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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의 설경 – 규봉암,장불재,입석대,서석대,인왕봉,중봉
1. 서석대에서 바라본 무등산 인왕봉
돌로 이만치 기이한 것은 물론 금강산에도 없는 것이거니와, 그 밖에도 대상(臺上)에 서서 전라남도 일대의 일천 산
일 만 멧부리를 쫙 내다보는 원경(遠景)은 진실로 아무것하고도 바꿀 수 없는 산 그림이다. 이때까지 일컬어온 운문
(雲門)의 그것은 여기 대면 다 어린애들이라 할 것이다. 청랑할 때에는 바다도 내다보인다 한다. 조화의 장난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도 배포가 숭엄장대(崇嚴壯大)함을 느낀다. 하느님의 이궁(離宮)자리이다 하는 직감이 생긴다.
어느새 지으셨다 어이 다시 뜯으신고,
거룩한 기둥받침 새것으로 남았어라,
터(일)망정 하느님 나라 고개 절로 숙어라.
――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 『심춘순례』에서
▶ 산행일시 : 2024년 1월 27일(토) 맑음
▶ 산행코스 : 원효광장,규봉암,장불재,입석대,서석대,인왕봉,서석대,중봉,늦재,원효사,원효광장
▶ 산행거리 : 도상 14.7km
▶ 산행시간 : 5시간 42분(11 : 20 ~ 17 : 02)
▶ 교 통 편 : 대성산악회(30명) 버스로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07 : 17 – 복정역 1번 출구
08 : 55 – 탄천휴게소( ~ 09 : 15)
11 : 20 – 원효광장, 산행시작
12 : 05 – 꼬막재
12 : 22 - ╋자 갈림길, 왼쪽은 신선대(북산) 0.9km, 오른쪽은 누에봉 1.0km
12 : 59 – 규봉암(圭峰庵), 점심( ~ 13 : 30)
14 : 03 – 장불재(長佛-)
14 : 13 – 입석대(立石臺, 950m)
14 : 36 – 서석대(瑞石臺, 1,100m)
14 : 50 – 인왕봉(人王峰, 1,164m)
15 : 21 – 목교, 임도
15 : 31 – 중봉(中峰, 915m)
16 : 07 – 늦재전망대, 임도
16 : 21 – 늦재, 임도
16 : 43 – 원효사
17 : 02 – 원효광장, 산행종료(17 : 48 – 버스 출발)
19 : 05 – 이서휴게소( ~ 19 : 17)
21 : 28 - 복정역
2.1. 산행지도(영진지도, 1/50,000)
2.2. 산행 그래프
야장몽다(夜長夢多). 밤이 길면 꿈이 많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가는 무등산 들머리인 원효사가 멀다. 막힘없이 달려
도 4시간이 넘게 걸린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어둑하고 눈 감으니 곧 밤이다. 밤으로 간다.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하도 오랜만에 내 놀던 옛 동산이기도 한 무등산을 간다 하니 설레서일까. 토막 꿈에 무등산 너덜겅에서 혹은 길 없
는 눈 속에서 헤매곤 한다. 깨고 나면 꿈이었구나 가슴 쓸며 안도한다. 그렇지만 미리 힘이 쭉 빠진다.
황룡강 강변의 축축 늘어진 능수버들은 푸른 봄빛이 완연하다. 무등산이 가까워지고 주변의 낮은 산들은 눈이 다
녹았다. 이럴진대 무등산만은 다를까? 산행대장님은 요 며칠 따뜻하여 눈꽃이 아직 남아있을지 의심스럽다며 아쉬
워한다. 원효사 입구 주차장은 이미 만차다. 주차장에 진입하기가 어려워 그 입구에서 내린다. 원효광장이다. 무등
산을 한 바퀴 도는 원점회귀 산행이다. 어려운 데는 없다. 주어진 산행시간은 6시간으로 그 마감시간은 16시 20분이다.
먹자거리를 지나는데 누군가 무등산을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다보더니 정상 주변에 눈꽃이 하얗다고 한다. 나는
미세먼지가 심하게 끼어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닐까요 하자, 자세히 보시라고 한다. 그렇다. 눈꽃이다. 차라리 보지 말
것을. 갑자기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골짜기 건너는 의상봉(547m)이다. 우리는 거기는 오르지 않는다. 의상
봉은 등로에서 왼쪽으로 0.7km 벗어나 있다. 의상봉이 있다면 원효봉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맞았다. 원효
봉(594m)은 원효사 뒤쪽에 있다. 혹시 윤필봉은? 근처에 윤필봉(448m)도 있다. 봉우리 높이가 형 아우 순이다.
