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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 아산 탄생 100년] 하면 된다! 한겨울 잔디공사 수주에 낙동강변 보리 옮겨 심어 한국 경제의 불도저 정주영 (상)
▲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이한림 건설부 장관, 박정희 대통령 부부,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왼쪽부터). photo 연합
큰 뜻을 품고 올라온 서울. 그러나 학력도 기술도 내세울 것 없기에 공사판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안암골 보성전문(고려대학교) 신축공사장. 정주영은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자기 머리보다 큰 돌덩이들을 한가득 등짐을 져 날랐다.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고 다리는 후들거렸으나 그는 이를 꽉 악물고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어느 날 인부 한 사람이 돌을 내려놓다가 그만 놓치고 말았다. 땅에 쿵 떨어진 돌은 훌렁 뒤집히더니 바로 옆에 서 있던 정주영의 발뒤꿈치를 호되게 쳤다. 순간 찌르르 전기 흐르는 듯한 충격과 함께 정주영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뒤꿈치에 피가 흐르고 퉁퉁 부어올라 며칠 꼼짝없이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사고를 당하고도 정주영은 공사장을 떠나지 않았다. 동생들이 공부할 터전을 자기 손으로 짓는다는 생각이 그를 고려대학교 공사판에 묶어 둔 것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얼마나 좋을까?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끼겠지. 두고 봐, 비록 나는 그리 못하겠지만, 열심히 돈 벌어 내 동생들만큼은 이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할 테다!’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은 휴전선 북쪽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가 그의 고향이다. 그는 코흘리개 나이인 열 살 때부터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정주영은 열다섯 살 때 송전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중학교에 진학하는 게 마땅했으나, 가난한 집안 사정이 발목을 잡았다. 그는 자신이 중학교에 가면 그 학비를 대느라, 동생들이 보통학교도 못 다니게 될까 걱정했다. 동생들에게는 적어도 자신처럼 보통학교는 나오게 해주고 싶었다. 정주영은 학업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부지런히 밭을 갈고,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나무를 해왔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이 늘 먹먹하기만 했다.
‘농사꾼으로 살다 죽을 거라면, 뭐 하러 학교에 다닌 걸까? 부모님이 집집마다 고개 숙이며 학비를 빌려 나를 학교에 보낸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밑거름을 마련하라는 뜻이었을 텐데….’
18살 되던 해 정주영은 소 판 돈 70원을 움켜쥐고 집을 뛰쳐나와 서울로 올라간다. 2년여간 공사장을 전전하며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복흥상회’란 쌀가게의 배달원으로 취직한다. 성실성을 인정받아 회계업무를 맡는 등 차곡차곡 돈을 모아서, 23세 되던 해인 1938년 마침내 쌀가게 ‘경일상회(京日商會)’를 연다.
1940년 정주영은 서울 최대 경성서비스공장 직공이던 이을학에게서 아현동의 자동차수리공장 ‘아도서비스’ 인수를 권유받았다. 이렇게 시작된 아도서비스 경영은 뒷날 정주영이 현대자동차라는 세계적 기업을 만드는 모태가 된다. 일제강점기 열악한 경제상황과 제한된 기업 활동에서도 정주영은 직접 자동차 수리에 매달렸다. 1943년부터 잠시 운수업을 벌였다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여 다시 자동차 정비업을 해 나갔다. 어느 날 정주영은 관청에서 건설업자들이 거액의 공사비를 수금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건설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1947년 5월 25일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 간판을 올린다. 이어 6·25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미군 숙소를 지으며 큰돈을 모았다. 1952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을 앞두고 대통령숙소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현대토건은 완벽한 시공으로 미군으로부터 “현다이 넘버 원!” 찬사를 받았다. 그 뒤 한겨울에 부산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 달라는 미군의 요청에, 정주영은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는가?”라며 낙동강가의 보리를 옮겨 심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 일을 계기로 미8군의 공사는 몽땅 정주영의 일이 되다시피 했다. 1957년 9월 현대는 한강 인도교 공사를 따 내어 국내 건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성장을 거듭하여 1962년 국내 도급순위 1위를 차지한다. 현대건설은 마침내 1965년 9월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해외로 진출한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6년 캄란만 군사기지 건설공사에서 준설공사 경험을 쌓아 중동 진출의 초석을 마련했다. 이어서 1967년에는 일본 기술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크리트댐을 사력댐으로 바꿔 예산을 절감하며 소양강댐을 완공해낸다.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하던 1960년대 중반, 고속도로 건설은 한국으로서는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였다. 그 무렵 한국 경제 수준으로 볼 때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며 국내외에서 부정적 의견과 반대가 극심했다. 야당 대표인 김대중, 김영삼은 결사반대에 나서서 양재 공사판에 이불 깔고 드러눕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민의 피땀 어린 열정과 노력을 결집, 실로 눈물겨운 역경을 극복하고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해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감독, 정주영 회장이 현장소장이었다. 정주영은 공사판에서 밤낮을 보내는 열정을 쏟았다. 공사 도중 지반의 수맥이 갑자기 뚫려 자갈과 진흙이 엄청난 압력으로 터져 나와 인부들이 몇 미터씩 떠밀려 매몰되는 현장에서도 그는 위험을 마다않고 앞장섰다. 박정희 대통령도 청와대 집무실과 침실 머리맡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상황 지도를 걸어 놓고 진척 상황을 챙겼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새벽 3시에도 예고 없이 불쑥 현장에 나타나 장화와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된 정주영을 찾아가 격려했다. 경부고속도로는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건설한 세계기록을 세웠다.
1968년 2월 착공, 2년5개월이라는 세계 최단시간 완공기록을 남긴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정주영’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킨 역작이었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여건, 비슷한 거리인 400㎞ 구간의 일본 도메이고속도로 건설에는 경부고속도로에 비해 무려 여덟 배의 건설비가 들어간 것도 실로 극적인 대조다. 경부고속도로는 오늘날 산업 발전의 토대가 되는 인프라 건설과 기간산업 발전을 가속화해 주었고, 한국 국민 자신감의 상징이 되었다.
