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에 대한 엇갈린 평가
청주 한씨 한명회(韓明澮1415-87)는 1453년 세조(世祖)의 쿠데타를 주관하며 관직에 나가 죽을 때까지 영화를 누렸다. 딸을 8대 예종(睿宗)의 첫 왕비 장순왕후(章順王后1445-61)와 9대 성종(成宗)의 첫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1456-74)로 들여보냈으나 둘 다 후사 없이 스물도 못 살고 죽었다. `칠삭(七朔)둥이`로 태어나 자력으로 최고의 권력으로 올라간 그는 두뇌회전이 무지 빨랐고 도량이 넓고 공명정대했으며 국정 운영 능력이 탁월했다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면서도 비판자들에게는 관대했고 인사 처리도 공정했으며 아래 사람들의 충언에도 일체 보복은 안 했다고 한다. 이상은 그에 대한 긍정적(肯定的)인 평가다.
한명회의 말년
첫딸은 세종(世宗)의 서녀 정현옹주(貞顯翁主)의 며느리로 둘째딸은 신숙주(申叔舟1417-75)의 아들에게 셋째딸은 예종(睿宗)의 정비 장순왕후(章順王后1445-61)로 넷째딸은 성종(成宗)의 정비 공혜왕후(恭惠王后1456-74)로 보낸 한명회(韓明澮1415-87)는 평생 영화를 누렸지만 딸들은 모두 요절했다. 성종 14년 70세 때 그의 정자 압구정(狎鷗亭)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불러서 접대한 일로 탄핵(彈劾)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削奪)되었다. 1487년 병석에 눕자 성종이 내의를 보내기도 하면서 보살폈지만 음력 11월 14일 갑자기 사망했으니 향년 73세였다. 나중 1504년 연산군(燕山君)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폐비 윤씨를 보호하지 않았다며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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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역사에 길히 남을만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