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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우리마을에 양복·양장점, 미용실, 자전거포, 방앗간, 정미소, 약국이 성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때야말로 마을 역사 근래 50년 이내로 초포가 가장 번성했던 시절이 아닌가 한다.
그 당시 주막거리는 노성면(하도리, 두사리, 사월리), 부적(오산, 숙진, 솔뫼, 부황, 연산, 마구평), 광석면(천동, 장호, 왕전, 항월) 사람들이 드나들던 교통로이자 요즘으로 치면 물류의 중심지였다.
이런 변화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고 초포가 가지는 인문, 지리적 전통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후기 초포는 은진-연산과 노성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물론 이 교통로는 해남-영암-여산-강경에서 넘어온 호남의 물류를 공주-연기 등 충청 지역으로 연결하는 한 구간으로서 기능을 했다.
조선 후기에 마을엔 ‘포’(浦)라는 나루터가 있어, 물류, 장터, 물자 수송, 조운(漕運) 등 일부 ‘진’(津)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물길은 논산대교-아호리 인근 은진(恩津)의 나루와 합류한 후 강경-서해로 이동했을 것이다.
조선 중기 이수광이 은진객사에 머물며 주변 풍물을 읊은 ‘기제은진객사차운’(寄題恩津客舍次韻)에 보면 ‘官橋舸艦日迷津’(관교 사이로 배들이 날마다 나루터에 정신없이 나들고)라는 구절이 보인다. 은진은 지금의 아호리~논산대교 일대로 이 구절에 의하면 당시 노성천이 충남 내륙 물자, 세곡선(稅穀船)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충남 내륙의 한 거점이었던 초포 주막거리로는 각지에서 온 상인, 일꾼, 아전, 여행객들이 모여들었을 것이고, 이들을 수용했던 초포원(草浦院)은 일종의 ‘국립 호텔’로 기능했다.
이 길을 따라 공주 우금치로 향하던 동학농민들이 노성천에서 야영을 하고, 남원에서 과거를 치러 올라가던 이몽룡이 주막 술 한잔에 시름을 달랬을 것이다. 제주-해남-영암에서 서울로 압송되던 하멜(Hendrik Hamel, 하멜 표류기의 저자)이 고단한 몸을 누이고, 640km 백의종군 길 충무공이 한천(漢川)가를 거닐며 불면의 밤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 다시 주막거리로 돌아와서, 1970년대 주막거리는 늘 사람들로 붐볐다. 꺼먹돼지(黑豚)나온다는 논산장이나 막걸리 맛이 기막히다는 연산장 만큼은 아니지만. 약국, 방앗간, 미용실 손님에 자전거 고치러 온 사람들이 늘 넘쳐났다.
어릴 적 주막거리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신나는 ‘윷판’이다. 마당 한복판에 큰 멍석을 깔아놓고 수십 명이 모여서 버리는 윷판은 그 자체로 작은 축제이자 퍼포먼스였다.
보통 막걸리 내기를 하는데, 원래 내기가 걸리면 자리는 더 소란스러운 법이다. 특히 말판을 놓고 ‘업어서 방워라’ ‘그러면 잡힌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곤 했다.
윷판하면 쌩구(박상구) 어르신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포마드 머리에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자칭 ‘청량리윷’을 폼나게 날리곤 하셨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던지.
담배를 비스듬히 물고 마당을 휘젓던 김만수 어르신의 윷판 카리스마도 우리 어린 눈엔 거의 연예인 급으로 비처졌다. 여기에 이웃 마을의 우식이, 홍출이 형님이 가세하면 윷판은 마을 대항으로 발전하곤 했다.
이젠 다들 돌아가셔서 이렇게 글에만 언급되고 인구(人口)에 회자될 뿐이지만 그 시절 그 추억을 그대로 살아 숨쉼을 느낀다.
#. 다마치기, 자치기, 짱구치기, 오징어가생, 사방치기, 바캉스, 오재미, 연날리기, 숨바꼭질, 깡통차기, 솜방망이(천렵), 삘록새(종달새) 알줍기, 밀사리, 보리똥 따먹기, 복상서리, 참오(참외)서리...
어린 시절 산, 들, 강 자연은 우리들의 놀이터이자 자연 학습장이었다.
동네에서 지겨움을 잘 참지 못했던 우리는 무슨 일이든 벌리며 무언가 작당(作黨)을 했다. 사계절 지겨울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놀이, 장난들이 손만 뻗으면 닿을거리에 있었다.