‘바다로 나아가는 자만이 한국을 구한다!’ 육당 최남선의 이 말을 늘 마음에 품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을 세계 으뜸가는 조선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포항제철의 성공으로 자체적으로 철강을 생산할 수 있게 되어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박정희는 영국·미국에서 한국인 최초 선박검사관으로 활동하던 신동식을 불러들였다. 신동식은 1951년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6·25전쟁 피란길에 부산 부두에서 미군 수송선 뱃짐을 점검하는 일을 했다. 산더미만 한 배를 날마다 바라보며 ‘바다를 정복하면 세계를 정복하는 것’임을 굳게 다짐했다. 서울대학교의 교육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여 교수도, 번듯한 교재도 없었다. 그는 졸업한 뒤 머나먼 스웨덴으로 건너가 현지 조선소에 일자리를 구했다. 기능공 양성소에서 밤낮없이 꼬박 5개월간 혹독한 교육을 받은 뒤 설계도 보는 법, 철판을 자르고 붙이는 법 등 밑바닥 일부터 시작했다. 마침내 신동식은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미국선급협회 등 국제기구로부터 한국 최초의 검사관으로 선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동식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임명했다. 해사(海事) 부문을 담당하게 된 그는 ‘한국 조선업 마스터플랜’을 내놓았다. 대형 선박을 만들 자본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계획은 비아냥을 받았다. ‘쓰레기통에선 장미가 피어나지 않는다’란 냉소적인 외신까지 나올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조선업을 개척할 인물로 현대건설 정주영을 점찍었다. 정주영 또한 건설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기에, 처음에는 배를 만드는 것도 공장 짓는 것과 뭐가 다르냐며 자신감을 가졌다. 문제는 돈이었다. 차관 도입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정주영은 일본과 미국을 뛰어다니며 돈을 빌리려 했지만 ‘코리아 같은 작은 나라가 어떻게 배를 만들 수 있겠느냐’며 모조리 거절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정주영은 태완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앞세우고 청와대로 찾아가 박정희에게 호소했다. “각하,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그동안 미국과 일본 여기저기를 돌며 교섭해봤으나, 저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며 모두 ‘아직 초보기술 단계에 있는 너희 한국이 무슨 몇십만 톤 조선을 하느냐’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조선업에 나라의 미래가 걸렸소”
정주영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질식할 듯한 침묵이 잠시 흐른 뒤 박정희가 입을 열었다.
“일국의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적극 지원하는데도 역부족이라며 포기하겠다니, 내가 정 회장 그릇을 잘못 본 거요? 막중한 국책사업을 맡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완수해내야지, 겨우 한 번 시도해보고 어렵다며 반납하겠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건설계 거인이라는 사나이의 역량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오금이 저려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벌개진 얼굴로 정주영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박정희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정 회장, 조선업은 정 회장 개인 사업이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가 걸린 사업이오. 일본·미국에 다녀왔다니, 이제 유럽 쪽으로 가보는 게 어떻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기 마련이오.”
마음을 다잡은 정주영은 1971년 9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발이 닳도록 투자자를 찾아다녔으나 성과가 없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갈 즈음, 정주영은 선박 컨설팅 회사인 A&P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 이야기를 들었다. 롱바텀의 추천서가 있으면 영국 은행으로부터 쉽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곧장 롱바텀 회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롱바텀의 추천서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롱바텀 또한 현대의 자금력과 기술력에 의문을 나타냈다. 끈질기게 설득했으나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주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지갑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뒷면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것이 거북선이란 것입니다.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지요.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선박 강국의 잠재력은 아직도 한국에 살아 있습니다.” 지폐 속 거북선을 살펴보던 롱바텀 회장은 고민에 빠졌다. 한동안 말 없이 생각에 잠겼던 그는 정주영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당신은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정주영의 임기응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롱바텀의 추천서를 손에 넣기는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수출신용보증국은 현대조선소의 배를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야만 차관 제공을 허용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아직 짓지도 않은 조선소에서 배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정주영은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게딱지 같은 초가집 몇 채 서 있는’ 초라한 백사장이 담긴 울산 미포만 사진 한 장을 손에 쥔 채 세계 곳곳으로 배를 팔러 다녔다. 마침내 정주영은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이자 세계해운업계 거물 리바노스를 만나 26만t급 배 2척을 주문받는 데 성공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다 돌려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등 파격적인 조건들을 내걸어 리바노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러한 시련 끝에 울산시 미포만 일대에 거대한 ‘현대조선소’ 건설을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조선소 도크를 파고 동시에 한편에서는 선체의 부분들을 재단·용접하기 시작했다. 조선소는 1972년 3월 착공해 2년3개월이 지난 1974년 6월 준공되었다. 최단 시일 내에 조선소를 완공함과 동시에, 26만t급 유조선 2척을 건조, 바다에 띄우는 사상 초유의 대기록을 세웠다. 배를 인수하러 온 거물 리바노스는 “내가 이제껏 봐 온 배들 가운데 가장 잘 만들어졌다”며 극찬했다. 이 일은 지금도 세계 조선사에 남아있는 유명한 일화다. 사진 한 장만을 갖고 이뤄낸 정주영만의 특별한 신화였다. 그 뒤 현대조선은 1975년 확장공사를 통해 최대 선박 건조능력 100만t, 드라이도크 3기 240만t 시설을 갖춘 세계 최대 조선소가 되었다.