원효, 의상, 윤필은 각각 배 다른 형제라고 한다. 후세 사람은 이들을 일컬어 삼성(三聖)이라고 한다.
얕은 골짜기를 완만하게 오르는 소로가 이어진다. 곳곳이 빙판이다. 아이젠을 찰 틈이 없이 경주하듯 줄달음 한다.
꼬막재까지는 이대로 가자 하고 버텼으나 잠풍한 날씨에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고 겉옷 벗고자 멈춘다. 홑옷차
림 한다. 아이젠도 찬다. 그리고 마치 태산이 발에 채여 왜각대각할 듯이 내닫는다. 꼬막재를 오르면 오르막은 한풀
꺾이고 산자락 길게 돈다. 응달진 사면에는 눈꽃이 영락없이 목화송이처럼 피었다.
이만해도 다행이다 싶어 열 걸음이 멀다 하고 카메라 앵글 들이댔으나 앞으로 보게 될 눈꽃의 휘황찬란한 위광에 그
만 가리고 말았다. ╋자 신선대 갈림길이 금방이다. 왼쪽 신선대(북산, 778.1m) 0.9km는 호남정맥 길이기도 하다.
이제 장불재까지는 호남정맥 길을 가게 된다. 호남정맥은 장불재에서 백마능선 낙타봉, 안양산으로 간다. 산허리 돌
고 돈다. 눈길 너덜을 지날 때는 조심스럽다. 시원스런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규봉암 갈림길. 오른쪽 돌길을 100m 오르면 규봉암이다. 우선 절집과 규봉의 입석을 구경하러 간다. 누각인 범종각
아래를 지난다. 색 바랜 주련이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죽비(竹篦)다.
入此門來莫存知解 이 문에 들어오거든 안다는 것을 버려라
無解空器大道成滿 비우고 빈 그릇에 큰 도가 가득 차리라
암자보다는 그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입석에 눈길이 간다. 장대하다. 예로부터 수많은 문인들이 무등산을 오르고
저마다 예찬하는 글을 남겼다.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1592)은 42세 때인 1574년 4월에 무등산을 올라 이
규봉암도 들렀다. 그의
「유서석록(遊瑞石錄)」의 한 대목이다.
“금석사를 따라 나아 산기슭을 돌아서 동쪽으로 나오니 바로 규봉암이었다. 김극기의 시에, “바위 모양은 비단을
마름질해서 빼낸 듯하고 봉우리 형세는 옥을 다듬어서 만든 듯하구나”라고 했는데 이것이 참으로 빈말이 아님을 알
겠다. 바위가 기이하고 오래된 것으로는 입석암의 바위와 맞먹을 만했으나, 그 폭이 넓고 크면서 형상이 진기하다는
점에서는 감히 입석암의 바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3. 꼬막재 가는 길
4. 규봉암 가는 길
6. 규봉암 문수보살 게송비, 선 몇 개로 인자한 문수보살을 멋지게 그렸다
7. 규봉암에서 조망, 멀리 흐릿한 산은 모후산일까?
8. 규봉(일부분)
9. 맨 왼쪽은 호남정맥 별산(690m)
10. 장불재에서 바라본 입석대와 서석대(맨 위)
규봉암 절집 주련을 살핀다. 관음전 주련은 소소매(蘇小妹, 생몰년 미상, 소동파의 누이)의 시인 「관음찬(觀音讚)」
이다. 소소매의 이 시와 일화는 불교계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고 한다. 이 시는 새로 지은 관음전에 올릴
주련을 받고자 찾아온 스님에게 소소매가 오빠인 소동파를 대신해서 써준 것이라고 한다.
