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이 켜지는 시간
해가 지기 시작하면 세상은 조금씩 속삭이는 목소리로 바뀐다. 낮 동안 들판을 가득 채우던 빛은 서서히 옅어지고, 나무들은 긴 그림자를 땅 위에 드리운다. 사람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하루를 달리던 바람도 저녁이 되면 걸음을 늦춘다. 그 고요한 시간, 초가 처마 끝에 매달린 작은 등불 하나가 조용히 불을 밝힌다.
사진 속 풍경은 참 소박하다. 황토로 빚은 작은 집, 볏짚을 엮어 얹은 지붕, 비바람을 견뎌 온 나무 기둥, 그리고 처마 밑에서 은은한 빛을 품은 등불 하나. 화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이상하리만큼 마음은 오래 머문다. 아마도 사람은 오래전부터 빛보다 온기를 기억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등불은 세상을 환하게 밝히지 못한다. 도시의 가로등처럼 먼 곳까지 비추지도 못하고,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지도 않는다. 그저 처마 아래 작은 평상을 비추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의 발걸음을 맞아 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빛은 어둠을 모두 몰아내지는 못해도, 한 사람의 길은 충분히 밝혀 준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해 질 무렵이면 어머니는 대문 앞에 서서 멀리 골목을 바라보곤 하셨다.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눈빛에는 꾸중보다 안도가 먼저 담겨 있었다. 부엌에서는 저녁밥 짓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마당 한쪽에서는 아버지가 장작을 정리하셨다. 집집마다 창문에는 노란 불빛이 하나둘 켜졌고, 그 불빛은 “어서 오너라.” 하고 말없이 손짓하는 것 같았다.
그 시절의 등불은 전등이 아니었다. 기다림이었다. 돌아올 사람을 믿는 마음이었고, 늦어도 괜찮다는 용서였으며,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였다. 그래서 등불은 빛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을 데웠다. 요즘은 밤이 되어도 어둡지 않다.
도시는 수많은 LED 조명으로 낮보다 더 환해지기도 한다. 휴대전화 화면은 손안에서 하루 종일 빛을 내고, 자동차의 전조등은 쉼 없이 도로를 비춘다. 그러나 세상이 밝아질수록 마음속 어둠은 오히려 더 짙어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빛은 많아졌는데 기다려 주는 사람은 줄어들었고, 연락은 쉬워졌는데 마음을 나누는 시간은 짧아졌다.
그래서일까. 초가 처마 밑에 걸린 작은 등불 하나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등불은 조용하다. 자신을 드러내려 애쓰지 않는다. 다만 제자리를 지키며 필요한 만큼만 세상을 비춘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면 더욱 또렷한 빛을 낸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람의 삶을 닮았다. 큰 성공이나 화려한 박수를 받지 않아도, 누군가의 하루를 따뜻하게 밝혀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빛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안부를 묻는 한마디, 지친 사람에게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 말없이 곁을 지켜 주는 침묵, 먼저 내미는 손 하나에도 작은 등불은 켜진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횃불보다 이런 작은 불빛인지도 모른다. 시인들은 오래전부터 등불을 희망이라 불렀고, 종교는 등불을 믿음에 비유했으며, 철학자는 등불을 인간의 양심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등불을 기다림이라고 부르고 싶다. 돌아올 사람을 위해 꺼지지 않는 마음, 누군가를 위해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등불이 품고 있는 가장 따뜻한 의미가 아닐까.
어둠은 언제나 찾아온다. 계절에도 밤이 있고, 사람의 삶에도 긴 저녁이 있다. 그러나 어둠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어디선가 작은 불빛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빛은 화려하지 않아도 길을 잃지 않게 하고, 크지 않아도 마음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
해는 지고, 들판에는 저녁 안개가 내려앉는다. 초가 처마 끝에 매달린 등불은 오늘도 말없이 하루를 밝힌다. 누군가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견딘 위로가 된다. 작은 불빛 하나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일이라면 충분하다.
그래서 삶도 그런 등불 하나였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의 눈에 띄는 불빛이 아니라, 지친 누군가가 돌아와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불빛. 세상이 잠든 뒤에도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며 기다려 주는 불빛. 등불은 어둠을 이기기 위해 켜지는 것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빛은 가장 밝은 빛이 아니라, 가장 오래 기다려 주는 빛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