선박 건조 계약 중에 중요한 요소는 완성 선박의 인도 시기이며, 수주자 입장에서는 인도 일자에 맞추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한다. 보통 선주들은 실제 필요할 때보다 가급적 아주 촉박한 선박 인도 기일을 정하는 경향이 있다. 선박 건조대금을 깎을 때까지 깎다가 안 되면 그 대신 선박 수주 날짜를 확 당겨 제시하는 것이다. 선박 건조 계약은 인도 기일을 어길 경우 그 날짜만큼 손해배상 형태로 배 값을 깎아나가는 조건을 다는 게 관례이다. 날짜를 지켜 주면 예상보다 빨리 배를 움직일 수 있어 좋고, 날짜를 못 지키면 그만큼 배 값을 깎을 수 있으니 선주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대조선소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초기에 중동에서 선박 제조 의뢰가 들어왔다. 최종 계약 자리에서 서명 직전에 선주는 갑자기 인도 날짜를 턱없이 앞당길 것을 요구했다. 실무자들은 난감해 했다. 그 날짜에 맞춰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은 정주영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봐, 해봤어?” “회장님,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선 안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수주해 온 것들보다 아주 큰 배라서, 엔진도 지금까지보다 훨씬 큰 것을 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엔진을 들어 배에 올릴 만한 크레인이 없습니다. 스웨덴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당장 주문하더라도 이들이 요구하는 날짜까지 크레인이 도착할지조차 불확실합니다.” 누가 봐도 타당한 말이었으나, 정주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봐, 해봤어?”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는 태연한 얼굴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희비가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이었다. 선주 측은 함박웃음을 짓고, 현대조선소 실무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 기일을 맞추기 위해 정주영의 불같은 독려로 피를 말릴 일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선주들이 돌아가자, 정주영은 조선소 책임자들을 불러 말했다. “해봐. 되는 방법을 찾아 최선을 다하면 분명히 돼. 내가 해봤더니 그렇게 되더라고.” 그 뒤 완성된 배는 계약 날짜에 정확히 맞추어서 인도되었다.
경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물동량이 급격히 늘어나자,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권유로 정주영은 자동차 생산을 결심한다. 그 무렵 한국 자동차산업은 삼륜차 정도가 제조되고, 승용차는 반제품 조립생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천하의 정주영이라도 한국에서 감히 어떻게 자동차를 독자 개발한단 말인가?” 이것은 미국·일본 등 세계 자동차공업 종주국 업계 전문가들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한국 내의 비웃음도 만만찮았다. 그들은 말했다.
“무모한 짓 벌여서 건설업으로 번 돈 몽땅 날리지 마시오. 그렇게 자동차 사업을 하고 싶으면, 미국 자동차회사 하청생산이나 하는 게 좋을 거요.”
정주영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미국 자동차업계를 대신하여, 정주영의 자동차산업 진출 의지를 꺾기 위해 집요하게 설득하는 미국 대사에게 정주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자동차산업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업입니다. 내가 번 돈을 다 털어댄다 해도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내 세대에 성공을 못한다 해도 후대들에게 자동차산업 발전을 위한 디딤돌을 놓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정주영은 먼저 해외 기술제휴선을 찾았다. 미국·유럽·일본 여러 업체를 수소문한 끝에, 타 업체와 달리 경영권 참여를 조건으로 내걸지 않은 포드로 정했다. 포드 쪽에서도 여러 한국 기업을 평가한 뒤, 신용도와 자본력에서 가장 믿음이 가는 현대와 계약하기로 결정했다. 박정희의 적극적 지원으로 자동차 제조 허가를 받은 뒤 정주영은 울산시 양정동에 1968년 10월 1만3000여㎡ 규모의 현대자동차를 세웠다. 현대자동차는 국내 최초 조립차종으로 ‘코티나’와 ‘D-750’ 트럭을 생산했다. 그 뒤 ‘포니’가 생산될 때까지 현대자동차는 승승장구했다.
포니는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강조한 ‘국산기술 자동차’로 손색이 없는 데다, 국내 도로사정에 적합해 한국 최초 소형차 시대를 열었다. 포니는 90%의 국산화율로 만든 ‘토종 차’로, 현대자동차는 당시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고유모델을 가진 자동차회사로 이름을 드높인다.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포니는 세계 자동차업체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 행사에서 ‘우수한 스타일링과 한국 최초의 자동차’라는 점이 현지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3대 일간지인 이탈리아의 ‘라 스템파’는 ‘한국이 이제 자동차공업국의 대열에 올랐다’며 대서특필했다.
이를 계기로 현대는 정부로부터 차관도입 허가를 받아 종합 자동차산업을 위한 제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미국이 발목을 잡고 나섰다. 미국 자동차업계는 한국을 장차 유력한 잠재시장으로 보고 있었으며, 더불어 우수한 한국인 숙련공들을 활용하여 일본 자동차업계를 누르고 아시아시장을 제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때까지 현대·기아·GMK·아시아 등 한국 자동차회사들은 해외모델 조립·생산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현대가 독자 모델을 개발하여 호평을 받은 것이다.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첨단산업 쫓아가려면 날아가는 비행기에 뛰어올라야” 한국 경제의 불도저 정주영 (중)
▲ 1984 LA 올림픽에 참석해 교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대한올림픽위원장 정주영.
1977년 5월, 정주영은 주한 미국대사 리처드 스나이더의 면담 요청을 받고 서울 조선호텔에서 그와 만났다. 스나이더가 입을 열었다.
“자동차 독자 개발을 그만둬 주십시오. 포니 개발로 기술력은 증명했다지만, 한국의 조립생산업체 모두를 합쳐도 한 해 고작 30만대 수준인 생산능력으로는 현대자동차의 존속 자체가 위험합니다. 더욱이 지금 국민소득 수준으로는 한국인이 자동차를 사줄 리가 없고요. 정 회장께서는 수출을 염두에 두신 모양인데, 쟁쟁한 세계 자동차업계에서 신생업체인 현대차가 얼마나 잘 팔릴지 의문입니다. 자, 한 가지 제안하지요. 독자모델 개발을 그만두신다면 포드든 GM이든 크라이슬러든, 현대가 원하는 조건대로 조립생산을 할 수 있게끔 여러 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한국 내수는 물론 아시아 시장 전체가 현대의 몫이 될 것입니다.”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현대차를 해외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의연했다.
“조만간 한국의 1인당 GNP도 5000달러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또한 몇 년 전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는 등 도로 여건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습니다. 자동차산업은 기계·전자·화학 등 여타 산업 분야에 미치는 막대한 연관 효과나 고용창출 능력으로 볼 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 무렵 한국은 자동차산업 성공에 꼭 필요한 관련 기술과 소재·숙련공·자본·내수시장 기반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나 정주영은 그것을 큰 장애물로 여기지 않았다.