바다 속 한 떨기 붉은 연꽃이여
푸른 파도 깊은 곳에 그 자태 납시더니
어젯밤 보타산에 계시던 관음보살이여
오늘 아침 이 도량에 강림하셨네
一葉紅蓮在海中
碧波深處現神通
昨夜寶陀觀自在
今日降赴道場中
다음은 종무소 주련이다. 중국 남송 때 선사(禪師)인 야부도천(冶父道川, 1127~1130)의 선시를 걸었다. 불가의
냄새가 덜 난다. ‘외로움도 보밴양 오붓한’ 느낌이 든다.
고요한 밤 산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적막함이 자연 본래의 모습
어찌하여 동풍은 잠든 숲을 흔들어 놓고
차가운 밤 외기러기 만리장천을 울며 가는고
山堂靜庭座無言
寂寂寥寥本自然
何事東風動林野
一聲寒雁淚長天
절집 아래 양광이 가득한 공터로 가서 점심밥 먹는다. 산행을 시작하고 나서 첫 휴식이기도 하다. 열 명의 일행 중
나만 고봉밥 도시락이다. 다른 사람들은 간편식으로 빵이나 샌드위치다. 나도 매번 저래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잘 되지 않는다. 그들은 산에서는 술도 마시지 않는다. 나만 반주로 탁주 독작한다. 커피는 보온병에 더운물을 담아
왔던 터라 봉지커피를 타서 마신다. 이래야 점심을 먹은 것 같다.
규봉암을 나와 너덜지대를 지나면서 백마능선을 살피고 ┣자 갈림길은 지나는데 국공을 만난다. 이정표에 오른쪽은
석불암 0.3km다. 발품을 덜고자 국공에게 물었다. 석불암에 조망이나 다른 볼거리가 있나요? 아니요, 아무런 볼거
리가 없고 조망은 규봉암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면 굳이 석불암을 갔다 올 필요가 없겠다 싶어 그냥 지나쳤다. 얼마
쯤 가니 거기를 오가는 길이 있지 않는가! 내 크게 잘못했다. 지도를 보지 않는 잘못이 그 첫째요, 국공에게 석불암
을 거쳐 등로가 이어지는지 묻지 않은 게 두 번째 잘못이고, 고경명의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미리 보지 않은 게
세 번째 잘못이다.
이에 더하여 규봉암 근처에 있다는 광석대도 들르지 않았다. 광석대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없기도 했지만. 나중에
고경명의 「유서석록(遊瑞石錄)」을 읽고는 심한 배앓이를 해야 했다.
“(…) 광석대(廣石臺)는 규봉암 서쪽에 있었다. 그 바위 면이 깎은 듯이 넓고 평평한 것이 아주 편안해 보였으며,
빙 둘러앉는다면 수십 명이라도 앉을 만했다. 당초에는 서남쪽 모퉁이가 조금 낮았으나 절의 승려들이 힘을 모아서
들어 올려서 큰 바위를 괴어 놓았다고 한다. 보기에도 엄청나게 큰 바위인데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었
는지 그저 감탄할 뿐이다. 이른바 삼존석(三尊石)은 이 광석대 남쪽에 있는데 아주 높아서 나무 끝까지 솟아 나왔으
며, 그 푸르름과 꼿꼿함은 광석대의 광대함과 그 기세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천관산, 팔전산, 조계산, 모후산이 모두 눈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규봉암의 빼어난 경치가 이 무등산에 있는 모든
암자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라면, 이광석대의 경치 또한 규봉에 있는 열 개나 되는 대(臺) 중에서 가장 빼어나 남쪽에
서 제일가는 경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1. 입석대
12. 오른쪽 도시는 광주
13. 백마능선과 낙타봉(929.5m), 그 뒤 가운데는 만연산
14. 서석대 가는 길의 눈꽃
15. 아래 안부는 장불재
16. 서석대 주변의 눈꽃
18. 앞은 인왕봉
19. 서석대 표지석과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고경명은 증심사에서 무등산을 올랐는데, 그가 「유서석록(遊瑞石錄)」에서 언급한 절과 암자가 다음과 같이 18개나
된다.
증심사(證心寺), 증각사(證覺寺), 도솔사, 입석암(立石庵), 불사의사(不思議寺), 염불암(念佛庵), 장불사(長佛寺),
삼일암(三日庵), 금탑사(金塔寺), 은적사(隱迹寺), 금석사(金石寺), 석문사(石門寺), 대자사(大慈寺), 규봉암(圭峰
庵), 문수암(文殊庵), 향적사, 불영암, 보리암.
