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계리 유래(The Origin of the Name 'Mookgye-ri' Vi -묵계리(墨溪里)
" 조선 11대 중종 때 문과별시에 급제한 우봉 이씨 이당(李塘)은 국정을 도와 오다가 조광조의 과격한 개혁정치에 반대하는 기묘사화 이후 이곳으로 낙향 해 ‘반구정’ 이란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유생들과 시를 읊으며 여생을 보냈다. 이때 반구정에 모여든 선비들이 서예를 하다 먹물을 섬강 계곡에 흘려 보냈다고 해서 먹물(墨)이 흐르는 강(溪)이라 하여 묵계리라 부르게 되었다. "
칠우 고개(The Hill of Seven Friends (Chilwoo Hill) -반곡리(盤谷里)
" 이 고개는 횡성읍 반곡리 무리개에서 원주로 넘어가는 접경에 있는 고개인데, 지금은 나무가 많이 베어져 평범한 고개에 불과하지만 옛날 이곳은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이 들어 찬 대낮에도 혼자 넘기가 으스스한 그런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이곳은 인적이 드물었고 이런 점을 노린 도둑들이 늘 출몰하곤 했었다. 관가에서도 이들 도둑들을 잡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둑하나를 열이 못 지킨다고 신고를 받고 출동해 보면 이미 고개를 넘던 사람 등은 모두 털리고 도둑들은 그림자조차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급기야 관에서는 이 고개를 넘는 안전수칙 방을 써 붙이기에 이르렀다. < 누구든지 이 고개를 넘을 때는 절대 혼자 넘지 말 것. 최소한 6~7명이 무리를 지어 행동할 것.> 그 후부터 사람들은 이 고개를 칠우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
혈 잘린 산(The Mountain of Severed Arteries) -반곡리(盤谷里)
" 조선 인조 1년, 서기 1724년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이괄(李适)은 반정공신의 한 사람이었으나 논공행상에서 밀려 2등 공신으로 밀려나게 되어 강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같은 처지의 한명련, 기욱헌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정부 토벌군과 일대 격전을 치른 뒤 마침내 한양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인조는 공주로 피난하였으며 이괄은 선조의 열 번 째 아들인 ‘흥안군 제’를 새 임금으로 추대하는 등 반정의 성공기미가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장일(張逸)이 이끄는 관군의 반격으로 반란군은 격파 당했고 이괄과 한명련 등은 반정이 실패 한 것을 안 부하들의 손에 살해되었다. 이때 횡성읍 가담리에 살던 박시중(朴時重)은 이괄의 형을 사위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괄이 역적으로 몰리자 그 당시 역적에게는 삼족을 멸하는 법에 따라 박시중의 묘소는 폐묘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또한 그가 묻힌 박씨 문중의 산은 혈을 잘리게 되었다. 이 혈 잘린 산은 반곡리 사래울에 있다. 산은 완전히 두 동강이 났고 그 후 문중에서 산의 잘린 혈을 복원하기 위해 흙을 채운 적이 있다고 한다."
용바위 전설(The Legend of Yongbawee, the Dragon Ro -북천리(北川里)
" 횡성읍 북천리 마을 앞 섬강에는 냇물 가운데 커다란 바위가 두 개 있는데, 옛날 이 바위 밑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소가 있었으며 이 소에 커다란 용이 살다가 등천했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 바위를 용바위라 부르고 있다. 지금도 바위 위에는 그때 용이 남긴 발자국이라는 흔적이 있으며 횡성에 가믐이 들었다하면 이 바위 위에다 돼지 피를 칠하고 고장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냈다. 지금은 소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고 여름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와 한 여름 피서를 즐기는 장소가 돼 버렸다."
