실적 윤리적 경향이 강했다. 종교의 조직은 도덕경의 무위청정을 중심으로 불교의 오계, 유교의 충, 효를 종합하여 유, 불, 도 삼교를 조화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6) 전진교의 성립
전진교는 왕중양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그 내용은 <입도십오론>에 의해 알 수 있는데 그 책은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은 도사는 암자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 동작은 중용을 얻어야 한다는 것, 독서를 너무 많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 외형을 중시하지 말 것 등 천사도의 주술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 특징을 살펴 보면 첫째는 유교,불교, 도교가 근본이 같다고 하는 삼교합일 사상이다. 둘째는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선을 섭취하는 점이 주목이 된다. 출가를 권유하는 것 이외에는 다독하지 말 것을 권유하고 좌선을 수행하는 것을 법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천사도에서 중시했던 주술, 금단 중심의 양생술 등을 배제했던 것이다. 금나라에서는 일시 약화되었으나 원대에서는 세력이 회복된다. 13세기 전반에는 원나라의 비호로 강남까지 확대되었다가 명나라에서는 도교에 통제를 가했기 때문에 활기를 잃어갔다.
(7) 정명충효도와 무당도
정명충효도는 1128년 허손에 의해 만들어졌고 1296년 유옥에 의해서 교단이 만들어졌다. 유옥은 장단한 도술적 부분을 정리하여 <정명충효도>를 만들어냈다. 이 파는 진대도교 및 전진교와 마찬가지고 삼교조화의 사상에 입각하여 충효를 근원으로 하여 천을 받들고 도를 존중하였다.
무당도는 호북성에 있는 무당산을 본거로 하는 도교의 일파이다. 10세기초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나 확실한 연대는 없다. 원대에 강당수의 도관이 상중에 건립되었고 명. 청대에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3. 도교의 신앙체계
도교의 종파적 전개에서 본 것처럼 도교의 신앙적 내용은 시대에 따라 종파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3세기경의 천사도와 상청파와 5세기에 성립한 신천사도 사이에는 많은 거리가 있고 지역적, 신앙적 차이가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 도교의 신들
도교는 수많은 신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한 다신교 종교이다.
원시천존(元始天尊)-도교의 최고 신
삼청(三淸)-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
태상노군(太上老君) -노자의 신격화
옥황상제(玉皇上帝)-11세기 이후에는 일반인들로부터 최고신으로 모셔진다.
9세기 이후에 중시되기 시작.
현천상제(玄天上帝)-북극성의 신격화 북극자미대제(北極紫薇大帝)라고도 한다.
삼궁대제(三宮大帝) -상원전관(上元天官) ․중원지관(中元地官) .하원수관(下元水管). 천(天)
지(地)․수,(氷)의 삼관(三官)을 신격화
북두신군(北斗神君)-북두칠성의 신격화
동악대제 (東岳大帝)-태산의 신
태일구고천존(太一救苦天尊)인간을 구제하는 신
무상원군(無上元君)-노자의 어머니
태일원군(太一元君)-여러 신선의 왕.
금모원군(金母元君)-서왕모, 여선의 장.
(2) 도교의 산악신앙
도교의 중심사상이 신선사상에 있다. 이 신선설은 화북지방의 산악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두미도는 장릉이 사천성의 학명 산에서 성립이 되었고 연단술로 유명한 위백양이라는 도사는 상중에서 불로장생의 단역을 만들었다고한다. 유명한 도사들은 모두가 산에서 종교체험을 했고 교단을 설립 했다.
(3) 도교의 의례
도교에서 천재지변을 제거하고 병을 고치고 인간들의 행복을 빌며 죽은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신에게 제사지낼 때에는 규정된 제사의례의 법도에 따라야 했다. 이 제사를 보통 재(齋) ․초(醮)라고 한다. 재초는 신천사도에서 어느 정도 제도화되었으며, 7세기 이후에는 확립되었다. 그러나 똑같은 명칭의 제사라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운급칠첨(雲笈七籤)(권 37)01서 소개하는 것을 들어본다.