청산가리(싸이나)로 꿩을 잡아먹던 아찔한 순간(독극물 중독)이나 장난과 절도 사이의 위험한 경계에서 벌어진 일들도 있었지만 큰 사고나 시비로 확대되는 일은 없었다. 당시는 다들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주막거리는 이런 놀이의 집합소이자 경연장이었다. 요즘 TV에서 전국에서 전통놀이 시연, 재현행사들이 유행을 하고 있다. 우리 눈엔 다들 한 번씩 해본 것들이어서 익숙하고 시시하게 느껴지곤 한다. 우리가 더 재밌게 놀았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지금도 유순이(1959년) 누님이 고무줄놀이 중에 압도적인 피지컬과 카리스마로 물구나무선 채로 발에 고무줄을 걸어 채던 장면은 서커스 못지않은 묘기였다.
그때 고무줄놀이를 할 때 미희(1965)가 부르던 노래도 생생한데 한 번 옮겨보려고 한다. “뽕아, 뽕아 서울역에서, 시집간 뽕아언니 방구를 껴서, 옆에 있는 벌금자리 깜짝 놀라서, 시집살이 복잡하구나.”
뜻도 모르고 의미도 잘 전달되지 않는 구전가요였지만 놀이 동요 자체로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 앞에 열거한 대부분 놀이는 옆 동네, 앞 동네에서도 다들 벌어졌던 것 같은데 우리 동네에서만 행해졌던 놀이가 있었는데 바로 ‘찾기장난’ ‘찾기 놀이’ 였다.
게임 법칙은 숨바꼭질하고 비슷한데 원리는 이렇다. 5~6명이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이 숨으면 잠시 후에 나머지 한쪽에 숨은 팀을 찾는 게임이다. ‘주막거리 손바닥만 한데서 숨을 때가 어디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가로등도 없던 시절 헛간이나 변소로만 깊이 숨어도 찾는데 애를 먹기 일쑤였다.
이때 숨은 팀을 쉽게 찾는 비법이 있었으니 바로 ‘웃음작전’ 이었다. 상대팀이 숨었을만한 곳에서 술래팀은 일종의 ‘개그 콘서트’를 벌이기 시작한다.
필구(1958) 형님이 나서 “썩은 계란을 먹었더니 방구가 자꾸 나오네” 하며 3연사 가스를 난사하면 헛간 뒤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술래를 덮치는 식이었다. 임 약국집 장남 정순이(1964)가 웃음포인트가 특히 낮았다. 보통은 조크를 날리기도 전에 웃음보가 터져 승부가 너무 쉽게 가려지기 때문에 정순이는 언제나 기피인물 1호였다. 반대로 잘 웃기고, 연기를 잘하는 아이는 늘 에이스 대접을 받았다.
이렇게 사시사철 밤낮으로 동심을 일깨우던 놀이문화를 한 방에 걷어낸 물건이 있었으니 바로 TV였다. 1970년대 TV가 들어오면서 주막거리 밤에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은 ‘여로’ ‘수사반장’ ‘웃으면 복이 와요’ 등에 몰입하며 주막거리 발길을 끊었다.
TV는 동심 파괴의 주범이었지만 대신 TV는 자연에서 얻을 수 없는 무형의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 어릴 때 어릴적 형(兄)밖에 없었던 나에게 외로움은 숙명이었다. 그래서 인지 ‘소속 의식’이나 ‘집단 의지’는 희박한 편이다.
이런 ‘삐딱이’ ‘이방인’도 이날만큼은 애향 의식으로 활활 타오르던 때가 있었으니, 바로 가을운동회 ‘마을대항 달리기’ 때였다.
전체 학생을 청백팀으로 나눠서 달리던 ‘청백계주’도 재미있지만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부락 대항’이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중반, 우리마을엔 달리기의 ‘전설’들이 화려한 라인업을 뽐내고 있었다.
윤여송, 황태일을 투톱으로 하고 김권중이 뒤를 받친 드림팀은 당시 무적(無敵)의 조합이었다.
여성 선수들 면면도 만만치 않았다. 그 당시 상명이(1961) 누님은 첫 주자가 넘겨준 1위 라인을 굳건히 지켜주었고, 영자(1962) 누님도 중간에서 흔들림 없이 선두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내 기억으로 당시 선발은 황태일, 2선발은 김권중, 최종 주자는 윤여송, 대충 이런 라인업이었다.
이 형님들은 건각(健脚)도 건각이지만 승부욕이 대단해서 운동장에선 마치 야생마처럼 질주하곤 했다.
특히 마지막 바퀴에서 극적인 역전극을 펼칠 때면 풋개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함께 기쁨을 나누곤 했다.
풋개의 ‘쿨가이’ 필자도 트랙 밖에서 펄쩍펄쩍 뛰며 소리를 질러 댔으니...
‘스포츠가 국민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말도 때론 공감을 얻지만, 마을 대항 계주(繼走)가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만큼은 아닌 것 같다.
