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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편지와 나의 어린이 시절의 이야기” 개포동 사랑의 빛교회(2018.2.18) 시 23:1-6 제가 2008년 1월 13일 28년 동안 개척해서 목회하던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다음 지난 10년 1개월 동안 매 주일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며 설교를 하고 있는데, 2016년 11월 27일 주일 여기 개포동 사랑의 빛 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어떻게 살 것인가? 범사에 감사하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그 다음 주일인 12월 4일 주일 두 번째로 와서 “어떻게 살 것인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7년 12월 24일 주일 세 번째로 와서 "성탄의 기쁨과 슬픔과 사랑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18년 2월 18일 주일 여기 네 번째로 와서 “어머니의 편지와 나의 어린이 시절의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신상문 목사님이 저의 어머니의 편지에 대한 이야기와 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년 3개월 동안에 4번 와서 설교하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저는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는데 거의 대부분 담임 목사님들이 부탁하는 제목과 내용의 설교를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곤 합니다. 첫째로, 저의 어머니의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편지를 써서 주고 받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의미 있는 인생은 친밀한 교제와 진솔한 소통과 편지라고 말합니다. 사실 성경은 주로 편지로 되어있습니다. 저는 친밀한 교제와 진솔한 소통을 아주 귀중하게 여기면서 살아오고 있는데 제가 교회 어린이들과 성도들과 선교사들과 그리고 이런 저런 사람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이 일만 통이 넘는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셨습니다. 저 없이는 못산다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습니다. 제가 11살 때 평양 사동탄광에서 죄수로 복역하시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을 찾아가서 “여기서는 주일을 성수하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남쪽으로 가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가 “그러면 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같은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우시면서 그러면 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시던 맏아들을 잃는 희생적인 슬픔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저는 1948년 8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캄캄한 밤에 38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에 도착해서부터 평생 고아와 나그네로 슬프고 외로운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저의 삶을 너무 많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서울 중학교 서울 고등학교 서울 대학교를 졸업한 후 1년 동안 총회신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슬프게 이별한 후 16년이 지난 1964년 가을 어느 날 제가 공부하고 있던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어머니로부터 편지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제가 홍콩을 통해서 어머니에게 편지 한 장과 저의 사진 두 장을 북한으로 띄워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저의 편지와 사진을 받아 보시고 감격에 겨운 글을 써서 홍콩을 통해 저에게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혼자 조용한 곳으로 가서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머니가 직접 써서 보낸 편지였습니다. 어머니의 글씨체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어머니가 이응 자(ㅇ)를 항상 크게 쓰므로 제가 어머니의 글씨를 흉내 내어 이응 자를 크게 쓰곤 하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어머니의 편지구나! 어머니의 편지는 편지라기보다는 절규였습니다. 한자 한자에 어머니의 피 맺힌 사랑이 깊고 진하게 배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피 맺힌 사랑의 절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 아들 명혁에게 9월 5일 네의 편지와 동시에 외로히 자라 성인이 된 내 아들 명혁이에 얼굴을 더구나 훌륭하게 된 내 아들을... 나는 보고 십고나. 손이라도 한번 꽉 쥐어 보고 십고나. 이 내 기쁨을 지면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명혁아! 나는 네 말 그대로 오래 오래 살아서 내 사랑하는 아들 만날 날을 기다리겟다. 몽중엔들 이저스랴 내 명혁이. 부디 건강하기를 축원하면서. 어머니 글 9월 29일” 너무나 짧은 절규였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말하고 싶어도 다 말할 수 없는 그 짧은 사연가운데 혈육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아픔과 기쁨과 슬픔과 안타까움과 소원과 간구가 다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후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고 어머니도 다시 저에게 동생들의 소식을 알리는 편지 한 장을 써서 보내왔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어머니의 편지를 성경책 속에 넣고 읽으면서 어머니를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편지를 복사하여 한국에 있는 할머니와 이모님들을 비롯한 여러 친척들에게 한 장씩 보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앙정보부에서 집집을 찾아와서 편지 사본들을 모두 압수해 갔다고 했습니다. 제가 귀국한 후 제가 가지고 있던 편지 원본도 나중에 중앙정보부에서 빼앗아갔습니다. 어머니의 편지를 압수당한 지 20여 년이 지난 1997년 1월 5일 어머니의 편지 사본 한 장을 이모님으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30여 년 전의 감격이 되 살아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그 편지 사본을 성경책 속에 넣고 다니면서 보곤 하고 사본 한 장은 저의 사무실 벽에 부쳐두고 보곤 합니다. 