너덜 지나고 다시 산허리를 돌고 돈다. 그리고 완만하고 길게 올라 장불재다. 장불재는 무등산 산행교통의 제1의
요충지로 가장 번잡하다. 숫제 장터다. 장불재에서 올려다보는 입석대, 서석대, 인왕봉의 넓고 너른 사면을 수놓은
아직 스러지지 눈꽃이 잠시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는다. 등로는 대로다. 교행으로 길게 줄이어 오르고 길게 줄이어
내린다. 광활한 목화밭에 들어선다. 눈 닿은 데마다 장관이다. 열 걸음에 아홉 걸음은 뒤돌아본다.
고경명은 450년 전에 증심사에서 중머리재(그때는 ‘중령’이라고 하였지 않았을까)를 거쳐 입석대를 올랐다. 그때는
지금과는 다르게 무척 험준한 산길이었으리라. 그럼에도 현장감 있는 행보와 시선이 마치 지금인양 생생하다. 그의
「유서석록(遊瑞石錄)」 중 일부다.
“(…) 이정(梨亭)으로 난 길을 따라 중령(中嶺)의 험준한 길을 곧장 올라가는데 멀리서 보면 하늘을 닿은 것 같았으
며, 사람들은 모두 물고기를 꿴 듯 한 줄로 이어서 마치 개미가 기어오르는 것처럼 조금씩 나아갔다. 그렇게 가던 길
이 끝나자 앞에는 시원하게 계곡이 펼쳐지는데 마치 바다에서 배 뚜껑을 젖히고서 밝은 햇빛을 보는 것처럼 유쾌했다.”
“중령에서 산을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트니 빽빽한 숲이 뒤덮고 있어서 햇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위태로운
돌길이 높은 허공에 매어 달린 듯해 가는 길이 전혀 없었으며, 다만 날것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돌이끼들이 푸른빛을
발할 뿐이었다. 지팡이를 끌고 시를 읊조리며 가자니 산을 오른다는 힘겨움도 금세 잊혔다. 그래서 그런지 중령을
다 오르고 난 뒤에 돌아보니 마치 빠른 수레를 타고 힘 있게 내리달린 양 느껴질 정도였다.”
“저물녘에야 입석암(立石庵)에 도착했다. 중국 명나라 문인 양사기(楊士奇)가 “열여섯 봉우리가 절을 숨겼구나”라
고 읊은 것이 바로 이곳을 가리킨 것 아닌가 싶었다. 암자 뒤에는 괴이하게 생긴 바위가 첩첩이 쌓였는데 우뚝우뚝
한 것이 마치 봄에 죽순이 다투어 머리를 내미는 듯하고, 밝고 깨끗하기로는 연꽃이 막 피어난 것과도 같았다. (…)
또 수많은 철갑 속에서 그 하나만을 숨겼다가 우뚝 솟아나 그 어디에도 의지하는 것이 없어 형세가 더욱 홀로 빼어
나니 마치 세상과 단절한 선비가 무리를 떠나 홀로 외로이 가는 것과도 같았다.”
20. 앞이 인왕봉
21. 서석대 주변 눈꽃
22. 인왕봉
24. 호남정맥 백마능선 낙타봉과 안양산
25. 중봉과 송신소, 천제당
26. 인왕봉 주변, 뒤는 누에봉(북봉)
27. 인왕봉 주변
28. 서석대 북사면
입석암 지나면 약간 가파른 돌길이다. 관목 위로 머리를 내밀게 되니 걸음걸음이 경점이다. 이 바위에 올라 사방 한
번 둘러보고, 저 바위에도 올라 사방 한 번 둘러본다. 서석대. 그 표지석과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내쳐 인왕봉을 오른다. 여태 출입금지였던 등로다. 야트막한 안부 지나 오른쪽 돌길에 이어 군부대 철조망 따
라 가파른 데크계단을 오른다. 인왕봉. 널찍한 데크전망대를 마련해 놓았다.
이왕 인왕봉을 개방했으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왕봉과 천왕봉, 누에봉(북봉)으로 지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
에는 인왕봉을 반야봉이라 했다. 고경명은 「유서석록(遊瑞石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명베 한 필의 길이는
지금은 20m 내외라고 한다.