① 금록재(金籙齋)-천재를 물리치고 제왕을 돕는다
② 옥록재(玉籙齋)-인민을 위 함
③ 황록재(黃籙齋)-지옥에 떨어진 친구나 선조를 구제.
④ 상청재(上淸齋)-신선이 되기를 기원
⑤ 명진재(明眞齋)-먼 선조를 구원
⑥ 지교재(指敎齋)-죄를 빌고 복을 구함.
⑦ 도탄재(塗炭齋)-죄를 용서해주기를 빎
⑧ 삼원재(三元齋)-자신의 죄를 참회함.
⑨ 팔절재(八節齋)-신선이 되기를 기원.
(4) 장생술(벽곡. 복이. 조식 도인. 방중)
도교의 주요목적은 불로장생이다.
1) 벽곡
도교에서는 인간의 정신은 육체에 속박되어 있고 육체는 식물에 의해 유지된다고 본다. 따라서 정신을 깨끗하게 보존하여야 장생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장(腸)이 깨끗해야 한다고 한다. 그 결과 고안된 방법이 오곡(五穀)을 먹지 않는 벽곡법(酸穀法)이다. 오곡 대신에 약초를 먹고 화식(火食)을 금하고 자연식을 생식하는 방법이다.
2) 복이
이것은 초목이나 금속(광물)을 재료로 하여 만든 약을 먹고 장생을 얻는 방법이다. 금으로 그릇을 만들어 그것으로 식사를 하면 장생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방사들이 있었다. 이때쯤부터 금과 장생을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발전하여 연금술(鍊金術)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흐름을 이어, 도교에서도 금(金)을 장생약의 하나로 보고 있다.
3) 조식
인간의 활력 또 생명력의 근원은 기(氣)라고 하는 것이 도교의 근본적인 주장이다.. 따라서 체내에 기가 없어지게 되면 인간은 죽게 된다. 그 결과 체내에 항상 기가 충만해 있게 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조식(謂식)은 태식(胎息), 폐기(閉氣), 복기(服氣), 토납(吐納) 또는 토고납신(吐故納新), 행기(行氣)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이러한 여러 명칭으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작법은 심호흡을 계속함으로써 장생을 얻고자 하는 양생법의 하나이다. 조식과 관련하여 도교에서는 수일법(守-法)이라는 정신집중법이 있다. 또 한 가지, 복기법을 행하기 전에 행하는 고치법(叩齒法)이라고 하는 주술적인 행동이 있다.
4) 도인
복기법과 마찬가지로 체내에 기를 보존하고 충실화하는 방법이다. 유연체조, 마사지 혹은 요가와 칼이 신체를 움직여 기의 순환을 조정하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도인법과 조작법은 상호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도인법에 정통한 사람은 다른 사랑의 병도 치료할 수 있으며 악귀나 악령을 물리치는 것도 가능하며 언제까지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5) 방중술
원래는 조작법이나 도인술과 마찬가지로 체내에 기를 축적하여 원기(元氣, 생명의 근원이 되는 기)를 보존하는 장생법의 하나이다.
도교에서는 체내의 기를 보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체내에 있는 음과 양의 기를 조화시키는 것을 양생의 원리 중의 하나로 보고 있으므로 방중술(房中術)을 중시하는 것이 당연하다.
4. 도교와 사회윤리
도교에서는 바로 앞에서 본 것처럼 방중술이나 주술적인 행위들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일반에서는 미신이라든가 속된 종교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윤리 방면이 전혀 무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기본적 욕망인 장생을 실현하기 위해, 신을 대개로 하는 아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윤리적 관심이 도교에서는 아주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와같이 생명의 장단을, 신을 가운데 두고 윤리, 도덕의 실천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종교는 다른 예를 보기 힘들다. 중국에서는 인간이 범한 과실이나 나쁜 행동을 감시하는 사과신(司過神)이 있다고 믿어져 왔다. 사과신은 인간이 저지른 나쁜 일에 대한 벌로써 병을 내리고 생명을 단축시킨다. 재미있는 것은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의 경중이 대응되며, 사람들은 자신이 한 행위의 선과 악을 스스로 계산하여 매일매일의 행동에 점수를 기록하는 책자를 갖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공과적(功過格)'이라고 부르는데 선행을 몇 점, 악행을 몇 점하는 식으로 플러스 마이너스를 계산하여 기록한다.