저는 20여 년 만에 다시 읽게 된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어머니의 피 맺힌 사랑을 다시금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부르면서 북녘 하늘을 향해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편지가 국민일보에 실리게 되었는데 아마 북녘 하늘에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부르고 또 불러도 못다 부를 그 이름,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부르고 또 불러도 좋고 또 좋은 그 이름,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의 편지 원본을 압수 당한지 20여 년 만에 편지 편지 사본을 받아서 읽고 또 읽고, 그리고 5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어머니의 예쁜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나는 어머니를 부르고 또 불러 보았습니다. 아,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는 너무나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의 애절한 절규를 한 마디 한 마디 다시 들으면서 어머니의 가슴에 피 맺힌 아픔과 슬픔을 가슴으로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셨고 너무나 사랑하시다가 나중에는 나를 남쪽으로 떠나 보내시는 가장 큰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맏아들을 스스로 잃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스스로 가장 큰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로 하여금 가장 큰 희생을 치르며 가장 큰 아픔과 슬픔을 안게 한 나의 불효를 무엇으로 갚아 드릴 수가 있사옵니까? 어머니, 나의 불효를 책하시고 또 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는 어머니에게 얼굴 한번 보여 드리지 못했고, 그렇게도 잡아보고 싶어하시는 손 한번 쥐어 드리지 못한 채 20여 년이 지났고 30여 년이 지났으며 이제는 50여 년이 지났습니다. 이 몹쓸 불효 자식을 책하시고 또 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철도 없이 어머니를 훌쩍 떠나 남쪽으로 온 다음 한 2년 동안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남 몰래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물론 이모님들이 나를 잘 보살펴 주셨지만 나는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도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나는 부족함이 없는 한 생애를 살아 왔습니다. 아니 너무나 넉넉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에게 조그마한 위로와 기쁨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바로 예배하고 싶은 단 한가지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를 떠나 남쪽으로 온 저를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많이 사랑하셨고 너무나 많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마음껏 공부도 할 수 있게 해 주셨고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길 수도 있게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 나는 병원에 가는 것도 잘 모를 정도로 건강하게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행복한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지만 특히 북한동포 돕기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팔순이 훨씬 지나신 어머니께서 지금 살아 계시다면 나는 어머니를 마음껏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몸도 씻어 드리고 싶고, 음식도 대접해 드리고 싶고, 그리고 어머니의 품 안에서 함께 잠도 자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지금 하늘 나라에 계시다면 먼저 순교하신 아버지를 뵈올 터이니 어머니의 슬픔을 거두시고 위로와 기쁨을 아버지와 함께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요사이 나는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많이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처음 드려보는 기도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어머니 뵈올 날을 날마다 기다리겠습니다. 먼저 천국에 간 어머님의 손자인 나의 사랑하는 아들 철원이, 나를 늘 칭찬해 주시면서 나에게 신앙의 뿌리를 심어 주신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누구보다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 주신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뵈올 날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바르고 진실하게 살아가겠습니다. 어머니가 진실하게 사는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위로하시고 축복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1997년 1월 12일 불효자식 명혁 올림.” 둘째로, 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저는 11살 때까지 북한에서 살았는데 제가 월남한지 2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전후에 저의 아버지는 김관주 목사님은 김화식 목사님 등과 함께 순교하셨습니다. 저는 믿음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으로부터 순교 신앙을 물려 받을 수 있었고 사랑의 어머니로부터는 희생적인 사랑의 유산을 물려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선 저의 유아 시절과 유년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저는 유아 시절과 유년 시절을 주로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살았습니다. 저의 아버지인 김관주 목사님이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의 부목사님으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님으로 9년 동안 목회하셨기 때문이었다. 저는 1살 때부터 9살 때까지 신의주에서 살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제가 한 살 때부터 저를 안아주시곤 했는데 제가 평생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은 것은 너무나 큰 은혜요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장난꾸러기였습니다. 