“봉우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는 동쪽에 있는 천왕봉과 가운데 있는 비로봉이다. 그 둘 사이는 백여 척쯤 되는
데 평지에서 바라보면 마치 대궐을 마주보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이 봉우리들이다. 서쪽에 있는 것이 반야봉이다.
비로봉의 꼭대기와는 그 거리가 무명베 한 필 길이밖에 되지 않고 그 아래는 한 자 거리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평지
에서 바라보면 마치 화살촉 같은 것이 이 반야봉이다.”
다시 주릉 서석대 표지석 있는 데로 내려와 중봉 가는 길로 든다. 여기서 임도 목교와 만나는 가파른 내리막 0.6km
정도가 오늘 산행의 백미 중 하나이다. 눈꽃이 흐드러지게 핀 설국이어서다. 눈꽃 터널이다. 오가는 사람마다 입에
침이 마르게 찬탄하고는 이를 배경하여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오늘 어쩐지 무등산에 오고 싶었다. 뭇 산악회를
검색한 여러 산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무등산에만 마음이 쏠렸다. 이럴 때 우리는 ‘필이 꽂혔다’라고 한다. 딱히
그럴 이유를 대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이래서 그랬나 보다.
대체 어쩌자고 이토록 화려하게 피었을까? 눈꽃이 이럴 수도 있구나. 상상하지 못한 기경이다. 무등산이 이럴 때도
있다니! 걸음걸음이 아깝다. 허리 굽혀 금줄 넘고 눈꽃 터널을 지나 전망 좋은 암반에도 들른다. 다만 환상적이다 라
는 말로 퉁치고 만다. 주등로에 내려서면 바로 서석대다. 입석대와는 다르게 입석 사이로 눈꽃이 피었다. 이 서석대
(1,050m)는 입석대(950m)와 함께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1~2m 너비의 돌기둥들이 약 50m에
걸쳐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서석(瑞石)’은 한자식 표현(음 차용)으로 고대 선돌숭배 신앙의 중요한 표상이라고 한다.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1903~1982)이 이 서석을 본 시각이 또 그럴 듯이 놀랍다. 그의 「鄕土文化를 차저서 無等山遊記」 중 ‘瑞石의 水晶
屛風’(조선일보, 1938.3.18.)의 일부다. 오늘의 ‘殘雪蒼苔의 景’이 진달래 꽃그림보다 더 아름답지 않을까 반문해본다.
“돌을 이미 그저 돌이라 부르지 안코 瑞石이라고 부른 것은 禮讚의 뜻을 벌써 거기에 表한 것입니다마는 나는 그
禮讚을 過하게 보려는 者가 아니오 도리어 不定하게까지 보고 싶습니다.
『瑞』의 抽象的인 것이 漠然하야 認識이 不及하는 이를 爲하야는 구트나 『水晶屛風』이라는 具象的인 表現法을
쓴대도 조켓습니다.
數十丈, 數百間의 瑞石群 사이사이로 진달래나무가 봄 오기를 기다려 고개키대로 내어밀고 잇습니다. 제철이 들면
瑞石屛風이 꽃그림으로 찰 것이니 언제나 오를 수 있는 光州 사람의 절로 받은 福이 決코 엷지 아니한 줄 알겟습니다.
그러나 오늘 비록 꼬즌 피지 아니햇서도 날가튼 孤憤客을 위하야는 殘雪蒼苔의 景만도 悲愍의 恩惠로운 慰勞가
됨을 깨닷습니다.
孤憤客 恨 만흔 사람
쉬어가라 하시오니
南無瑞石如來佛
無嚴안채 밟아잡고
기대어 던진 막대를
다시 들 줄 모릅니다.”
32. 서석대 주변
33. 서석대에서 바라본 인왕봉과 북봉
34. 서석대 주변
36. 서석대
37. 중봉 가는 길
40. 서석대
눈꽃 터널 내려 임도 갈림길인 목교다. 꿈에 깬 듯 한동안 멍하다. 오른쪽으로 임도 따라 계속 가면 북봉(누에봉)에
가게 된다. 아벨 님이 그리로 간다 하고 동행자가 있으면 했으나 아무도 없다. 아벨 님 혼자 간다. 나는 북봉이 눈꽃
을 더 즐길 수는 있겠지만 중봉을 경유하는 것보다 산행거리가 짧고, 중봉 먼발치에서 눈 덮인 천왕봉과 지왕봉,
인왕봉의 연봉을 보고 싶어 중봉으로 간다. 중봉도 임도로 간다. 평전을 지나고 완만한 긴 오르막 한 피치가 중봉이다.