예를 들어, 부모의 명예를 높인 것은 십오공(十五功), 선생이나 연장자를 비웃는 것은 십과(十過)라는 식이다.
이와 같이 잘못에 대한 벌로써 얻게 된 병을 치료하긴 위해서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 된다. 용서를 빌고 반성하는 장소가 정실(靜室)이다.
그러나 용서를 빌고 반성하는 소극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을 행하고 덕을 쌓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포박자'에서는 적덕(積德)을 매우 강조한다. 아무리 방술을 행하고, 금단을 마신다 해도 덕을 쌓지 않으면 장생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크게 나쁜 일을 한 경우에는 인간의 생명을 관장하는 사명신(司命神)이 그 사람으로부터 '기(紀)'를 빼앗는다 '기(紀)'란 3백일의 생명을 말한다. 또 작은 잘못에 대해서 '산(算)'을 빼앗는다. '산(算)'은 3일의 생명이다. 반대로 덕을 쌓으면 신선이 될 수 있다 천선(天仙)이 되기 위해서는 1천 2백 선(善)을 연속적으로 쌓아야 하며, 지선(地仙)이 되기 위해서는 3백 선(善)을 쌓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도교의 계율에 대해서 보면, 초기 도교에는 계율이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가 뒤로 갈수록 유교 ․불교 측에서의 도덕적 비난을 극복하기 위해 계율이 점차 복잡해지게 된다. 특히 9세기이후 그런 경향이 현저해졌다.
5. 한국의 도교의 성격
(1) 단군신화와 신선설
중국에서의 신선방술의 발생과는 별도로 우리나라에는 고대로부터 도교를 수용하기에 적합한 토착적인 고유문화현상으로서 산악신앙·신선설 및 그것들과 연관이 있는 각종의 방술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여진다.
우선 고대의 건국신화가 산악신앙 및 신선사상과 직결되어 있다. 단군신화를 보면 그것을 곧 알게 된다. 천제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3천의 도중을 거느리고 강림한 곳은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밑이었다. 환웅의 아들로 태어난 단군을 본원으로 하여 이 땅 특유의 신선사상이 전개되고 이 땅의 선파(仙派)가 생겨나게 된다. 단국신화에 언급된 홍익인간은 한국신선사상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후세 선파에서 내세운 환인과 환웅에 연결시킨 단군의 정신과 교훈은 인간만사의 도리와 우주삼라만상의 이치를 두루 포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환인의 도가 환웅과 단군을 거쳐 전해져서 그것이 다시 문박씨·을밀·영랑·안류·보덕성녀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와같은 선가설은 꽤 오래전부터 전승된 것으로 짐작된다. 선파로 지목된 인물은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져 내려온 것 같은데 이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불우한 은자들이 그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들 선파 사이에서는 중국의 지배를 배격하는 주체적인 사관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고, 중국문화에의 동화를 경계하며 자주적인 문화의 건설을 모색하려는 경향을 나탸내기도 했다.
(2) 과의적(科儀的) 도교
이 땅에 도교가 정식으로 도입된 것은 고구려 말기였고, 그것은 주로 국가를 위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재초(齋醮)를 중심으로 한 과의적인 도교였다. 당나라에서 도교를 도입해서 당시의 고구려 사상계를 개편함으로써 정권을 성공적으로 확보했던 연개소문은 큰 판도를 지탱해 나가는 국력을 배양해서 중국의 침략을 분쇄할 수 있었다. 고려 예종에 와서는 도관인 복원궁을 건립하는 등 국가적 종교로서의 도교가 강화되었다. 대외정책도 한때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국을 창건하고, 고려는 발해의 혈통을 이어 결국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도교와 관련시켜서 볼 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과의적인 도교가 국가의 비호 아래 그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유신들 사이에서는 한낱 제후국에 지나지 않는 조선에서 하늘을 제사한다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라 하여 도교의 재초를 격렬하게 반대하였고 논란이 되풀이된 끝에 소격서가 혁파되고 말았다.