신의주에서 살던 유아 및 유년 시절에 동네 친구들과 이곳 저곳으로 놀러 다니면서 심한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중국 사람들이 가꾸던 토마토 밭에 들어가서 몰래 토마토를 따서 먹기도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길가에 조그만 웅덩이를 파고 웅덩이를 종이와 흙으로 덮은 다음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웅덩이에 빠지는 것을 보고는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썰매를 티고 쇠통에 담은 숯불을 쇠줄에 매달아 휘두르며 친구들과 이곳 저곳으로 몰려 다니면서 신나게 놀기도 했고, 여름에는 친구들과 함께 압록강에 들어가가서 미역감고 물 장난을 치면서 즐겁게 놀기도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교회당(신의주 제이교회) 지붕 위와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서 놀다가 대변이 마렵다고 하면 대변을 종이에 담아서 멀리 던져 남의 집 지붕 위에 떨어지게 하는 못된 장난까지 쳤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놀기를 좋아했고 장난 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를 꾸짖거나 야단을 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좀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손자들이 저의 장난꾸러기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둘째 손자 수혁이는 세상에 장난꾸러기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이고 다른 하나는 외할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엄마한테 야단을 맞지 않아서 너무 좋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저는 심한 장난을 치면서도 신앙생활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유치부 시절 어느 성탄절에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성극을 공연하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그때 받은 감동을 평생 지니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박사인 알타반 박사에 대한 성극이었습니다. 동방에서 떠난 네 번째 박사는 세 박사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를 향해 말을 타고 달려가던 중 길가에 쓸어져서 죽어가던 병자 하나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므로 세 박사들을 약속 장소에서 만나지 못했고 결국 베들레헴에 늦게 도착해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도 경배하지도 못했다는 서글픈 이야기였습니다.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보물 하나는 병자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베들레헴 어느 집의 아기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려고 하는 것을 살리기 위해서 써 버렸습니다. 그 후 알타반 박사는 평생 메시야를 만나 경배하기 위해 애굽으로 이곳 저곳으로 찾아 다녔지만 메시야를 만나지 못했다는 서글픈 내용의 상극이었습니다. 자기가 지니고 있던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거의 다 써 버렸습니다. 30여년이 지난 후 백발의 노인이 된 알타반 박사는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거리의 군중들 사이에 끼어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예로 팔리기 위해 군인들에게 잡혀서 끌려가던 한 소녀가 알타반 박사를 향해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하나 남은 보물을 그 소녀에게 주므로 그 소녀를 구해주었습니다. 서글픈 이야기였고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유치부 어린이였던 저에게 깊은 감동을 준 장면은 성극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빈 손으로 서글픈 마음으로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던 백발의 노인이 된 알타반 박사가 지진으로 인해 돌무더기에 뒤 덮여서 죽어가면서 들은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이었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너는 나를 만났느니라. 네가 준비했던 보물들은 내가 모두 받았느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니라” 유치부 어린 시절 제가 들은 “알타반아! 알타반아!” 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결국 목회자가 된 후에도 저는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교회에서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받은 감동과 은혜는 평생 지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주에 있을 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일제 시대와 공산주의 시대에 자주 감옥에 투옥되어 감옥 생활을 하셨는데 신의주에 있을 때 저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갇혀 있던 감옥을 자주 찾아가서 감옥 담장 밖에서 목청을 돋아서 노래를 부르며 “아버지이… 아버지이…!” 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그때 제가 자주 부르던 노래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였습니다. 저는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봄으로 순교신앙을 몸으로 느끼며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저에게 잔소리는 고사하고 타이르는 말씀도 별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저를 칭찬해 주시고 격려하신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의주와 평양에서 저의 아버지의 목회의 삶과 고난의 삶을 바라보면서 새벽기도와 주일성수와 순교신앙의 유산을 제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체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립니다. 저는 신의주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장난꾸러기였지만 공부는 언제나 잘했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가 공부 잘 하라고 잔 소리를 하신 적은 거의 없었다고 기억됩니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모든 것을 제가 스스로 하도록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발적으로 또는 창의적으로 무엇을 하곤 했습니다. 좀 심한 장난도 쳤지만 저는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을 생각하면서 그런 일을 찾아서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저를 칭찬하시곤 했습니다. 결국 저는 공부도 잘 했고 놀기도 잘 했고 글도 잘 썼는데 글을 잘 쓴다고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해서 2학년에서 4학년으로 월반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유년 시절에 때때로 안주에 있는 친할머니 댁에 가곤 했는데 한 번은 산에 올라가서 신나게 놀다가 늑대 같은 짐승이 나타나서 소리를 지르면서 나에게 달려와서 저는 높은 산에서 도망쳐 굴러서 내려오다가 몸에 상처를 입은 일도 있었습니다. 친 할머니는 기도와 예배와 전도에 전념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저는 수요일 밤에 할머니의 손을 잡고 먼 논길과 밭 길을 걸어가서 예배 드리고 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할머니는 주일날 농사 일을 절대로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서 기도에 전념하시기도 했습니다. 할머니의 신앙으로 남편인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어 영수가 되었고 두 아들이 목사가 되었고 한 아들이 장로가 되었는데 맏아들인 저의 아버지께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오늘의 나의 나 된 것이 우연히 그저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친 할머니의 신앙의 유산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친 할머니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감사를 드립니다. 