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에서 먹던 냉면 맛과 가장 흡사한 냉면이 최고”(실향민들 평가 기준)
⊙ 평양냉면은 메밀과 전분을 섞어서, 함흥냉면은 100% 전분으로 만들어
⊙ 평양냉면 육수는 사는 형편에 따라 소고기, 돼지고기, 닭, 꿩 등으로 우려내
⊙ 북한엔 함흥냉면 없어, 함흥국수가 6·25 직후 남한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함흥냉면’으로 굳어져
⊙ 평양냉면은 메밀과 전분을 섞어서, 함흥냉면은 100% 전분으로 만들어
⊙ 평양냉면 육수는 사는 형편에 따라 소고기, 돼지고기, 닭, 꿩 등으로 우려내
⊙ 북한엔 함흥냉면 없어, 함흥국수가 6·25 직후 남한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함흥냉면’으로 굳어져
정오가 다 된 시간, 한 무리의 직장인들이 광화문 네거리에 서 있다. 이들은 점심 메뉴를 놓고 옥신각신한다. 힘의 논리에 따라 상사의 입맛에 맞춘다. 오늘의 메뉴는 냉면이다.
하지만 냉면을 선택하는 순간 일행은 다시 평양냉면파와 함흥냉면파로 패가 갈린다. 한쪽이 “여름엔 뭐니 뭐니 해도 시원한 육수의 평양냉면이 최고야”라고 선수를 치자 다른 한쪽이 “무슨 소리, 매콤한 함흥냉면이 최고지”라며 맞받아친다.
양보 없는 일전을 벌이다 평양냉면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이번에는 각자 취향의 평양냉면 전문점을 꼽으며 따로따로 갈 태세다. 이쯤 되면 대개 누군가의 입에서 “점심 먹기 참 힘들다”는 한숨이 나오기 마련이다.
한국인의 냉면 사랑은 유별나다. 지난해 5월에 출간된 허영만 작가의 만화 《식객-팔도 냉면 여행기》가 1년 새에 4만5000부나 판매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냉면 애호가들은 특정 냉면집의 맛에 대해 “육수가 잡내 없이 담백하고 구수하다”든지 “면발이 탱탱하고 메밀 특유의 풍미가 있다”며 전문가 수준의 품평을 쏟아 낸다. “달고 싱겁다”거나 “맵고 짜다”고 단순 품평을 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미묘한 맛의 차이까지 따진다. 그러다 보니 한 식구라 해도 단골집이 각각 다르다.
그렇지만 평양냉면이든 함흥냉면이든 냉면 명가(名家)로 알려진 곳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냉면의 본고장인 평안도나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들로부터 “고향에서 먹던 냉면 맛과 가장 흡사하다”는 합격점을 받고 명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들 명가의 냉면 맛은 조금씩 다르다. 면을 뽑는 반죽이 다르고, 육수나 양념장을 만드는 방식에 차이가 있으니 맛이 동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 여러 음식점의 냉면에 ‘고향표 맛’이라는 합격점을 준 이유는 뭘까. 또한 냉면 맛을 결정하는 핵심은 무엇일까.
고려 때부터 냉면 등장
냉면은 말 그대로 차게 먹는 국수다. 이북에서 발달한 음식이며, 원래 여름이 아니라 한겨울에 즐겨 먹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순조(純祖) 때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한겨울 음식으로는 평안도의 냉면이 으뜸’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북 출신 실향민들에 따르면 이북에서는 ‘냉면’을 ‘국수’라 불렀다고 하나 조선시대 문헌에도 이미 ‘냉면’이라는 말은 등장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영하(周英河) 교수에 따르면 《동국세시기》 11월 편에 냉면을 설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메밀국수에 무절임과 배추절임, 그리고 돼지고기를 넣은 음식을 냉면이라고 부른다’가 그것이다. 무절임과 배추절임은 김치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냉면을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냉면 애호가를 넘어 냉면 박사로 불리는 성악가 임웅균(任雄均·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로 추정했다. 그는 아주 오래 전에 눈여겨본 신문 칼럼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은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후 조선 백성 50만명을 인질로 끌고 청나라로 향했다. 청나라 군사 10만여 명이 그를 호위했다. 개성을 지나 황해도 사리원에 도착했을 때 반갑지 않은 전령이 왔다. 조선의 임경업 장군이 의주 백마산성에서 기마결사대를 조직해 길목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질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의병이 조직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청태종으로서는 언제 의병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인질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를 간파한 어전이 메밀에 독성이 있으니 인질들에게 먹여 힘이 빠지면 목을 베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이들보다 현명한 인질들이 메밀의 독성을 중화시킬 무를 열심히 뽑아 먹었기 때문이다.>
메밀과 무의 우연한 만남이 냉면으로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임 교수는 “그 후 인질들이 지나간 사리원, 강서, 남포, 평양 등이 냉면으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고 말했다. 남한에서도 이들 지명을 딴 냉면집들이 이름값을 하고 있다.