(3) 수련적 도교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수련적인 도교는 신라말기에 유당학인들이 당나라에서 도입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 땅의 도맥도 이로부터 형성되었다. 신라때에는 최치원이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였고 고려시대는 비약이 심해 보잘것 없었으며 조선 초기에 내려와서는 김시습이 중흥시조 같은 지위를 차지하여 그 전승이 뚜렷하여진다. 불로장생 같은 현세적인 이익의 추구가 그 중심을 차지하는 도교에서 수련을 통하여 불로장생을 획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것들은 결국 마음의 평정과 신체의 건강에 기여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수련적인 도교에 양생법이 있음을 인식하고, 심지어 이황·이이 같은 도학자들까지도 그것을 받아들여 실생활에 응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이미 들어온 도교의학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교의 이론에 따라 체계화하였는데 예방의학이 대단히 강조되어 평소에 신체의 조화를 깨서 질병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생활하는 것이 최상의 방편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도교적인 의학사상이 <동의보감> 편찬에 수용되어 엄연한 체계를 갖추게까지 되었다.
6. 도교의 수용과 그 전개
(1) 도교의 도입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따르면 "624년(영류왕 7)에 당나라 고조가 고구려에 도사를 파견하여 천존상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니, 영류왕은 나라 사람들과 함께 그 강론을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도교가 정식으로 고구려에 전래하였으나 그것이 국가적인 종교로 정착하기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니였다. 그뒤 20년이 경과하여 643년(보장왕)에 당시의 실권자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숙달등 도사 8인과 <도덕경>을 얻어와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유교·불교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하였다. 보장왕은 불교사원을 도관으로 만들어 도사들을 거기에서 거처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각종의 도교행사를 곁들여 국가를 진호하는 재초를 행하게 하였다. 연개소문이 도교강화책을 쓴 데에는 고구려에서 유·불의 세력을 감쇄시킬 의도도 있었겠으나 도교를 숭상하는 당나라의 종교정책이나 문화정책과 맞서보겠다는 속셈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2) 불교측의 반발
고구려에서 종교적 기반을 굳히고 있었던 불교는 도교의 본격적인 도입과 그 강화로 인해서 극심한 타격을 받았으므로 불교측은 도교강화책에 대해 정면으로 항거하였다. 승려 보덕은 고구려의 국도인 평양에 있던 반룡사에 거처하던 당시 불교계의 영도자였는데 그가 "좌도가 정도에 맞서서 나라의 명맥이 위태로워짐을 슬펴하여 누차 국왕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 한것이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기록되어 있다.
7. 신라의 도교 - 수련적 도교와 방술
(1) 도교의 잡술
1) 신라초의 호공은 박혁거세를 도와 인접국과 수교의 사명을 수행하여 신라의 국위를 떨친 인물인데 바람과 비, 새와 짐승을 마음대로 부리는 대단한 방술을 행사했다고 전한다.
2) 김유신(삼국사기 권41∼43의 본전, 삼국유사 김유신조 등)
- 김유신은 등에 칠성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칠요에서 정기를 받은 표시라고 하여 생래적으로 신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여겨졌다. 그는 17세 때에 이미 큰 뜻을 품고 단신으로 중악의 석굴에 들어가서 통삼대공을 성취할 힘을 내려주기를 기도하였는데 신이한 노인이 나타나 김유신의 요청대로 방술의 비법을 전수하였다. 그뒤 또 열박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천관에게 빛을 드리워 자기 보검에 강령하여 달라고 비니 두 별에서 광채가 내려와 그의 보검을 동요시켜 신령한 기운을 내려주었다. 이러한 김유신에 관련된 신이한 설화들은 도교적인 색조가 농후하고 도교의 잡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3) 시가와 결부된 이적
- 월명사가 <도솔가>를 지어 해가 둘 나타난 괴변을 없앴고 융천사가 <혜성가>를 지어 왜군을 제발로 물러가게 했다는, 향가를 둘러싼 전설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수있다. 이러한 일들을 방술만으로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그렇다고 방술과 전여 무관하다고 할수는 없다.