한 번은 박천에 있는 외 할머니 댁에 가서 지내면서 심한 장난을 친 일이 있었습니다. 외 할머니와 아모와 삼촌이 저를 아주 예뻐해서 저는 때때로 심한 장난을 치곤 했는데 성냥을 가지고 뒷 산에 올라가서 나무에 불을 붙이는 불 장난까지 쳤습니다. 나무에 불이 잘 붙지 않아서 할머니 집 마당에 쌓아놓은 옥수수 나무 무더기에 불을 붙인 일이 있었습니다. 마른 옥수수 나무 무더기에 불이 너무 잘 타서 저는 아주 좋아했는데 할머니가 그것을 바라보면서 며느리를 불러서 야단을 쳤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그저 가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불을 놓았다고 고백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습니다. 저에게는 어릴 때부터 이런 못된 기질이 있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47년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 신의주 제이 교회를 사임하시고 평양 서문밖 교회로 부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산주의 정부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강량욱 목사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감옥에 투옥되셨습니다. 처음에는 평양 감옥에서 감옥생활을 하시다가 나중에는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탄광에 투옥되어 중노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아버지를 면회하러 어머니와 함께 사동탄광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남루한 죄수 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 뵈온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은은하게 받았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말이 아닌 삶으로 전수받았습니다. 제가 평양 제5인민학교를 다닐 때 주일성수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유도 바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감화와 교훈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더욱 더 열심히 했습니다. 평양은 바로 최봉석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께서 1944년 4월에 순교하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에게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 신앙의 씨앗을 심어주신 분들이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저는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주일성수와 새벽기도를 철저히 했고 순교신앙을 귀중한 신앙으로 이어받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선생님들이 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유리창을 닦으며 청소를 하라고 하면 청소를 했고, 새벽 기도를 하라고 하면 새벽 기도를 했고, 주일날 공부를 하지 말고 물건이나 음식을 사지 말라고 하면 공부도 하지 않고 물건이나 음식도 사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평양 제 오 인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하라는 명령을 매주 받았지만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섰고 때로는 정학을 받았지만 주일날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학교 오후 예배 시간에 누구든지 기도하라고 하면 제일 먼저 제가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주일저녁 어른 예배시간에 때때로 제가 나가서 “간증” 또는 “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저를 가장 많이 사랑했지만 저에게 잔소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공부를 잘 하라고 타이르는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 평양에서도 저는 공부도 잘했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저를 믿고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신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깊은 사랑과 존경을 표합니다. 잔소리보다는 순수한 사랑과 격려가 그 무엇보다 귀하다는 것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자란 어린이들은 자발성이나 창의성보다는 짜증과 불쾌캄을 지니고 소극적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바로 드리면서 살기 위해 11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북에 남겨 두고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는데 제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저를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이루어진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제가 평양을 떠나기 전에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주일을 바로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 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를 너무 사랑하시면서 저 없이는 못 살겠다고 늘 말씀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저의 자발적이고 모험적인 기질을 잘 아시는 어머니께서 제가 떠나기 전 저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시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믿고 저를 멀리 떠나 보내시는 슬픔과 아픔을 지니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립니다. 저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평양을 떠나 기차를 타고 해주로 오면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지니면서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미지의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면서 저의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습니다. 해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 날 밤 어른들 5,6명과 함께 38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안내원을 따라서 조용 조용히 국경을 넘다가 우리 일행은 국경경비 군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일행을 향해서 모두 손을 들고 서라고 명령했습니다.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가 없었다. 