근거 자료만 있다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귀가 솔깃할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문헌상 냉면은 이보다 훨씬 전인 고려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고려 인종(仁宗) 때 송(宋)나라 관리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메밀국수’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서긍이 개경에 머무는 한 달 동안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한 이 책에는 ‘중국에서 밀로 국수 만드는 법을 배웠는데 고려에선 귀한 밀가루보다 흔한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는 구절이 나온다고 한다.
냉면의 유래가 고려든 조선이든 분명한 것은 이북 지역에 메밀이 흔했다는 사실이다. 메밀은 생명력이 강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지만 독성이 있고 영양가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귀양살이를 보내는 죄인에게 조와 메밀을 심어 먹도록 했다고 한다.
냉면 길이는 壽命 길이
메밀로 만든 국수라고 해서 모두 냉면은 아니다. 반대로 냉면이라고 해서 모두 메밀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냉면은 보통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으로 나뉘지만 전문가들은 여기에 진주냉면과 밀면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진주냉면과 밀면은 영남 지역에서 즐겨 먹던 냉면이다.
북한에서 출간된 《조선의 민속전통》에는 진주냉면이 평양냉면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맛이 뛰어난 음식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진주냉면은 진주 지역 양반가와 기방(妓房)에서 야식으로 즐겨 먹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경남 진주와 부산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으며, 달걀을 입힌 육전(肉煎)이 고명으로 올라가고 소뼈와 사태살 외에 해물로 육수를 낸다는 점이 특징이다. 메밀보다 밀가루와 전분이 많이 들어가 쫄면처럼 질기고 졸깃한 것도 일반 냉면과 다른 부분이다.
밀면은 부산 지역에서 사랑받는 냉면. 6·25 전쟁 때 미군이 원조 물자로 제공한 밀가루를 냉면처럼 만들어 먹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육수에 한약재와 닭, 돼지고기 등이 들어간다.
평양냉면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關西) 지역에서 즐겨 먹던 물냉면이다. 면의 주성분은 메밀이며, 육수는 소고기나 돼지고기 혹은 닭이나 꿩으로 만든다. 만화 《식객》에서 주인공 성찬은 평양냉면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육수 맛은 밍밍하고, 면은 메밀 함량이 높아서 툭툭 끊어지는 대신 향이 좋고 다진 양념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가위 사용 절대 금지죠.”
한국 식당에서는 먹기 편하게 냉면을 가위로 잘라 주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북에서는 냉면을 가위로 잘랐다가는 큰일 난다고 한다. 이북에서는 면의 길이가 곧 수명(壽命) 길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함흥냉면은 함흥을 중심으로 한 관북(關北) 지역에서 발달한 음식이다. 면의 주성분은 개마고원에서 난 양질의 감자 전분이었다. 이 때문에 함경도에서는 ‘농마국수’(녹말의 북한어) 혹은 양념에 버무린 생선살을 고명으로 올려 먹는다 해서 ‘회국수’로 부른다고 한다. 고명은 함경도 근해에서 많이 잡혔던 홍어, 가자미, 명태 등을 잘라 양념장에 무쳐서 올렸다.