“첨단산업을 쫓아가려면 날아가는 비행기에 뛰어올라가 동승해야 가능합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 가면 됩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길이 열리는 법입니다. 선진국들은 자기들이 하고 남은 부분만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이 하기를 바라지만, 그런 분야는 남는 것이 없거나 별 볼 일 없는 것들입니다.” “어려운 일에 뛰어들지 않으면 도태”
긍정적 사고와 무서운 행동력의 화신인 정주영 앞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들도 굴복하고 문을 열어 준 셈이었다. 정주영은 1977년 제13대 전경련 회장에 취임하여 1987년까지 10년 동안 회장직을 최장기 연임하며 한국 민간 경제계의 본산인 전경련을 이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전경련의 오랜 숙원이던 회관 건립을 위해 기금 출연에 스스로 앞장서서, 1977년에 착공하여 1979년에 완공시켰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10월유신,10·26사건, 신군부 등장,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격동기를 거치며 그때마다 우리 사회와 경제에 거세게 불어닥쳤던 거센 풍파를 맨 앞에서 대응해야 했다.
“위험을 피하고, 편안하고 실패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려운 일에 뛰어들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도태되는 길이다.”
정주영은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때마다 자신을 만류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이 말은 단지 건설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을 살며 도전했던 사업과 그의 행동 특성들을 한데 모아 요약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동 건설시장 진출이라는 일대의 모험은 그런 정신이 없이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중동은 지리적으로도 한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문화·종교·인습·언어 면에서도 한국인에게 가장 생소한 지역이다. 열사와 사막기후는 그때까지 한국인 어느 누구도 겪어 본 적 없는 혹독한 환경이었다. 거기다가 중동에는 이미 선진국 일류기업들이 기득권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중동 주요국의 왕족이나 고위관료 등 지배층과 과거 식민지 관계 때부터의 연고와 이해관계로 똘똘 뭉쳐 있고, 사업 기회의 정보도 한 단계 앞서 독점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설계나 시공 기술과 자본력, 시공 장비 어느 하나도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어려운 장벽은 도리어 정주영의 도전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중동에는 석유파동으로 인해 몇십 배 오른 석유 값으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이 넘쳐난다. 그들은 몇십 년, 몇백 년을 내다보고 도로·항만·주택·공공시설 등 건설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다. 물론 우리 건설업계는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난관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두 번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우리나라는 외화가 바닥나서 국가 부도 직전에 놓여 있다. 외화를 벌어들일 돌파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너무 엄청난 위험요소 때문에, 현대그룹 창업의 일등공신 역할을 한 형제들까지도 적극적으로 정주영의 중동 진출을 만류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중동 진출을 강행했다.
정주영은 1975년을 ‘중동 진출의 해’로 선포하고, 아랍어로 현대건설 홍보영화를 만들어 중동에 배포토록 했다. 그리고 오일달러가 가장 풍부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바레인의 해외건설 수주를 위한 전략팀을 구성했다. 그 결과 바레인 아스리조선소 건설공사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아스리조선소 공사는 공사금액 1억3700만달러로, 그때까지 국내 건설업체가 중동에서 수주한 공사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이 공사로 말미암아 한국은 명실공히 새로운 중동 진출 시대를 열게 된다. 아스리조선소 공사는 1975년 착공, 2년여 만인 1977년에 완공되었다. 이 공사는 바레인의 무하라크섬에서 남쪽으로 8㎞ 떨어진 매립지에 드라이 도크를 세우는 공사였다. 현대는 이 공사를 위해 토목공사 33만명, 건축공사 26만명, 전기공사 25만명 등 연 90만여명을 투입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1억3700만달러 아스리 공사 수주
아스리조선소 공사에 이어 현대는 두 번째로 대형공사를 수주했다. 이 공사는 사우디아라비아 해군기지 확장공사로, 동부 주베일 지역의 기존 군항을 확장하는 사업이었다. 이 공사는 지금까지도 ‘신(神)의 공사’ ‘20세기 최대 대역사’로 불리고 있다. 현대는 이 공사를 따내기 위해 사활을 걸었으나, 구미 선진국들이 독점하고 있는 사우디 건설시장에서 현대가 입찰을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미국·영국·독일 등 세계 9개 국가에서 경쟁을 벌인 이 공사에서 정주영은 승리를 위한 ‘히든 카드’를 제시한다. ‘100% 토종기술’로 건립한 울산 현대조선소의 기술 노하우를 사우디 정부 측에 보여준 것이다. 그 결과 현대는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공사금액은 무려 9억3000만달러. 이 금액은 국가예산 30%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공사 수주가 발표되자 국민은 국가적인 경사로 받아들이며 기뻐했다. 그러나 막상 시공권은 따냈지만 공사가 문제였다. 50만t급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주베일항 공사는 신도 시도하기 어려운 공사로 평가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주영은 모든 기자재를 울산에서 제작, 사우디까지 운반토록 했다. 외화유출을 한 푼이라도 줄여보자는 취지였다. 울산에서 주베일까지는 1만2000㎞, 경부고속도로를 무려 15번 왕복하는 거리다. 재킷 철 구조물 하나만도 무게 550t으로, 10층 빌딩 크기였다.
정주영은 세계 최대 태풍권역인 필리핀 바다를 지나 동남아 해상, 인도양을 거쳐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으로 끌고 가는 금세기 최대 대양 수송작전을 감행했다. 수심 30m나 되는 곳에서 파도에 흔들리며 중량 550t짜리 재킷을 한계오차 5㎝ 이내로 꼭 20㎞ 간격으로 심해에 설치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신의 공사’였다. 공사를 완벽하게 끝내자 세계는 경악과 동시에 찬사를 보냈다. 이로써 ‘현대’의 명성은 누구라도 엄지를 치켜세울 만큼 확고한 것이 되었다.
정주영의 해외무대는 중동에 그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는 물론 영하 50도의 알래스카 맥켄리산 기슭에까지, 사업 기회가 있으면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정주영은 이렇게 강조했다.
“현장을 한눈에 꿰뚫고 있어야 문제가 생겼을 때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현장을 모르는 최고경영자의 말을 현장 사람들은 존중하지 않는다.”
정주영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에 놀라고, 뛰어난 창의력에 다시 한 번 놀란다고 한다. 정주영의 아이디어가 최고로 빛을 발한 것이 서산 간척사업에서 보여준 이른바 ‘정주영 공법’이다.
