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0 나해 연중32주일
룻기 3:1-5, 4:13-17 / 히브 9:24-28 / 마르 12:38-44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중국의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었을 때, 당시 유행하고 있던 이른바 ‘인터넷 동거’라는 사회현상에 대하여 학생들과 토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인터넷 동거’란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후 속마음을 털어놓고 가상의 부부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집이 살기 지겨우면 바꾸고, 몰던 차가 물리면 바꾸는 것처럼 인터넷 동거를 통해 재미가 없으면 바꿀 수 있는 자유로움이 그 장점이라는 겁니다. 패스트푸드 시대에 패스트문화가 만들어 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인터넷 기술이 발달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여러가지 형태로 발생하는 사회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제대로 된 짝을 찾기도 하지만 저는 이 현상의 배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을 무서워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두 걱정과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녀 사이에 솔직함과 성실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 사귀면서도 어떻게 자신을 보호할지를 배우게 되었고, 효과적으로 자신을 감추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갈수록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게임 속에 온 정신을 쏟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얄팍한 감정게임을 하면서 진심으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이란 단어를 깔보면서 동시에 자신을 깊은 미망과 초조함 속으로 빠드립니다. 특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특별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따뜻한 보살핌을 필요로 할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모두 감정적으로 남을 책임지지 않으려 하면서, 동시에 남들이 자신을 100퍼센트 책임지길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진정성을 상실한 우리시대의 자화상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모두 진정성을 갈망하지만 현실에서의 좌절은 사람들로 하여금 뒤로 물러나 자신을 감추고 감히 진정성을 내보이려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성을 잃는 것은 사실 전진할 용기를 잃어버린 것이고, 인생을 살아가야 할 소중한 원동력과 살아있는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은 진정성을 상실한 신앙인이 어떤 모습으로 일그러지며, 반대로 진정성 있는 신앙이 하느님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관찰자적 시선으로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과 사람들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찰을 통해 얻은 통찰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율법학자들의 행태를 관찰하시고, 그 겉모습 뒤에 있는 속마음을 비판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과 기도에 대한 진정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율법지식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귀한 대접을 받고 있고, 남들보다도 기도를 오래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숨은 의도는 “남에게 보이려고(마르 12:40)”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성전 헌금궤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관찰하신 예수님은 그 중 렙톤 두 개를 넣은 가난한 과부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마르 12:43-44)” 여기서 렙톤(Lepton)은 당시 그리스의 최소 단위 구리 동전으로서 렙톤 2닢은 겨우 식사 한끼를 해결할 정도의 적은 금액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대략 1만원 정도의 가치로 보면 될 겁니다. 사실, 1만원을 헌금한다는 것은 평범한 신자들이 봉헌하는 정도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은 그 액수가 아닌 헌금을 내는 사람의 마음, 특별히 그 중에서도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성과 관련해서 동양의 고전 《중용(中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이 있는 사람은 그 힘이 신과 같다. 오직 천하의 지성이라야 능히 화할 수 있다(至诚如神,唯天下至诚为能化)” 여기서 화(化)는 감화, 혹은 만물을 기르는 신비한 역량을 가리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을 감탄케 하였나요? 그것은 그 과부의 진정성이 예수님의 마음,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중국의 작가 진보(金波)가 쓴 《눈먼 아이와 그의 그림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마을에 눈이 먼 아이가 있었다. 마을 사람 누구도 그와 놀려고 하지 않아 눈먼 아이는 아주 외로웠다. 아이는 항상 “누가 나랑 놀아줄까?”라고 혼잣말을 했다. “내가 너랑 놀아 줄게!” 어느 날 아이는 홀연히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그림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후부터 눈먼 아이는 항상 자신의 그림자와 함께 놀았다. 소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소 소리를 흉내 내고, 양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양소리를 흉내 냈다. 산에 올라 들꽃과 열매를 따고 작은 다리를 건널 때는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었다. 그림자는 아이에게 따스함을 주었고, 그림자는 아이에게 행복을 주었다.
어느 날 둘이 함께 밖에서 놀고 있을 때 벼락이 치며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눈먼 아이는 외로이 들판에 혼자 남겨졌다. “내 그림자는 어디 갔지? 내 그림자는 …?” 눈먼 아이는 그림자를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단지 비바람 소리만이 들여왔다. 아이는 비틀거리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물웅덩이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눈먼 아이는 상심하여 울기 시작했다. 울고, 또 울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바람이 멈추고 비가 그치자 아이는 놀랍게도 낯설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아이는 하늘에 둥그런 무지개가 뜨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여러 색깔을 가진 들꽃을 보았다. 그리고 푸른 초원도. 또 풀잎 끝에 매달린 영롱한 이슬방울도. 아이의 그림자는 아이의 옆에 서서 아이의 손을 이끌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들은 쌍둥이 형제 같다고. 그 두 사람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빛의 아이들이라고.
이 이야기는 광명에 대한 추구와 진정성의 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오가는 일상 속에서 피로한 심신과 왜곡된 인격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느 때 에야 어린 시절의 천진무구함으로 이 세계를 마주하고, 세상의 허위와 교활함을 내던지고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 능히 그 본성을 다할 수 있다(唯天下至诚,为能尽其性)’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 본성을 다한다는 ‘진기성(盡其誠)’이란 자신의 진실한 본성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극한 정성, 즉 지성(至誠)의 힘을 꾸준히 길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이란 옛 어른의 말처럼 지극한 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칭찬한 그 과부는 바로 지성의 힘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활을 하느님께 바친 그녀의 그 진정성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율법학자의 기도는 비록 남들보다 오래하였지만,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고, 오히려 하느님의 화만 돋우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지성으로 드린 기도가 아니라 남들보다 우월해 보이고 과시하고 싶은 욕망의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잃어버린 신앙의 진정성을 회복하고 광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은총으로 성화(聖化)되시길 바랍니다.
진실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