고네이 베루(Gonaeyee-beru) -북천리(北川里)
" 횡성읍 북천리에서 내지리 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네이베루는 예전에는 기암괴석과 절벽으로 울창한 숲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험준한 산꼭대기에는 절이 하나 있었고 이 절에는 늙은 노승과 고양이 한 마리가 외롭게 살고 있었다. 의지할 곳 없는 늙은 노승은 고양이를 친자식처럼 거둬주며 외로움과 적적함을 달래고 있었다. 고양이도 그런 스님의 뜻을 아는지 노승을 매우 따랐다. 어느 해, 달도 없는 그믐 무렵 한 나그네는 강을 건너기 위해 징검다리에 다다랐다. 징검다리 중간쯤 왔을 때 저쪽 편에서 시퍼런 불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그네는 너무 놀래 그 자리에 주저 앉을뻔 했다. 그런데 가까이 오는 것을 보니 그것은 덩치가 개만한 고양이였다. 둘은 징검다리 한 가운데서 만나게 되었고 둘 중의 하나가 길을 비켜야 상대방이 건널 수 있는 처지에 이르렀다. 나그네는 손사레를 치며 고양이에게 비켜 날 것을 표시했지만 고양이는 꼼짝도 안했다. 나그네는 고양이가 괘씸해 발로 걷어차며 고양이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고양이는 비키기는커녕 오히려 나그네에게 달려들어 물고 할퀴며 나그네를 물에 빠트리고 유유히 징검다리를 건너 절 쪽으로 사라졌다. 고양이에게 그렇게 당하고 난 나그네는 수소문 끝에 마침내 그 고양이가 절에 산다는 것을 알고 당장 요절을 내기 위해 절을 찾아갔다. 나그네는 스님에게 사람을 해꼬지 한 짐승은 살려 둘 수 없다며 당장 잡아 죽여야 한다고 대들었다. 몇 년 동안 친자식처럼 길러온 고양이를 자신의 손으로 없애야 할 지경이 된 스님은 나그네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빌어 고양이를 그곳에서 쫓아내기로 합의를 보고 그 나그네를 돌려보냈다. 스님은 고양이를 살리기 위해 그곳에서 고양이를 강제로 내 쫓았다. 그 후 웬일인지 절은 하루가 다르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스님은 문전걸식을 하는 신세가 돼 버렸다. 스님은 걸식을 하며 객지를 떠돌아다니면서도 어딘가 살고 있을 고양이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스님이 충청도 제천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 개만한 고양이 한 마리가 떠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는 한달음에 고양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스님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꿈에도 그리던 고양이를 다시 만 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스님을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산마루턱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스님은 고양이를 부르며 허겁지겁 쫓아갔지만 다시는 고양이를 볼 수 가 없었다. 이런 일이 있고 부터 사람들은 이곳 벼랑을 고양이 베루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 암자는 찾아 볼 길이 없고 다만 그 당시 절터가 있던 곳에 주춧돌만 몇 개 나 뒹굴고 있다. 현재 이곳은 벼랑이 깎여 2차선 도로가 말끔하게 포장되었고 산 중턱에 있는 약수에는 횡성 읍내 사람들이 약수를 뜨기 위해 아침마다 북새통을 치고 있다."
고판서와 도깨비 전설(Minister Go and Tungtung Rock -생운리(生雲里)
" 횡성읍 마산리 마을 앞을 굽이쳐 흐르는 전천에는 퉁퉁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옛날 이곳은 물이 빙빙 돌 뿐 아니라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 갈 정도로 물이 깊었다고 한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도깨비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옛날 이곳에는 고씨 성을 가진 젊은이가 매일 이곳을 지나 청룡리로 글을 배우러 다녔다고 한다. 워낙 머리가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난 이 소년은 서당 훈장이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소년은 서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쉬어 갈려고 이 바위 위에 앉았다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만큼 시간이 지났을까 비몽사몽간에 이 소년에게 이상한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쉿 조용히 고판서께서 잠 주무신다.” “그래 지체 높으신 어르신께서 잠을 깨시면 안되잖아” 그 소리에 눈을 번쩍 뜬 소년은 주위를 유심히 살폈으나 바위 주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다만 물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올 뿐이었다. 이 소년이 바로 횡성의 인물로 손꼽히는 ‘고형산’이었다. 고형산은 과거에 급제해 형조, 호조, 병조판서를 두루 거쳐 우의정까지 이르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이 동네에 사는 한 소년이 이 바위에서 잠을 청하자 “예끼 이방 이놈! 썩 일어나지 못할까! ”라는 도깨비들의 벽력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그 소년은 후에 이방 밖에 못 했다고 한다. "
퉁퉁 바위 전설(The Tale of Toongtoong rock) -생운리(生雲里)
" 생운리 앞 전천에 있는 퉁퉁 바위에는 고판서 이야기 말고도 어느 홀아비와 딸과의 애절한 사연이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이곳 마산리 쇠절이에는 부인을 일찍 여의고 딸 하나만을 의지해 살아 온 홀아비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부인 없이 혼자 살아 온 이 홀아비는 자라나는 딸을 벗삼아 고독한 생활의 시름을 달래곤 했다. 그야말로 한 송이 꽃을 가꾸는 마음으로 이 홀아비는 외동딸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리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과 오랫동안 정을 붙이고 살아 온 딸을 선뜻 남에게 주는 게 쉽지 않아 그만 딸은 혼기를 놓친 노처녀가 돼 버렸다. 그러나 효성스런 딸은 홀로 계시는 아버지를 모시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고 지극 정성으로 아버지께 효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악마의 장난이었는지 망령이 들려고 그랬는지 아버지는 딸이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고 참을 수 없는 욕정이 끓어올랐다. 아버지는 한 마리 짐승처럼 딸에게 달려들었다. 딸은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짐승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딸은 독한 마음을 먹고 아버지께 매달렸다. “아버지 그러면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세요. 저를 범하시기 전에 광에 있는 소지르매(소 등에 짐을 실을 수 있게 만든 농기구)를 짊어지고 저 울타리 밑에 가서 <음매-> 소리를 세 번 만 지르고 오세요” 성욕에 눈이먼 아버지는 정말 딸이 시키는 대로 광에 있는 소지르메를 짊어지고 울타리 밑에 가 소처럼 ‘음메’소리를 질러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딸은 그 길로 퉁퉁바위로 달려가 몸을 던졌다고 한다."