이 열기는 이어 벌어진 ‘마을대항 학부모 이어 달리기’로 연결됐다. 학생들 1위는 보통 그 마을 학부모 1위로 연결되었는데, 마을 1등을 배출한 어머니들은 이미 자신들도 1등 DNA를 보유한 우월한 유전자 유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치마 밑동을 움켜쥐고 바람처럼 달리던 ‘숙이 엄마’와 막판 뒷심을 발휘해 역전극을 펼치던 ‘천수 엄마’의 화려한 질주 장면이 눈앞에 선하다.
세월이 지나 그분들의 안부를 잘 알 수는 없으나, 언제 뵙게 되면 막걸리 한 잔 올리며 꼭 한마디 전하고 싶다. “그 시절 어머니는 우리에게 ‘백마 탄 잔다르크’보다 더 멋지셨다고.”
#. 주막거리에도 각 도시에 있는 문화예술회관 같은 공간이 있었으니 바로 대구(1956) 형님 이발소였다. 5~6평 남짓한 공간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같은 액자가 두어 개 걸리고 금성카세트레코더에서는 하루 종일 음악이 흘러나왔다.
동네에서 장기나 바둑 깨나 둔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발소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요즘으로 치면 화랑, 기원, 다방, 이발소가 한 공간에 있었던 셈이다.
그림 액자 귀퉁이엔 싯구가 붙어 있었는데 기억해서 옮기면 이렇다. ‘못 보면 보고 싶어 애가 마르고, 만나면 할 말 없어 애가 마르고’ 15세 남짓 동심에 이 글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았던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카세트 테이프의 음악은 전축과 LP판을 많이 가지고 있던 여송(1961) 형이 복사해 날랐다. 공(空) 테이프에 히트곡만 수록한 일종의 ‘옴니버스 앨범’인데 당시 이 테이프는 당시 최신 곡들이 망라돼 일종의 ‘주막거리 차트’를 형성했다.
이 테이프를 통해서 우린 케니 로저스의 ‘카워드 오브 컨트리’(Coward of the Country) 밥 시거의 ‘파이어 레이크’(Fire Lake), ‘Don't Let Me Be Misunderstood’(니나 시몬) 같은 명곡을 접했다.
우리들이 무심코 따라 불렀던 ‘아! 아! 아! 아! 쌔들라’가 사실은 비지스의 ‘Stayin' Alive’ 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 난 ‘사랑과 평화’ 앨범을 통해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락 버전)을 접했는데 그 멜로디는 내 머릿속을 강하게 휘저어 놓고 빠져나가질 않았다. 40이 넘을 때까지 내 음악을 지배했던 그 곡을 차이콥스키 ‘비창’으로만 알고 있었다.
청소년기 우리는 이발소를 드나들며 우린 많은 문화, 감성을 충전(充電)할 수 있었고 이 기억은 평생 우리를 그 공간 속에 가두어 두지만 그 구속조차 감미롭게 느껴진다. 자신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했다는 사실을 대구 형님을 아실까?
#.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광석면민 여러분, 그리고 부적면민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밤 7시, 풋개다리에서 콩쿨대회를 개최하오니 많이 많이 참석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어릴 적 내가 받았던 문화 충격 중 가장 ‘쎈 놈’을 하나 고르라면 난 회다리 옆 데보뚝(제방)에서 열렸던 콩쿨대회를 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다끄시(taxi)나 도라꾸(truck)가 오면 매연 냄새를 맡으려 뛰어나갈 때에도, 도순이 형님 앞마당에서 반공 영화를 틀어줄 때도 콩쿨대회처럼 임팩트가 강하지는 않았다.
우선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라이브 무대의 현장감과 감동이었다. 가을밤 연산네를 휘젓고 오금이뜰로 퍼져나가던 드럼 비트, 가을밤 보름달이나 별빛보다도 감미로웠던 전자 기타의 선율은 그 자체로 신세계요, 문화 충격이었다.
그 당시 라디오나 TV를 통해서도 다양한 포크송, 밴드음악을 접했지만 200W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웅장한 사운드와는 감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필자 기억으로 첫 콩쿨대회 사회는 부적 지밭에 사시던 여홍섭 씨가 맡았다. 적당한 끼와 준수한 용모, 애드리브로 콩쿨대회 무대를 재미있게 이끌어간 것으로 기억한다.