(2) 신라의 학인들과 도교
당나라에는 각처에 도교의 사원인 도관이 건립되어서 국가나 개인을 양재기복(禳災祈福)하는 재초, 곧 과의적인 도교의 제례행사가 빈번하게 거행되어 당시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학인들에게는 도관의 재초는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최치원과 같이 한때 당나라에서 벼슬을 살면서 문한을 다루던 사람은 당나라에 있을 때 이미 재사나 청사를 짓기까지 하였고,그 글이 문집 등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도 전하여진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므로 당나라에 유학했던 신라의 학인들에 의하여 수련적인 도교가 이 땅에 이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9세기 중엽에 신라의 학인 최승우·김가기와 승려 자혜 등 3인이 중국에 유학하여 종남산 광법사에서 천사 신원지를 만난 것이 기연이 되어 그의 알선으로 종이권으로부터 <청화비문>을 비롯한 여러가지 도서와 구결의 전수를 받았고 3년동안 수련한 끝에 단(丹) 즉, 심신의 수련을 통한 공행이 양전한 득도의 경지에의 도달을 이룩하였다.
유당학인이 이 땅에 형성한 새로운 도맥이 고려와 조선에까지 전승되었는데 그 계보는 최치원에서 직접 뻗어나가지 않고 이청으로부터 이어져 내려갔다. 이청은 명법에게 구결을 전수하고, 명법은 다시 자혜로부터 도요를 배운 뒤에 권청에게 전수하였고, 권청은 최치원과 도법을 연마한 뒤에 그것을 후대에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3) 수련적인 도교의 전승
본성적인 단학은 중국에서는 금대에 성립된 도교의 한 종파인 전진교에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였다. 전진교에서는 여동빈을 종조로 받드는데, 여동빈은 종이권의 전수로 득도하여 선화했다고 믿어지고 있다. 그런데 전진교의 성립은 12세기초부터 시작되는 금대에 내려와서이므로 김가기 등 신라의 유당학인들이 본성적인 단학을 중심으로 한 도교의 수련을 받은 일을 전진교와 결부시켜서 논할 수는 없다. 전진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내단 수련을 중심으로 하는 도교의 일파가 당대에 이미 형성되어 있어서 김가기 등 신라의 유당학인들이 그 계통의 도교와 접촉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이 전승한 단학은 환반(還返)지학과 시해(尸解) 두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하나, 전수된 도서와 도법은 다양하다. 환반의 뜻은 금단 연조에서의 칠반구환의 법을 본성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대체로 심신·성정·육체에 걸쳐 분산된 정력을 수습해서 응집된 상태에서 유지, 보존하여 불로장생에 이르게하는 수련방법이며, 시해는 도법을 수련한 끝에 죽는 형식만을 빌려 신선이 되어가는 방법이다.
8. 고려의 도교 - 도교의 재초와 습속
(1) 재초의 거행과 그 종류
1) 의종같이 군왕 자신의 개인적인 소재초복을 위하여 국비를 기울여 각종의 재초를 번거롭게 지내는 광망한 사례까지 빚어내었듯, 고려에서 과의적인 도교가 성행한 데는 고려초 이래 대량 이주한 발해인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발해는 고구려인에 의하여 세워졌으므로 도교를 숭상하던 작풍도 전승되었을 것이다. 옥촉정에 원시천존의 도상을 안치하고 월초를 지내게 한 일, 도관인 복원궁을 국도에 창건하여 각종의 도교행사를 집행하게 한 일이라든지 하는 것은 예종 때 특히 두드러진 도교숭상사례이다. 그러나 수련적인 도교는 고려시대에 별로 성행한 것 같지 않아서 그 방면의 전설이나 설화는 그다지 많이 전하여지지 않는다.