학출묘의 전설(Legend of the Tomb of the Departing -영영포리(永永浦里)
" 학이 날아갔다는 무덤인 학출묘는 횡성읍 영영포리 되재기라는 마을에 있는데, 이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있다. 조선 숙종 때 이 마을에는 인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을 날리던 김진사가 살고 있었다. 김진사는 팔자에 처복이 있었던지 세 아내를 두게 되었다. 첫 부인은 웬일인지 자식을 낳지 못했고 둘째 부인에게서 비로소 상기(相起)라는 귀한 아들을 하나 얻었다. 상기는 큰 뜻을 품고 김진사와는 친척 관계되는 당시 조정에서 재상을 지내던 김상철(金相喆) 밑에 들어가 선전관을 지내면서 불철주야 과거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셋째 부인 박씨는 본래 천성이 어질지 못하고 질투심이 강한 여자로 자기가 낳은 세 아들을 제쳐놓고 둘째 부인의 소생인 상기가 과거에 급제 해 출세한다고 생각하니 배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과거에 급제해 금의환양 하는 상기의 모습만 떠오르면 박씨 부인은 끓어오르는 질투심에 어쩔줄을 몰랐다. ‘누구 죽는 꼴 볼려고 제가 출세를 해, 어디 두고 보자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안되지…… ’ 박씨 부인은 이렇게 독한 마음을 먹고 상기의 출세 길 막기 작전에 늘 골몰했다. 드디어 그렇게나 고대하던 과거 시험 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 밤잠을 안자고 과거시험을 준비해 왔던 상기인지라 과거급제는 어느 정도 자신을 할 수 있었다. 워낙 총명하고 학문이 깊었던 그였기에 주위에서도 과거급제는 따논 당상이라고들 얘기하는 입을 모았다. 그러나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계모 박씨가 죽었다> 는 급보가 날아 온 것이었다. 내일이 그렇게나 기다리던 과거시험 날인데… 상기는 무척이나 갈등했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삼 백 여 리 떨어진 고향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발이 부르틀 정도로 쉬지 않고 며칠을 걸어 드디어 그는 고향인 횡성읍 영영포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죽었다는 계모 박씨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너무나 큰 충격에 상기는 그만 고개 마루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진사는 영문도 모른 채 길가의 상기 시체를 집으로 옮기려 일으켰으나 천근만근의 무게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중 사건의 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난 김진사는 죽은 상기의 혼이 너무나 원통해 그리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관가의 힘을 빌어 그 자리를 파고 무덤을 만들었다. 그후 덧없는 세월이 무수히 흘러갔다. 김진사의 후손들은 길가에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상기의 무덤이 아무래도 마음이 걸려 더 좋은 자리로 이장을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집안들은 손 없는 날을 택해 이장을 하기 위해 상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 때 남루한 옷차림의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 그 광경을 보고는 이장을 극력 만류했다. “허허 천하명당 자리를 왜 옮기려하는지 모르겠구려. 그냥 놔두시오.” 그러나 알지도 못하는 노승의 말 때문에 일을 멈출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덤을 파 내려가 관을 들어 올렸다. 그곳에서는 눈이 부시도록 희고 청아한 학 마리가 흙을 털고 하늘로 비상하고 있었다. “그거 보시오 내 뭐랬소 그곳이 천하명당 자리니 그냥 놔두라고 그렇게 말렸건만” “스님 어쩌면 좋습니까 ? 좋은 방도가 없을까요?” 집안 사람들은 노스님에게 매달렸다. “이미 정기는 사라졌으니 한 200 년쯤 지나면 정기가 다시 되돌아 올 것이니 그전대로 묻기나 하시오.” 후손들은 안타깝고 억울해 하면서도 200년 후에는 정기가 되돌아 온다는 스님의 말만을 믿고는 그 자리에다 관을 다시 묻었다. 그 후부터 사람들은 학이 날아간 무덤이라고 ‘학출묘’라 부르고 있다. "
까막 나들이 전설 -영영포리(永永浦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