보통 김치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어
이북에서 즐겨 먹던 냉면이 남한으로 전파된 것은 언제일까. 많은 이들이 6·25를 전후해 전해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주영하 한국중앙연구원 교수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1920년대 말 서울 청계천 북쪽에는 40곳이 넘는 냉면집이 있었다”고 전한다. 1926년에 발표된 김량운의 소설 《냉면》에 서울 거리와 냉면집 풍경이 잘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1910년대 말 서울에 대리점을 개설한 일본의 화학조미료 회사 아지노모도(味の素)가 1927년 《동아일보》에 게재한 광고에는 냉면에 감미하면 더욱 맛있다는 내용의 ‘냉면+아지노모도=美味’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또한 구한말 광화문 동아일보사 부근에 고급 요정으로 설립된 명월관(明月館)에서도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는 냉면이 유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7월 23일자 《매일신보》에는 ‘서울 사람들의 미각을 정복하기 위해 평양의 냉면 기술자들이 속속 서울에 진출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여러 가지 근거 자료상 평양냉면은 해방 훨씬 이전 서울에 진출해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 지역 사람들이 국수를 겨울에 즐겨 먹었던 것은 자연환경과 기후 조건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서 지역은 겨울이 오면 유난히 밤이 길고 추웠다고 한다. 이 지역 출신의 한 실향민이 들려준 얘기다.
“내가 살던 자강도의 겨울은 춥고 길었습니다. 오후 5시만 되면 해가 뉘엿뉘엿 질 정도로 밤도 길었지요. 사람들은 서둘러 저녁을 먹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잤는데 저녁 10시쯤 되면 배가 고파서 저절로 눈이 떠지곤 했어요. 이때 어머니가 군불도 땔 겸 일어나 부뚜막에 있는 분틀로 면을 뽑아 국수를 삶은 후 살얼음이 둥둥 뜬 김치국물에 말아 야식으로 내곤 했지요.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먹던 그 시원한 냉면 맛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집들은 국수를 보통 이렇게 김치국물에 말아 먹었지만 좀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단백질 보충을 위해 소뼈와 사태살 혹은 돼지고기나 닭, 꿩 등으로 국물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형편에 맞는 재료로 육수를 만들어 먹은 것이다. 실향민들이 서로 다른 냉면을 ‘고향의 맛’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평양냉면 전문점에는 상호에 ‘면옥’(麵屋)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곳이 많다. 원뜻은 ‘국수집’이지만 평양에서는 사시사철 냉면을 즐겨 먹을 수 있는 곳으로 통했다고 한다. 이렇듯 1년 내내 먹었던 냉면이 1930년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여름 음식으로 바뀌어 갔다. 이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메밀이 부족해 벌어진 현상이라고 한다.
이후 면발에 변화가 생겼다. 메밀 100%로 뽑던 면에 전분이 첨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은 메밀과 전분을 섞어 만든 냉면을 더 좋아해 메밀만으로 냉면을 만드는 곳은 몇 집 안된다고 한다.
명월관과 우래옥
이곳에 남아 평양냉면의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 집 중에서 맏형은 주교동의 우래옥이다. 이 집은 평양에서 명월관(明月館)을 경영하던 고(故) 장원일씨가 해방 직후 월남해 창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지억 전무는 “월남 당시 창립자가 명월관 주방에서 일하던 직원 둘을 데리고 내려와 지금 주차장 자리에 있던 적산가옥에서 냉면 장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단백질이 부족하던 시절 소고기 육수에 말아 주는 냉면은 인기가 많았다. 가격은 당시 물가에 비해 비싼 편이었다. 1962년에 입사한 김 전무는 “그해 5월에 화폐개혁이 단행됐는데, 당시 냉면 값이 35원, 불고기 값이 60원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우래옥에서 일하기 전에 5급 공무원으로 근무했어요. 당시 내 월급이 3300원이었고, 쌀 한 가마니 값이 8000원이었습니다. 그러니 냉면 한 그릇에 30원이면 결코 싼 값은 아니었지요.”