2) 재초의 종류
: 천계를 대상으로한 호천상제·호천오방제·천황대제·태일·천조·삼계·삼청 등과, 성수를 대상으로 한 남두·북두·노인성·11요·28수·12궁신·27위신·100신·본명성수 등과, 재변·양제를 위한 도우·도병·5온신·성변기양 등과 기타 전성제천,별공재초,마리산참성초,하원초 등이며 그 문체는 대체로 사륙변려체이며 내용은 도교의 설법에 곁들여 국왕의 처지에서 재앙을 양제하고 복록을 기축하는 뜻이 있다.
(2) 도교 습속
고려시대에는 도교의 장생법과 사과신적 신앙에서 생겨난 수경신의 습속이 상하계층에 널리 퍼져 있었고, 그것이 조선시대까지도 지속되었다. 도교에서는 사람마다 주어진 수명은 2주갑, 즉 120세인데 그가 저지르는 악행의 정도에 따라 그 비례로 수명이 단축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삼시충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가 인체내에 기생하면서 그 숙주가 저지른 악생을 살펴 60일 마다 오는 경신일 밤 숙주가 잠든 사이에 빠져나가 천제에게 고해 바친다는 정례보고를 막기 위하여 삼시충이 체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경신일 밤을 자지않고 지새우는 것이 수경신이다. 수경신의 습속은 조선초에 이르는 동안 1년의 6경신을 다 수야하는 일은 줄어들고, 연말 무렵의 마지막 경신일을 철야축제행사로 지키게 되었다.
9. 조선의 도교 - 도교비판과 그 변천
조선시대에 와서도 왕실을 중심으로 도교가 선봉되어 대체로 고려의 유제를 계승하였으나 그 규모가 축소되었고, 중고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있어서 국가 중십의 도교의식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 과의적인 도교의 존속
1392년에, 고려때 쓰던 복원궁·신격전·소전색·대청관·청계배성소 등 제초 거행장소를 폐지하고 소격전 한군데만 두기로 하였다. 1466년 소격서로 개칭하였데 이는 도교 재초를 거행하는 국가의 관서로서 그 직제는 제조 이하 서원 8인과 도류 약간인 및 도학생 10인으로 되어 있었고, 도류의 공과와 도과의 제도가 있었다. 소격서에는 태일전·삼청전 및 내외 제단이 있어 옥황상제를 비롯한 수백에 이르는 도교 제신의 신위를 마련하고, 헌관·서원 및 도류가 분담하여 재초를 종합적으로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집행된 재초의 종류는, 성신을 제사하는 성수초, 태양성 및 화성초, 남·북두초, 금성초·태음초·진무초·직성초·형혹기초·혜성기초 등이 있고 그밖에 개복신초·청명초·도병초·기우초·본명초재·진병초·삼원초·삼계초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중종 때에 조광조가 주도하는 신진사류들이 소격서의 혁파와 왕의 천지신 제사 중지를 고집하여 1518년(중종)에 소격서를 혁파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에도 강화도 마니산의 제천행사는 참성초라 하여 도교의 재초로 거행되었고 소격서 혁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2) 지식인들의 도교에 대한 태도
1) 김첨과 공부
; 김첨은 도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부흥시키기 위해 진력하였는데, 그 목적은 결국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구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고구려의 연개소문 이래 국가에서 도교를 숭봉한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1404년 김첨이 성수초제를 상정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그는 대청관을 수리해서 천황대제를 초제하려고 하였으나, 권근과 하륜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1408년 소격전의 제조로 있던 공부를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딸려보내어 당시 종국의 도교 초사의 법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2) 중종 때 신진사류
: 소격서 혁파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고 왕실측과 대립하여 간접적으로는 기묘사화의 불씨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3) 임진왜란 이후 관제신앙이 흘러들어와 관왕묘의 건립을 보게도 되지만 과의적인 도교는 쇠퇴하였고 성리학을 표방하는 지식인들은 표면적으로는 도교를 이단으로 물리치는 태도를 취하였다.