국경을 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바로 예배 드리기 위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손을 들고 설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남쪽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언덕을 넘고 긴 파 밭을 달리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면서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파 밭을 지날 때 파 들이 꺾어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아마 40여분 동안 달린 후 저는 남 조선에 무사히 도착했다.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은 사건은 그후 저의 평생의 삶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 없이 모험적으로 뚫고 나아가는 삶이 저의 삶의 모습이 된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어떤 삶을 사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쪽에 와서 어느 작은 초가집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지난 밤에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젊은이가 저에게 다가 오더니 어디 가냐고 물었다. 서울로 간다고 했더니 어떻게 누구하고 가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같이 오던 어른들이 모두 잡혀서 어떻게 서울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저를 서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청년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왔습니다. 서울 역에 도착했을 때 저는 화려한 도시 모습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청년의 친절한 안내로 해주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서울역에서 서울 중구 회현동 2가 45번지까지 무사히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년 전부터 서울에 와서 사시던 이모님의 집이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주머니에 넣고 온 것은 이모님의 주소 한 장뿐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모님을 반갑게 만나게 되었고 이모님 집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서울에서의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후에 저를 서울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준 그 청년을 찾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애를 썼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을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내주신 “천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지만 처음 2년 동안 저는 밤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마음껏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주일에는 영락교회에 가서 종일 예배를 드렸고 주중에도 모든 예배에 참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주일성수는 계속해서 철저하게 했습니다.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 반가웠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평생 부족한 저를 사랑으로 품어주신 귀한 스승이셨습니다. 신의주 제이교회 출신인 김익순 장로님도 저를 따뜻하게 만나주시고 대해주셨습니다. 저는 서울에 와서 방산국민학교 5학년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공부했는데 저는 공부도 운동도 잘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는 제가 이북 사투리를 한다고 반 친구들의 놀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친구가 저를 계속해서 놀려서 제가 그 친구에게 학교 뒷마당에 가서 나하고 싸움을 하자고 했습니다. 결국 반 친구들이 학교 뒷마당에 모였습니다. 반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때려 눕혔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 후부터 그 친구는 저를 놀리지 않았고 반 친구들은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운동도 싸움도 공부도 제가 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반에서 두 명씩 뽑아서 남산에 가서 과학 경연대회를 한 일이 있었는데 제가 뽑혀서 간 일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평생 신앙생활이 첫째이고 공부는 둘째였는데 저는 공부도 잘 해서 그 당시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던 서울중학교에 어렵지 않게 합격했습니다. 저는 서울중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도 잘 했고 엉뚱한 짓도 잘 했습니다. 어느 날 국어 선생님이 저를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은진 미륵같이 생긴 놈이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나를 책망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들었고 특히 김원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일찍 일어나서 깨끗하게 부지런하게 책임 지키며 살라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평생 노력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저의 삶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원규 교장 선생님이 초청해서 말씀을 전하게 하신 변영태 교수님(후에 총리)의 말씀을 들었는데 변영태 교수님은 절약하면서 검소하게 살고 운동을 하면서 건강하게 살라고 권면했는데 치약도 절약해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본래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터라 그렇게 살려고 평생 힘썼는데 저는 지금도 양치할 때 치약을 절약해서 조금씩 사용합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엉뚱한 일을 하나 한 일이 있었습니다. 중구청에 가서 주민등록을 하는데 구청 직원이 저보고 “본”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본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얼떨결에 제 “본”이 “남양”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평양에 있을 때 남양 군도에 살던 토인들이 등장하는 만화를 아주 좋아했는데 갑자기 남양군도가 생각나서 저의 본이 “남양” 이라고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 본은 “김해”인데 저는 평생 “남양” 김씨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합동신학대학에서 “은퇴 기념논총”을 나에게 증정할 때 “남양 김명혁 목사 은퇴 기념논총” 이라는 제목을 사용했습니다. 제 딸은 “남양” 김씨 가문이 자기 대에서 끊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월남한지 2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인민군들이 탱크를 타고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미국 비행기 B29의 폭격도 눈 앞에서 목격했습니다. 