지금도 우래옥은 음식 값이 비싸기로 유명하다. 평양냉면 한 그릇이 1만1000원이다. 대부분의 냉면집은 8000~9000원 수준이고, 사리 추가시 5000~6000원을 받고 있다. 김 전무는 “최상급 메밀과 소고기를 재료로 사용하고 있고, 냉면 양이 다른 집에 비해 많아 웬만한 장정이라도 사리를 추가할 필요가 없어서 결코 비싼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우래옥 냉면은 양이 많았다. 면은 가늘고 부드러웠으며, 육수는 소고기 국처럼 진했다. 김 전무는 “면의 경우 메밀과 전분의 비율을 습기가 많은 여름에는 6 대 4로, 건조한 겨울에는 7 대 3으로 맞춘다”고 밝혔다. 육수는 매일 아침 동대문 시장에서 구입해 오는 불고기용 소고기를 삶아 우려낸다고 한다.
우래옥은 오래된 냉면집 치고 시설이 고급스러웠다. 고객들 역시 식자층이 많았다고 한다. 김 전무는 “이영덕(李榮德) 전 국무총리, 정근모(鄭根謨) 전 명지대 총장, 김종서(金宗西) 전 덕성여대 총장 등이 단골이었고, 역대 대통령 중 안 다녀간 분이 없다”고 자랑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주방 직원이 자주 청와대에 파견을 가는 관계로 중부서에서 직원들의 신원을 조회하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기자가 방문한 날 때마침 정원식(鄭元植) 전 총리가 방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50년 단골인데, 국물 맛이 변함이 없다”며 이곳의 단골임을 밝혔다. “근데 값이 너무 비싸다”는 말도 덧붙였다.
고급냉면 지향하는 봉피양
김영환 (주)벽제외식산업개발 회장. 봉피양 냉면을 운영하고 있다. |
냉면 양도 우래옥과 비슷하다. 알고 보니 주방을 맡고 있는 이가 우래옥에서 잔뼈가 굵은 ‘냉면 장인’ 김태원씨다. 김영환 (주)벽제외식산업개발 회장은 “은퇴 후 집에서 쉬고 있는 김씨를 냉면 기술자들이 찾아내 모시게 됐다”고 말했다. “냉면 후계자 육성을 위해 힘 닿는 데까지만 근무해 달라”고 부탁해 현장 복귀시켰다고 한다. 그게 1992년이다.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인 김 회장은 냉면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그는 “26년 전 벽제갈비를 인수해 고깃집을 할 때부터 고급 냉면을 만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제가 인천 출신인데, 어렸을 적부터 미식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냉면을 먹으러 다녔어요. 당시 인천에는 6·25 직후 생겨난 ‘평양옥’이라는 곳이 있었지요. 맛이 괜찮았습니다. 까다로운 아버지 입맛을 충족시켜 주는 곳이었지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고깃집을 경영하면서 아버지 입맛에 맞는 먹을 만한 냉면을 개발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만들기 위해 서울 시내 냉면 명가들을 찾아다니며 연구했다. 그 결과 냉면 맛의 비밀은 육수와 면의 자연스런 조화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육수와 면의 조화를 위해서는 좋은 재료를 써야 하고, 인공 조미료를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한다.
“메밀은 추운 지방 것이 차지고 좋습니다. 남쪽 지역에서도 메밀이 재배되지만 푸석푸석해요. 최소한 원주 이북 지역인 평창이나 봉평에서 나는 것이 찰기가 있어서 쓸 만합니다. 또 메밀은 눈이 와도 주위가 녹아 버릴 정도로 열이 많은 식품입니다. 그래서 차게 먹어도 속에 탈이 나지 않는 것이죠. 그런 만큼 오래된 메밀은 좋지 않습니다. 묵으면 누린내가 나기 때문에 햇메밀을 쓰는 게 좋아요.”
잘 고른 메밀을 제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제분기가 너무 작아 고속으로 제분할 경우 열이 나서 메밀가루의 신선도가 떨어진다. 메밀은 저속으로 천천히 빻아야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주방에 작은 제분기를 들여놓기보다 큰 제분기가 있는 제분소에 투자해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육수 만들기 과정은 더욱 까다롭고 혼이 담겨 있지 않으면 맛을 낼 수 없다. 시중 음식점들이 함흥냉면과 달리 평양냉면 간판을 함부로 달지 않는 이유가 육수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회장은 “소고기, 돼지고기, 노계(老鷄)로 육수를 만든다”고 밝혔다.