“남이 생각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 내고, 남이 하는 일과 다르게 해야 남과 다를 수 있으며 그들을 앞설 수 있다.”
정주영 일생의 행적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행동 특징이다. 그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의 무한한 가능성을 철저히 신봉했고 또 이를 실천했다. 건설·조선·자동차·철강 등 천하의 대기업가인 정주영은 뜻밖에도 늘 “농사짓고 싶다”는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이것은 자식들을 반듯하게 키우기 위해 평생을 성실하게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정주영은 서산만 개발이라는 대공사를 앞두고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흡족해 하시도록 온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으며 서산 공사현장에 각별한 열정을 쏟았다.
서산 간척사업은 일제강점기부터 계획했지만 넓은 간척 면적에다 유난히 간만의 차가 심하여 토목기술상으로 대단히 험난한 공사였으며 번번이 포기해야 했던 일이다. 정주영은 이 대사업을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고 1982년 B지구, 1983년 A지구 방조제 연결공사에 착수했다. 문제는 A지구였다. 9.8㎞나 되는 물막이 제방공사는 양쪽으로부터 둑을 쌓아감에 따라 물이 흐르는 양 둑 사이의 간격이 약 270m 정도 남았을 때 최대의 난관에 부딪혔다. 유속이 초속 8m가 넘는 밀물 때 엄청난 압력을 가진 물살의 위력은 가공스러웠다. 자동차만 한 바위도 들어가는 순간 쓸려 내려갈 정도로 무서운 속도의 급류였다. 바위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엮어 만든 20t 가까이 되는 바윗덩이도 순식간에 나무토막처럼 물살에 쓸려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쌓은 둑도 점점 물살에 쓸려 나가기 시작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토목공학 지식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수십 년 경력의 일류 토목기사들도 속수무책 갈팡질팡했다. 고철 유조선을 물막이용으로 끌어오다
그때 정주영의 상상력이 번뜩였다. 그는 해체하여 고철로 만들려고 수입해 울산 앞바다에 대어 놓은, 길이가 332m나 되는 22만6000t급 대형 유조선을 생각해 냈다. 그는 그것을 끌어다가 물이 흐르는 양 둑 사이에 대고 유조선에 바닷물을 가득 채워 가라앉혔다. 제아무리 센 물살도 그 육중한 배를 밀어내지 못하고 멈추었다. 그 사이 무난히 둑을 연결하여 물막이 제방을 완성했다. 그런 다음 유조선의 바닷물을 퍼내 배를 띄워 다시 울산으로 돌려보냈다. 이로써 공사기간 단축은 물론 공사비를 290억원이나 절약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정주영은 여의도의 약 33배에 달하는 1억5537만㎡(4700만평)의 국토를 새로 만들어서 나라의 지도 모양을 바꾸어 놓았다. 이 놀라운 ‘정주영 공법’은 ‘뉴스위크’와 ‘타임’ 등 세계 유명 언론에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소개되었으며, 영국 런던 템스강 하류 방조제 공사를 맡았던 회사에서는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서산간척지는 제염작업을 거쳐 1987년 처음으로 벼를 심었고, 지금은 연간 50만섬 이상의 식량을 얻는 ‘보고(寶庫)’가 되었다.
1970년대 끝 무렵, 한·미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인권외교를 내세운 카터 정부는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강하게 비난을 퍼부었고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79년 6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회담은 군사·정치·경제·외교 문제 어느 하나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으며, 주한미군 철수를 1981년으로 미루는 것만 결정되었다. 불안정한 한·미관계 향방에 따라 한국 경제도 크게 요동칠 것이 틀림없었다. 1979년 7월 전경련 모임에서 정주영은 신임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의 특별강연회를 열자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해 8월 8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강연회에는 예상 인원보다 훨씬 많은 300여명이 참석하여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첫마디부터 한국의 안보 상황, 특히 한국의 자주국방 정책에 대해 아주 격앙된 어조로 불만을 쏟아놓았다. 남북한이 팽팽한 군사적 긴장 상태에 놓여 있던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에 정치·외교적 영향력이 필요할 때마다, 미 7함대와 주한미군 공군력이 한국의 군사력과 합해져야 북한의 남침을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세워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이미 1971년 미 7사단 철수,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에 대한 미국의 미온적 태도 등을 겪어 온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기를 개발하면 미덥지 않은 미국의 손에 좌우되는 일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한국을 구할 수 있으리라 다짐했다. 물론 미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핵개발을 저지하려 했다. 서울올림픽 유치 성공
전경련은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경제 관련 이야기를 기대했으나, 그는 한국 정치 상황과 자주국방 노력, 즉 핵개발에 대한 강력 반대 ‘경고’만을 늘어놓았다. 그는 “오늘 내 이야기가 한국 정부와 언론에 새어 나간다면 나는 곧 미국에 소환될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듣는 입장에서는 ‘최후통첩’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리 강연 형식이라 해도 그가 한 말들이 한국 정부와 언론에 전해지지 않을 리 없으며, 노련한 외교관인 그가 그 사실을 예상하지 못할 리 없었던 것이다. 글라이스틴의 강연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술렁거리던 청중은 흥분하여 앞다투어 항의성 질문들을 쏟아냈다. 이 강연을 추진했던 정주영과 전경련 회장단은 당황하여 서둘러 강연회를 마쳤다. 10월 6일 글라이스틴은 자신이 한 말대로 미국으로 강제 소환되었다. 국제외교 관례상 대사 소환은 극단의 조치에 속한다. 이는 1958년 이승만 정권의 보안법 파동 이후 21년 만에 이루어진, 자주국방으로 핵개발을 강력히 추진하는 박정희 한국 정부에 대한 엄중한 항의 표시였다.
그로부터 20일 뒤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만다. 10·26사건으로 인해 한국은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12·12사태와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뼈아픈 격동의 암울하고 긴 터널로 들어선다. 거의 완성단계였던 박정희 핵개발은 꺾이고, 그 자료들은 모두 미국으로 넘겨졌다고 한다. 그날 강철의 사나이 정주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깊게 탄식했다.