제가 들어갈 수도 있었던 방공호가 폭격으로 인해 무너진 것을 목격하기도 했고 폭격으로 인해 사람들이 길가에 쓸어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전쟁의 불행과 비극을 직접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서울을 떠나 피난민 대열에 끼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모부님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 사장님의 봉고차를 함께 타고 사장님 가족과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부산까지 내려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차를 타고 또는 걷기도 하며 힘들게 피난을 가는데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편하게 갔으니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산까지 내려가는 길에서도 폭탄이 터지고 길가에 쓸어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전쟁은 불행한 것이고 비극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부산에서 몇 달 동안 피난 생활을 하다가 우리는 대구로 옮겨와서 3년 동안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셋방 하나를 얻고 한 방에서 불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모님이 시장에 나가서 옷감 장사를 하며 돈을 잘 벌어서 차츰 어려움이 없는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일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정성껏 드렸고 봉사와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새벽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습니다. 셋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교회에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는 방법을 알아내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고 교회에 가서 마음껏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처음에는 대구제일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 때 어린이 사역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안성진 목사님이 어린이 사역을 담당하시고 어린이 사역에 관한 모임도 주관하셨는데 저는 그 때부터 안싱전 목사님을 평생 사랑하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여러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때 대구에는 SB(Sister/Brother) 즉 누나 동생을 맺는 것이 유행했는데 대구제일교회에 다니던 누나뻘 되는 주명숙이라는 고등학생이 저하고 누나 동생을 하자고 했습니다. 저를 귀엽게 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주명숙 누나는 그 때 내가 다니던 영남중학교 교장인 주덕근 교장 선생님의 딸이었습니다. 저는 누나와 친하게 지냈는데 저를 누나 집에 데려가서 음식도 해 주고 선물도 주고 내 손수건도 빨아주었습니다. 저는 그 때 사과 껍질을 깎는 법을 누나에게서 배웠습니다. 즉 칼로 사과를 톡 친 다음 껍질을 깎는 법을 배웠는데 저는 지금도 그렇게 사과 껍질을 깎곤 합니다. 제가 대구에서 잊지 못할 귀중한 추억은 한국의 무디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을 만난 일이었고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서 깊은 은혜와 감동을 받은 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몇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저는 빠지지 않고 거의 매번 부흥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그 때는 부흥회가 월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개학 때는 새벽과 저녁 집회만 참석했지만 방학 때는 오전 집회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아무도 저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에 제가 스스로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언제나 신앙생활이 첫째였고 공부는 둘째였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 새벽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셨고 오전과 저녁 집회 때는 은혜 사모와 성결과 헌신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천로역정 강의는 너무너무 재미있었고 은혜로웠습니다. 때때로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 되구나...” 허사가를 부르시곤 했는데 목소리가 너무 좋았고 감동도 충만했습니다. 성경 아무데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면 저는 성경을 찾지도 않고 암송해서 읽곤 했습니다.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는 말씀들을 제가 거의 다 알고 있었고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던 말씀 중의 하나는 시50:15이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했고 토요일 새벽에는 안수 기도를 받았습니다.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후에는 묻지도 않으시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 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12번은 안수 기도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었고 축복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삶이 너무너무 귀중한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래서 평생 회개를 힘쓰면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을 너무너무 존경하게 되었고 결국 2000년 5월 1일 신촌성결교회에서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이란 제목으로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 강의”를 하게도 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였습니다. 어린이 시절의 이야기를 다 하려면 시간이 부족해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청년 시절의 이야기와 장년 시절의 이야기와 노년 시절의 이야기를 다 하려면 시간이 부족해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평생토록 부족한 죄인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얼마나 많은지 다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고백한 고백 한 마디를 인용함으로 오늘 “어머니의 편지와 나의 어린이 시절의 이야기” 를 마무리 합니다. 시 139:17,18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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