제분된 메밀가루로 곱게 반죽을 하고, 면을 뽑아 삶고 씻어 육수에 말아서 내기까지 과정이 여간 복잡하고 예민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일을 내가 하기에는 벅차다고 판단해 이 분야의 장인을 초빙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외국 손님이 왔을 때 부끄럽지 않게 내놓을 고급 식당과 음식이 필요해 시설이나 식재료를 고급화하다 보니 가격대가 다른 곳보다 좀 높다”고 말했다.
4남매가 모두 냉면집 운영
봉피양이 시설 면에서 서구화된 냉면집을 지향한다면 을지면옥은 낡고 허름한 전통을 고수하는 분위기다. 서울시 중구 입정동 광장시장 앞에 자리한 이 집에서 의정부 평양면옥 홍진권(洪鎭權) 대표를 만났다. 그는 을지면옥 홍정숙(洪正淑) 대표의 오빠다. 필동면옥의 홍순자(洪順子) 대표, 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본가 평양면옥의 홍명숙(洪明淑) 대표까지 1남3녀 남매들이 모두 평양냉면 전문점을 경영하고 있다.
장남이자 큰오빠인 홍진권 대표는 “남매들 모두 아버님 밑에서 배우고 익힌 덕분에 냉면으로 먹고산다”고 말했다. 평안도 대동군 출신인 이들 남매의 아버지는 6·25 때 단신으로 월남한 후 이 일 저 일을 전전하다 1970년 경기도 전곡에서 냉면을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문이 나서 의정부로 옮긴 것이 1976년. 이후 장사가 잘돼 서울 사람들이 냉면을 먹기 위해 의정부 쪽으로 나들이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집은 묵은 메밀이 아닌 햇메밀을 그때그때 돌(로러)로 된 제분기에 조금씩 빻아 쓰고, 소고기와 돼지고기로 만든 육수가 맑고 담백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면은 다른 집보다 도정을 많이 한 메밀로 반죽을 해 색깔이 희고 가는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방과 후 틈틈이 아버지를 거든 4남매는 가업을 물려받은 다른 집과 달리 사이가 좋다. 홍진권 대표는 “4남매가 모두 아버지가 전수해 준 방식대로 냉면을 만들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늘 좋은 재료를 써야 하고, 손님에게 정직해야 한다고 강조하시곤 했어요. 그 가르침대로 살다 보니 가게도 번성하고, 형제들과 다툼도 없었습니다.”
남매들은 아버지의 손맛을 1년 내내 전하기 위해 일부러 쉬는 날을 모두 달리하고 있다. 을지면옥은 매월 첫째·셋째 일요일, 필동면옥은 둘째·넷째 일요일인 식이다.
이들 남매는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 홍정숙 대표는 “우린 TV 방송에서 맛집이라며 수없이 촬영해 갔지만 그런 것들을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 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진권 대표는 “매출은 동생들 가게가 훨씬 높다”며 웃었다.
을지면옥의 냉면 맛은 심심할 정도로 담백했다. 면발은 우래옥 것보다 덜 부드러웠지만 나름 씹는 맛이 있었고, 물에 간장을 풀어 놓은 듯 투명한 육수는 밍밍하면서도 맛이 깊었다. 호들갑스럽지 않은 남매들을 꼭 닮은 맛이었다.
굵고 투박한 을밀대 면
을밀대 냉면은 굵고 투박한 면발과 살얼음이 동동 뜬 소고기 육수가 특징이다. 김영길(金英吉) 사장은 “창업 당시 아버지가 직접 만든 분틀로 면을 뽑다 보니 투박하고 불규칙적인 면이 나왔는데, 그게 저희 집의 특징이자 강점으로 굳어졌다”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 집 면은 도정을 좀 덜한 메밀로 묽게 반죽해 면을 뽑습니다. 그러다 보니 색깔도 거뭇하고 투박한 느낌이 있죠. 이게 싫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면을 다른 집처럼 만들었는데 단골 고객들이 맛이 예전 같지 않다며 야단을 쳐서 원래대로 바꾸었습니다.”