“한국 역사에 박정희만 한 지도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는 역사적인 발표가 있었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서울을 올림픽 개최지로 발표한 것이다. 대한민국 전체는 축제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민족의 숙원사업을 정주영이 앞장서서 이뤄내는 순간이었다. 88서울올림픽은 일제강점기, 6·25전쟁과 빈곤, 정쟁과 사회혼란, 쿠데타, 부정부패 그리고 지구상 동서냉전의 마지막 군사 긴장 대치지역 등으로 세계인의 기억에 새겨진 한국의 얼룩진 이미지를 40여 년 만에 떨쳐버리고 한국의 저력을, 한국의 활력을 처음으로 세계만방에 드러내 보인 역사적인 세계 축제 이벤트였다.
올림픽은 평화·화합·우의를 다지는 세계인의 잔치다. 그것을 개최하기 위해서는 선진국 수준의 경제력과 기반시설, 대규모 국제대회 경험, 동서양 진영으로부터 고루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국제적인 외교 기반, 그리고 무엇보다 올림픽을 테러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치를 수 있는 정치 사회 안정이 최우선 조건이다. 그러나 한국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할 경우 국제사회에서 남한에 비해 열세에 빠질 것을 우려한 북한이 방해공작에 나섰다. 북한은 “남북이 군사 대치를 하고 있는 휴전선에서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7년 뒤에 개최될 올림픽 개최지를 서울로 정하는 것은 올림픽을 죽이는 길이 될 것”이라며 개최지 투표권을 가진 올림픽 위원들에게 반대 설득에 열을 올리고 다녔다. 그들 뒤엔 그들 편을 들어 줄 소련과 중국, 그리고 비동맹권 국가들이 있었다.
그만큼 88올림픽 서울 유치 성공은 기적에 가까운 반전이었다. 이 기적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집요하게 집행한 주역은 바로 정주영이었다. 당시 정주영이 88올림픽을 유치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한국과 일본이 막판까지 신경전을 벌일 때, 정주영은 한국 IOC 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꽃바구니를 하나씩 각국 IOC 위원 방에 넣어 주었다. 그 꽃바구니는 현대그룹의 해외 파견직원 부인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것이었다. 꽃바구니에 대한 반응은 의외로 대단했다. 그 다음 날 각국 IOC 위원들은 꽃을 보내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최고급 일본 손목시계를 선물했던 일본에는 감사인사가 없었다. 결국 비싼 선물보다 ‘정성’을 택한 한국의 정주영은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88서울올림픽은 역경을 기회로 만들고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해서 많은 대업을 성취한 정주영의 극적인 면모를 또 한 번 세계에 드러낸 것이다.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 “나는 땀 냄새 나는 노동자” 직원들과 어울릴 때 가장 행복해 해 한국 경제의 불도저 정주영 (하)
▲ 1987년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면담하는 정주영 전경련 회장.
정주영은 건설·자동차에 이어 조선·엔진·발전설비 등 중화학 분야에서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편다. 잇따른 해외 수주를 바탕으로 현대조선은 1978년 28.1%, 1979년 8.8%, 1980년 55.75%의 고속성장을 하면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인다. 또 해운업인 아세아상선(뒷날 현대상선)을 설립해 미주·유럽의 거대 선주들로부터 적잖은 외화를 벌게 된다.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정주영은 현대전자를 통해 그룹의 사업구조 다각화를 시도한다. 기존의 건설·자동차·조선·철강 등 중화학산업에서 반도체·통신·금융업 등 고부가가치 사업 분야로 영역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삼성과 LG 등 선발 업체가 있음에도 불구, 현대전자를 창업한 것은 정주영의 과감한 승부수였다. 단순한 가전에서 탈피하여 반도체와 통신기기, 멀티미디어 등 첨단제품을 생산한 현대전자는 1996년 3조1672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2000년에는 21조5000억원이라는 기록적 매출을 이루어냈다.
또 사업구조 다각화를 위해 뛰어든 금융업과 무역업에서 정주영은 두각을 보였다. 동방화재보험(현대화재해상의 전신)은 자동차보험업계에서 정상을 달렸고, 뒤늦게 출범한 현대증권도 서서히 뿌리를 내리며 업계에서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정주영은 무역업에도 진출, 현대종합상사를 창업하면서 1990년 이전까지 ‘6년 연속 업계 1위’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특히 현대종합상사가 1989년 인도네시아 베카시공단 개발사업을 수주한 것은 국내 최초의 해외공단 개발사업 수주로 기록되고 있다. 이처럼 정주영은 사업다각화에 주력하면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열사 60개, 근로자 21만명을 거느린 거대한 ‘현대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정주영은 ‘노동자’를 사투리로 ‘뇌동자’라고 발음했다. 스스로를 항상 ‘뇌동자’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그들의 작업복에서 배어나오는 땀 냄새를 사랑했고, 그들의 진지한 눈빛과 질박한 웃음을 사랑했다. 햇볕에 그을리고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에 깃든 그들의 열정과 패기를 사랑했다. 정주영은 재계 인사들과 어울릴 때보다 회사 노동자들과 어울릴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그들과 있을 때 그의 꾸밈 없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고, 그들과 운동을 할 때나 여흥을 즐길 때 그의 객기 또한 한껏 발휘되었다. 그는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직원수련회 등에서 20대 젊은 직원들과 씨름이나 팔씨름을 하기도 하고 테니스나 야구장에서 그들과 몸을 부딪치고 땀 흘리면서 행복해 했다. 그럴 때면 그의 얼굴은 소년처럼 붉게 상기되곤 했다. 평생 그가 노동자에게 가졌던 애정과 동료의식은 그의 인성에 깊이 뿌리박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채 뼈가 굳기도 전인 어린 시절에 아버지 밑에서 허리가 휘는 농사일을 해봤고 고향을 떠나 하루 세끼 벌이를 위해서 인천부두에서 뱃짐을 날랐으며, 고려대학교 본관 공사장에서 돌짐 지고 숨이 턱에 차도록 사다리를 오르는 강도 높은 중노동을 해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단지 고통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땀 흘려 성실히 일하는 노동 자체에 항상 삶의 귀중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본디 돈을 벌고 큰 사업가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다. 늘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부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재벌이 아니고 “부유한 뇌동자”라고 말했다. 대기업 총수가 된 그가 스스로를 ‘노동자’로 분류한 데는 그만큼 진지한 내면이 깔려 있는 것이었다. 1987년 이른바 6·29선언, 봇물처럼 전국을 휩쓴 노동쟁의는 그동안의 제도적 억압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듯 폭력화하였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신군부정권은 노동자들의 표를 의식해 이런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있었고, 한국의 주요 수출시장인 선진 각국에서는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 노동자들과 연기로 휩싸인 생산시설들을 날마다 보도하고 있었다. 그동안 땀 흘려 쌓은 한국의 경제기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사용자 주체인 전경련에서는 재계 대표들이 연일 심각한 대책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입장에 있던 정주영은 그러한 사태에서도 노동자들을 매도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항상 노동자들에게 기업과 경제의 실상을 솔직히 이해시키고, 서로 인내하고 양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동안 우리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우리 ‘뇌동자’들의 땀과 희생이었음을 늘 상기시켰다.