아까와는 또 다른 모습의 인왕봉을 본다. 장관이다. 그 밑자락은 눈이 녹았고 정상은 만년설이 쌓였다. 편백나무
숲 내려 헬기장 지나고 송신소, 그 다음은 천제당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니 수많은 봉봉이 군주인 무등산을 향하여
읍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도 덩달아 그 읍을 받기 황송하여 머리 조아린다. 천제당 내리면 사실상 아이맥스 영화는
끝난다. 하늘 가린 숲길 길게 내리면 임도가 나오고 늦재전망대다.
여기서 임도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구불구불한 임도로 이어져 원효광장 3.0km이고, 늦재로 가면 원효광장이 산길
가파른 내리막 0.7km 다음에 임도 1.7km이니 2.4km로 더 가깝다. 늦재전망대에서 들러 흐릿한 광주시내와 그 왼
쪽으로 올망졸망한 첩첩 산들 내려다보고 나서 소로 산길로 든다. 눈길이 가파르다. 0.7km짜리 슬로프이기도 하다.
그 끝은 임도와 만난 안부인 늦재다. 원효봉은 산길 직진한 0.9km다. 거기에 올라 무등산 정상 연봉을 또 보고 싶지
만 시간이 빠듯하다. 애써 참는다.
외길인 임도는 원효광장으로 이어진다. 아이젠을 벗으니 홀가분한 발걸음이다. 산모퉁이 길게 돌아내리면 원효사
다. 잠시 임도 벗어나 절집을 들른다. 원효사가 대찰이다. 원효사 마당에서 바라보는 무등산 인왕봉 연봉의 설경이
히말라야 설산 부럽지 않다. 원효팔경에 어쩌다 보게 될 서석귀운(瑞石歸雲, 서석대에 넘실거리는 뭉게구름의 모습)
은 있으면서 겨울 내내 보게 되는 이 인왕설경(仁王雪景)이 빠진 것은 아마 착오(?)이리라.
절집에 와서 주련을 살피지 않으면 절을 온 보람이 없다고 했다. 명부전(冥府殿)의 주련이다. 불가의 외인이어서일
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손바닥 위의 한 알의 영롱한 구슬
저절로 빛깔 따라 분별이 뚜렷하구나
몇 번이나 들어 보이며 친히 알려주려 했건만
어리석은 중생은 바깥만 내다보는구나
掌上明珠一顆寒
自然隨色辨來端
幾回提起親分付
闇室兒孫向外看
절집 나와 다시 임도로 들고 임도 옆 데크로드 따라 이슥 내리면 원효광장 주차장이다. 우리가 올 때인 한낮과는
전혀 다르게 주차장과 먹자거리가 썰렁하다. 먹자거리 음식점은 닭백숙이 대종이다. 혼밥으로 해물파전에 탁주 한
병 주문한다. 서울 가는 길. 흉몽대길(凶夢大吉)이라고 했다. 올 때의 흉몽은 근래 드문 대길인 산행으로 해몽했고,
갈 때의 야장몽다(夜長夢多) 엷은 졸음은 낮 동안에 눈부시게 화려했던 광경을 되새김한다.
41. 서석대와 인왕봉
42. 중봉 가는 길에 남서쪽 조망
43. 편백나무 숲
44. 가운데가 인왕봉
46. 중봉에서 남서쪽 조망
47. 천제당에서 바라본 인왕봉 연봉
48. 하산. 늦재 가는 길
49. 늦재전망대에서 바라본 광주시내(오른쪽)
50. 원효사에서 바라본 인왕봉 연봉
첫댓글 無等山: 無等=더할 나위 없이 . 최고 산인가 봅니다. 근거리 있는 산.늘 가고 싶지만 한번도 못 가본 산입니다.
한편 가보고 싶은 데가 있다는 건 희망이고 축복이기도 합니다.^^
@56이세진 무등산 사진이 너무 아름다워요. 남쪽이라 풍화작용으로 등선이 여성다워요. 선한 사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