그의 부친인 김인주(金仁周)씨가 현재의 자리에 냉면집을 창업한 것은 1976년. 냉면 명가가 몰려 있는 을지로가 아니라 이곳에 가게를 연 것은 순전히 돈이 없어서였다고 한다. 김영길 대표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다른 동네에서 냉면을 하시다 이곳 3층짜리 슬라브 집으로 이사 왔어요. 1층에서 가게를 하고, 3층에서는 저희 식구들이 살았죠. 2층은 세를 놓았고요. 3층 주택이었지만 낡은 데다 공간이 좁아 실용적이진 않았습니다.”
김영길 을밀대 대표. |
“솔직히 처음에는 하기 싫어서 6개월 동안 도망 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가출해 3개월 동안 돌아오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가게를 제가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출은 나를 잡아 놓으려는 아버지의 전략이었던 셈이죠.”
젊은 그가 맡으면서 가게는 더욱 번창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모든 기술을 전수한 후 김포로 내려가 육수만 전문적으로 만들었다. 6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매제가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동생도 강남역 부근에 평양냉면 집을 오픈했어요. 을밀대 강남점이죠. 생각보다 장사를 잘하고 있습니다.”
을밀대 본점은 가수 현미씨처럼 고향이 이북인 사람이 많이 오는가 하면 젊은 층도 많이 온다. 그는 “이들 중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 할아버지나 아버지 손을 잡고 온 이들”이라며 “냉면은 추억을 먹는 음식인 것 같다”고 말했다.
호불호가 극명한 오장동 냉면
그 이유를 김영환 (주)벽제외식산업개발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육수 맛이 관건인 평양냉면은 함흥냉면에 비해 모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평양냉면은 정말 잘하는 집만 살아남았고, 함흥냉면에 비해 흔하지 않아 고급화되었지요. 또 평양냉면은 젊은 시절 잠깐 좋아하고 마는 함흥냉면과 달리 한번 먹기 시작하면 오래도록 충성도가 높습니다. 마니아가 많다는 것이지요.”
함흥 지역의 국수를 함흥냉면으로 승격시킨 이들이 바로 오장동 냉면가 사람들이다. 이곳의 역사는 흥남 원산 출신의 노영언 할머니가 1953년 텐트를 쳐 놓고 감자떡과 국수를 눌러 팔면서 시작됐다. 생활력이 강했던 노 할머니는 거제도 피란민 수용소와 부산에 살 때 머리에 함지박을 이고 다니며 국수를 팔았다고 한다. 이를 밑천으로 상경해 흥남집을 열었고,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그러자 이듬해 오장동 함흥냉면이 문을 열었고, 이곳에서 오랫동안 주방장으로 일한 맹강호씨가 1980년 그 옆에 신창면옥을 오픈했다. 함흥냉면은 남한으로 넘어오면서 면의 재료가 감자 전분에서 고구마 전분으로 바뀌었다. 남한 감자는 질이 좋지도 않거니와 제주도산(産) 고구마가 맛도 좋고 가격이 저렴해서였다고 한다. 세 집 모두 고구마 전분 100%로 면을 만들고 있지만 맛은 조금씩 다르다. 오장동을 가끔씩 찾는 이들은 세 집 중 아무 곳에나 들어가게 마련이지만 애호가들은 각자 고집하는 집이 있다. 식구나 친구들끼리 한 차를 타고 와서는 세 집으로 각자 들어가는 풍경을 이곳에서는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 미묘한 맛의 차이임에도 호불호가 극명한 곳이다.
함흥냉면의 핵심은 양념장
흥남집은 노용언 할머니의 장남 윤성일씨가 가업을 잇고 있다. 노 할머니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 이 집 주방에서 일한 김영대(金英大)씨는 “회무침이나 비빔용 양념장을 고춧가루가 아니라 건고추를 물에 불린 후 갈아서 사용한다”고 말했다. 그것도 그날그날 필요한 만큼만 갈아서 쓴다고 한다.