세계의 기업가들뿐 아니라 세계의 정세를 주도하는 정치가들에게도 한국의 현대 정주영은 대단히 익숙한 이름이다. 그들에게 정주영은 극히 열악한 조건에서도 자동차·조선·중동건설 등 기적 같은 대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한국의 눈부신 성장을 견인한 경이롭기 그지없는 기업인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들은 그런 정주영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 그 때문에 민간경제인 자격으로 한국의 대통령을 수행하여 유럽이나 동남아 등 외국을 순방할 때면, 방문국들의 정치인들이나 기업계는 대통령에게는 의전상 의례적인 예우를 할 뿐 정주영에게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서, 정부수행원이나 정주영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정부에서 각별히 신경을 쓰는 순방국 언론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막상 대통령의 방문 의미나 일정은 통상적인 언급 정도에 그치는 반면, 정주영의 성공 이야기나 그가 제시하는 자국과의 사업 프로젝트에 대한 기사를 대서특필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그를 ‘한국 경제의 나폴레옹’이라고 평했다. 정주영은 피터 드러커, 앨빈 토플러, 폰 하이에크, 헨리 키신저 등 당대 세계적 석학들과의 만남 기회를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했다. 경제나 기업경영과 같은 주제뿐 아니라 사상·정치·문화 등 사회의 미래·과학기술의 발전 방향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한 이야기에 심취했으며 그들로부터 거시적 비전에 관한 영감을 얻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들 머릿속에 한국의 저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에 걸쳐 정주영이 전경련 회장이라는 위치를 활용하여 한국의 정치·외교에 크게 공헌한 부분이 있다. 이 시기는 한국이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10월유신, 그리고 박 대통령 시해 이후에 이어진 신군부 독재시대였다. 이를 계기로 악화된 한국에 대한 세계 여론을 활용하여, 북한은 특히 비동맹국을 비롯하여 세계무대에서 그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 세계는 냉전체제 아래에서 미국과 소련을 양대 축으로 갈라진 동서 진영과 약 100여개국으로 구성된 비동맹권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북한의 적극적인 외교공세가 먹혀 들어간 비동맹권의 여러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비동맹권 리더 격인 인도도 한국과 정식 외교관계는 가지고 있었지만,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외교 현안에서 남한의 입장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는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계속 거부하며 한국대사관도 들어설 수 없게 하고 있었다. 최대 도시 라고스에 겨우 사무실을 유지하고 있던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나이지리아 당국의 철수명령을 받았다. 정부 외교 채널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더 이상 주효하지 못했다. 대화 자체가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정치나 이데올로기를 떠나 어느 나라를 가도 정부나 기업계가 관심을 갖고 환영해 주는 정주영을 떠올렸다. 기업 현지 진출이든, 무역이든 경제협력안을 내세워 정주영이 앞장서기로 했다. 국내외로 현대가 벌여 놓은 사업으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게 바쁜 정주영이지만, 그는 나라를 위해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한 번에 2주 넘게 걸리는 긴 여정을 기꺼이 견디며 인도로, 아프리카로, 동남아로 향했다. 그는 방문국의 국가 원수나 경제 각료들, 기업계 대표들을 만나 그 특유의 순발력과 재치로 경제교류 확대 방안을 제시하고 한국과의 교류가 갖는 장점들을 설파하며 설득해 나갔다. 나이지리아에는 정주영이 방문 2년 뒤에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
▲ 1992년 1월 10일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창당위원장(오른쪽 두 번째)이 서울 평동 서진빌딩에서 창당발기인대회를 마친 뒤 창당준비위원들과 현판식을 갖고 있다. photo 한영희
정주영은 70세이던 1985년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여생의 마지막 소망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경제정책을 소신대로 해보는 자리에서 한 5년간만 일해 봤으면 해요. 한 가정이 일어서는 데는 평생이 걸리지만 한 나라가 일어나는 데는 10년이면 족해요.”
그때 그것이 설마 마음속에 품은 대통령 선거 출마의 뜻을 표현한 것임을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정주영은 광복 이후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서 일어난 정치·경제·사회의 커다란 소용돌이들을 그 한가운데서 체험해야 했다. 그런 체험 속에서 그는 특히 한국의 정치현실 모순의 뿌리가 무엇이며, 그것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우리 경제와 사회발전에 어떻게 족쇄로 작용하는가를 뼈저리게 느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원래 정주영은 그것을 울타리 밖에서 그대로 관망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일생의 행적이 그랬다. 그 도전의 길이 고난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안 되었다. 중요한 것은 가야 할 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민족의 번영을 위한 미래와 역사의 방향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당리당략에 따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민족의 사활이 걸린 경제나 사회정책도 거기에 맞추어 좌지우지하는 이른바 ‘정치꾼’들에게 계속 정치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정주영은 한국에 자유경제체제를 제대로 뿌리내려 경제력 기반을 굳히고 명실상부하게 선진국으로 진입하도록 해야겠다는 야망을 가졌다. 또한 그는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구체적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포부와 야심을 실현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여생을 바칠 국가와 민족의 부름이라고 믿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그의 무수한 위대한 업적들이 세인들의 눈에 하나도 순탄하거나 가능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성공적으로 해냈던 것처럼 그는 확신에 넘쳤다.