(3) 민간의 도교
민간에는 직성기양 같은 성수와 연결되 행사와 습속이 적지 않았다. 도교에서 다루는 성수 중 주요한 것은 칠정사요·남두육성·북두칠성이다. 그 중 남·북두에는 모든사람의 궁함과 통함, 안락과 근심걱정이 다 달려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북두가 더욱 존중되었는데 그것은 지금의 북두칠성과는 달라서 북신성, 즉 북극성을 중심으로한 일곱개의 별을 말하는 것으로 그 핵심은 북극성에 있다. 북극성은 군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록빈부와 생사화복을 위시한 모든 명운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옥추경>은 북극성 경배의 진원이고 또 의약과의 관련이 있어 옥추단이나 벽사문으로 예방하는 습속이 생겨나게 하였다. 이밖에 민간에는 삼재예방, 방위의 길흉, 동토 및 입택의 방법 등 인간만사에 부수되는 예방과 선택에 도교적인 풍습이 있었다. 그 중에도 특이한 것은 맹인, 즉 판수가 독경해서 민간의 제반사를 지시, 해결해주는 구실을 하는 일이었다. 한때는 명통사를 총본부로 하여 계층이 뚜렷한 그들의 조직이 있어 도사 중심의 도교교단과 방불하였다.
10. 도교의 양생론과 도교의학
(1) 도교의 양생론
도교의 수련은 건강을 유지하여 장수를 누리기 위한 방법이므로 그것은 곧 양생법이라고 할수 있다. 김시습은 이론상으로는 불로장생을 꾀하는 것을 반박하였으나 그의 잡저 <수진>과 <용호>에서 도교수련법의 요체를 천명하였다. 한편 주자가 <참동계>와 <음부경>같은 도서에 관심을 가지고 교주작업을 한 것 등에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까지도 그러한 부류의 도서를 기탄없이 열람하였고 도교적인 수련법에 대한 조예가 깊은 인사들도 나왔다. 이이도 도교적인 방법을 감안한 의약책을 피력하였다. 그는 도교의 연단 등선의 설은 믿지 않으나 도교에서 개발한 창양·황정 같은 연년익수한다는 약물의 사용은 그것 나름의 이치가 있어 받아들일만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유교적인 효행이 강조되던 시대이므로 사친양로를 위해 지식인들이 도교의 양생론과 의약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2) 도교의 의학
<동의보감>은 그 체계정립에 도교의 철리가 솔직하게 받아들여져 있고, 후생과 실용을 존중하는 도교의 특성이 의약의 본의 천명에 적용되어 있으며, 심지어 도교잡술에 속하는 방법까지도 소개되어 있다. 그 밖에도 조선시대의 의서 가운데 도교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 많다. 이종준의 <신선태을자금단방>, 박운의 <위생방>, 정추인의 <이생록>, 정사위의 <이양편>, 이창정의 <수양총서유집>, 최규서의 <강기요결>, 서유구의 <임원십육지> 중 <보양지>등은 다 그러한 의서들이다.
ꋮ참고문헌ꋮ
정재서 / 2000 / 「도교와 문학 그리고 상상력」 / 푸른숲
정대철 / 2004 / 「노자의 마음으로 도덕경을 읽다」 / 한얼미디어
유찬원 / 1998 / 「도교철학의 이해」 / 돌베게
이용주 / 2003 / 「도, 상상하는 힘」 / 이학사
정 민 / 2002 / 「초월의 상상」 / 휴머니스트
구보 노리타나 / 2004 / 「도교의 신과 신선 이야기」 / 뿌리와 이파리
그 밖에 네이버와 야후자료 검색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