회냉면에 들어가는 회는 칠레산 홍어를 24시간 숙성시켜 사용한다고 한다. 김씨는 “홍어가 너무 크거나 작아도 맛이 없다”며 “적당한 크기의 홍어만 골라 쓴다”고 말했다. 홍어가 고가(高價)인 관계로 신창면옥 역시 칠레산 홍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곳 역시 2세인 맹재범(孟載凡)씨가 가업을 잇고 있다. 젊은 그는 언론사 기자 출신이었다. 그는 “저희 집 냉면의 노하우는 허영만 선생님의 만화 《식객》에 모두 담겨 있다”고 말했다. 허영만 작가가 신창면옥을 모델로 오장동 함흥냉면 이야기를 풀어 갔다는 것이다.
《식객》에 소개된 이 집의 양념장 비법은 이렇다.
“오장동에서는 간장을 베이스로 한 양념을 맛난이라 한다. 신창면옥의 맛난이는 국간장에 곱게 간 소고기를 넣고 끓이다가 마늘, 설탕, 후추 등으로 양념을 하고, 물과 7 대 1 비율로 섞어서 만든다. 양념장의 포인트는 홍어 국물. 홍어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식초와 간장에 재어 놓고 1~2일이 지나면 국물이 생긴다. 이때 홍어는 회무침으로 쓰고 국물은 양념장을 만들 때 쓴다.”
성수기를 맞은 요즘 오장동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발길까지 줄을 잇는다. 맹재범씨는 “하루에 30~40명씩 다녀간다”고 말했다.
냉면 전문점은 베짱이처럼 살아야 한다. 여름에 비해 겨울에는 손님이 20~30%밖에 안되기 때문. 맹재범씨는 “오장동 냉면 집들은 냉면 전문점의 자존심을 지키느라 고기를 취급하지 않고 있다”며 “그러다 보니 비수기인 겨울이 힘들다”고 말했다.
동치미 냉면 4인분이 3600원
고공행진 중인 물가에 대한 부담 때문일까. 2008년 농심에서 출시한 둥지냉면의 매출이 해마다 급신장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동치미 국물 맛의 물냉면이 인기다. 농심 측은 “지난해 둥지냉면 하나로 2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말했다. 물냉면과 비빔냉면용으로 출시된 둥지냉면은 4인분용 한 봉지가 3600원이다. 둥지냉면 개발을 담당한 정종헌(鄭鍾憲) 대리는 “둥지냉면은 건면(乾麵)으로 개발돼 기존의 냉동·냉장면보다 값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맛도 제법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자가 취재 중 만난 냉면 명가 대표는 “그동안 가정용으로 나온 냉면 중 가장 맛이 괜찮았다”고 평가했다.
초기부터 상품 개발에 참여한 정종헌 대리는 “둥지냉면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서 냉면을 잘한다는 집은 모두 찾아가 시식해 봤다”며 이렇게 말했다.
“동료 여럿이 함께 다녔는데, 역시 냉면 명가로 알려진 곳들의 냉면이 맛있었습니다. 성분 분석을 위해 포장해 오고 싶었지만 어느 곳에서도 포장은 허락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구석 자리에 앉아 몰래 중량을 재거나 물병에 육수를 담아 오곤 했습니다.”
문익점 작전으로 명가의 냉면들을 분석해 나온 제품이 둥지냉면이라고 한다. 정종헌 대리는 “툭툭 끊어지는 평양냉면과 질기고 차진 평양냉면의 식감을 동시에 구현하는 면을 개발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며 “면 연구에 사용한 메밀가루와 밀가루가 1000kg이 넘었다”고 밝혔다. 이 젊은 냉면 전문가에게 “냉면 맛의 비밀이 어디에 있는 것 같으냐”고 묻자 “나이를 먹으면 자연적으로 알게 되지 않을까요”라는 재치 있는 답이 돌아왔다. 허영만 작가가 《식객》에서 ‘냉면은 어머니’라고 표현했듯 냉면 맛은 어쩌면 그리움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