정주영은 대통령 출마 선언과 함께 1992년 2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국민당은 창당 45일 만에 치른 14대 총선에서 의석 31석을 확보하는 정치폭풍을 일으켰다. 이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식상과 변화 욕구, 그리고 경제발전에 대한 국민의 희망이 표출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한편 정주영의 라이벌들은 그의 대통령 출마 동기를, 그의 많은 나이를 빗대어 ‘노망’ 또는 ‘노욕’으로 비하했다. 또한 “돈을 벌어 부자가 되더니 이제는 권력까지 탐낸다”며 네거티브 공세를 폈다. 무엇보다 뿌리 깊은 지역주의가 정치 아마추어인 그에게는 극복하지 못한 벽이 되고 말았다. 정주영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대통령 선거를 두고 사람들은 나더러 실패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큰 실패자는 그들이 뽑은 대통령 때문에 IMF 외환위기를 맞아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러야 했던 국민들이고, 그 다음은 국가를 부도 낸 대통령으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사람이 실패자입니다. 나는 단지 국민들에게 뽑히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려일실(千慮一失)이었다.
“어릴 적 가난이 싫어 소를 팔아 받은 돈을 쥐고 무작정 집을 나와 서울로 왔습니다. 그 뒤 나는 묵묵히 일 잘하고 참을성 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 왔습니다. 이제 가출할 때의 소 한 마리가 1000마리가 되어 빚을 갚기 위해 고향으로 갑니다. 이번 방북이 한 개인의 고향 방문 차원을 넘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1998년 6월과 10월, 정주영은 소떼 1001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방북했다. 세계에 마지막 남은 분단과 대치의 벽 한반도의 38선에서 83세의 한국인 기업가 정주영이 연출하고 주역을 맡은 이 희대의 퍼포먼스에 온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이것은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통일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세계 만방에 전파하기 위한 비장한 절규였다. 당시 프랑스의 세계적 문학비평가인 기 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평했다.
그토록 강해 보이던 정주영도 고향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강했으며,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목이 메곤 했다. 그는 통일의 물꼬를 자기 손으로 마련하겠다는 열망이 대단했으며, 대북사업도 이런 차원에서 추진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사업적 측면에서도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정주영은 중국이 장기간 사회주의를 겪었으나 경제개방 이후 무서운 성장을 기록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북한도 사람들의 의지와 인내력이 뛰어나 개방만 된다면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정주영은 이와 함께 북한이 개방될 경우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사회간접자본 확충이며, 미리 기반을 닦아 놓는다면 이에 대한 기득권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정주영은 남북 간의 경제협력이 통일로 가는 가장 주효한 방법임을 굳게 믿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양쪽 모두 다른 분야보다 정치적인 부담은 적은 반면, 양쪽의 필요가 가장 잘 들어맞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노동력·자원·기술·경험·경제현실 등 모든 면에서 양쪽에서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보탤 수 있는 엄청난 보완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특히 일부 사업추진에 있어 실정법을 위반할 수도 있겠지만, ‘통일’이라는 것은 실정법 체계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잘못이 있다면 역사에 평가받고 책임지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정주영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술회를 했다.
“겨울에도 바지저고리를 한 벌만 가지고 입었는데, 그러다 보니 옷 속에 이가 많이 생겨. 할머니가 이를 잡아 주시는데 눈이 나빠서 잘 안 보이시니까 옷을 벗겨 애들을 한 이불 속에 몰아넣고 바지저고리를 밖에 추운 눈 위에다 펼쳐 놓아 이들이 얼어 죽게 하는 거야. 그런 다음 소여물 끓이고 남은 불을 담은 화로에, 옷에 남아 있는 죽은 이들을 툭툭 털어서 입혀주셨지.”
정주영은 가난이 무엇인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들에 대한 연민이 그의 심중 깊은 곳에 일생 동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모든 사업의 본체 격인 현대건설의 기업공개 압력을 언론과 사회로부터 집중적으로 받던 시절 다음과 같이 그의 심경을 말했다.
“현대건설을 기업공개 하면 결국 돈 있는 사람들이 그 주식을 사서 땀 안 흘리고 돈을 벌게 될 뿐, 돈 없는 소외계층에는 아무 혜택도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
정주영은 주식을 공개하기 전에 총 주식의 반가량을 복지재단에 기증하고, 나머지만을 주식시장에 공개했다. 전국에 종합병원들을 지은 것은 그렇게 해서 설립된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다. 그는 첨단시설과 연구진을 집중할 필요가 있는 서울 아산병원 말고는, 다른 의료재단들이 채산성 때문에 기피하는 오지 지방 도시들에 병원을 설립하거나 지방 병원들과 의료협력을 구축했다. 그렇게 설립된 것이 보성·정읍·영덕·보령·홍천·강릉·금강에 세운 아산병원들이다. 정주영은 이런 의료시설들을 돌아보며, 그리고 그가 만든 재단이 지원하는 불우 어린이 시설들을 방문하여 어린이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조선소에서 만든 어마어마하게 큰 배, 출고를 기다리는 자동차를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회와 행복감에 젖은 것이다. 정주영은 마지막까지 대북사업에 온힘을 쏟았다. ‘소떼 방북’을 했고, 3개월 뒤인 1998년 11월 현대그룹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의 역사적 첫 출항이 이루어졌다.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을 밟게 된 것이다. 이는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 절대적 역할을 했다. 정주영은 대북사업을 전담할 수 있는 현대아산을 설립했으며, 금강산 개발에 이어 개성공단 개발 등 새로운 사업이 시작되었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분단 이후 반세기간 진행된 남북사업 전체보다도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2001년 3월 21일. 검은 구름에 광풍이 몰아쳤던 이날, 한반도에선 큰 별 하나가 사라졌다. 재계의 거목 정주영이 타계했다. 정주영은 대북사업에 열정을 갖고 있던 시기에, 맨주먹으로 이룩한 현대그룹을 영원히 뒤로한 채 결국 생을 마감한다.
고정일 194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0년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 수상. 1956년~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 1977~19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 저서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장진호’ ‘이중섭’ ‘매혹된 혼 최승희’ ‘폭풍 속에서’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 한국출판학술상 수상,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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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
첫댓글 좋은 정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