드럼을 치던 분은 (필구형) 옥춘이 누님의 남편 황인섭 씨로 기억한다. 단정한 스타일의 샐러리맨 용모였는데 벌어먹기도 힘든 시절에 언제 드럼을 익히셨는지 그 열정이 놀라웠다. 아마 인섭이 형님은 그때의 인기를 등에 업고 옥춘이 누님께 대시한 끝에 사랑을 얻으셨던 것으로 추측한다.(사심 많은 드러머^^)
내게 강한 인상을 남긴 분은 기타를 치던 윤석산(58년생 추정)이었다. 하도리에 사시던 그분은 풋개와도 왕래가 잦았던 분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오브리(obbli, 즉석 연주)수준이었겠지만 우리는 그분의 기타 연주를 통해 진정한 락의 세계를 경험했고 일렉기타라는 새로 악기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주로 불렸던 노래는 나훈아의 ‘가지마오’ ‘고향역’ ‘찻집의 고독’ 남진의 ‘그대여 변치마오’ ‘님과 함께’ 이현의 ‘잘있어요’ 등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출연자들의 면모도 조금씩 바뀌었다. 원조 MC인 여홍섭 씨의 마이크는 몽치형님(이희연)에게, 점잖은 비트와 격조 있는 드럼을 구사했던 황인섭 형님의 스틱은 윤여송(1961년)에게로 넘어갔다.
그 사이에 점잖게 노래만 부르던 무대는 1980년대 디스코 열풍을 반영해 출연자의 80%가 댄스곡만 불렀다. 물론 현란한 디스코 춤판과 함께.
그나마 논산군(당시) 당국, 경찰서 허가 문제와 마을 어르신들이 승인 여부 등으로 콩쿨대회는 매년 열리지는 못했다.
몇 해마다 한 번씩 펼쳐지는 마을 축제이자 이벤트였지만 그 시절 우리 동네 콩쿨대회는 당시 공중파에서 유명하던 ‘영 일레븐’이나 ‘젊음의 행진’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우리에게 많은 추억거리를 가져다 주었다.
우리 동창 윤여선(1963년)이가 중3 때 무대에 올라가 장은숙의 ‘함께 춤을 추어요’를 불렀는데 반주를 맡은 기타리스트가 깜짝 놀라며 ‘엄지척’을 해주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고 콩쿨대회에 매료되었으면서도 정작 필자는 한 번도 무대에 서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 석면이와 나는 큰 용기를 내 계은숙의 ‘노래하며 춤추며’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2분 남짓 노래가 끝나고 밑으로 내려왔을 때 남은 것은 한없는 부끄러움과 ‘나는 무대 체질이 아니구나’ 하는 뚜렷한 결론 뿐.
#. 생애 최고의 음식을 들라면 난 어릴 적 먹었던 매운탕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할 것이다. 단백질 궁핍 시절 물고기야말로 최고의 프로틴(protein) 공급원이었고 최상의 구황(救荒) 음식이었다.
별 반찬거리가 없던 시절 노성천 돌 틈을 10분만 뒤지면 붕어 10여 마리는 쉽게 잡았고, 수심이 얕은 연산내에선 맨손으로 뛰어다녀도 한 냄비는 금방 채울 수 있었다. 어른들이 활치(반두)나 투망을 써서 큰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았다면, 아이들은 돌틈을 뒤지거나 대나무로 내려쳐서 조금씩 잡았다.
또 장마가 지나가고 물이 빠지면 ‘솜방망이’라는 걸 했는데 이 사냥법은 솜에 석유를 묻혀 횃불을 만들어 그 불빛으로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횃불잡이가 맨 앞에서 불을 비추면 저격수가 따라가다 물고기가 나타나면 톱으로 내려쳐 잡는 방식이었다.
메기, 가물치, 뱀장어 같은 고급 어종을 쉽게 잡을 수 있는 방법으로 당시엔 무척 획기적이고 효율성이 높은 사냥법이었다.
천렵을 할 때 보통 우린 고추장과 간단한 양념만 들고 나왔는데 그 이유는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다. 냇물 양옆은 그야말로 ‘청과물 시장’이었으니... 큰 돌을 2개 괴고 냄비에 끓여 먹던 매운탕은 이 세상 맛이 아니었다.
여기에 막걸리를 몇 잔 곁들인 후 노랫자락이라도 펼쳐질 때면 단언컨대 ‘우린 천국과 극락 같은 판타지를 너무 일찍 경험했다’는 근거 없는 자부심이 들기도 한다.
고향을 떠나온 지 40년 가까이 되지만 물고기 추억과 관련해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바로 ‘칠어’ ‘갈피리’라는 어종의 정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칠어, 갈피리 하면 무슨 고기를 말하는지 단숨에 알아채지만 마을 밖에선 아무도 그 물고기 정체를 모른다는 것. 네이버, 구글에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이런 물고기는 우리의 우리나라 어류도감에는 나오지 않는다. 오직 70여 가구 380 여 마을 사람들만이 부르던 우리들만의 ‘이름’ ‘언어’였던 것이다.
물고기 하면 게막(그이막) 추억도 빼놓을 수 없다. 이발소와 빨래터 인근에 최재각(1953) 형님 등이 볏짚으로 움막을 지어 놓고 그물을 관리했다. 그 움막은 밤에는 재각이 형님 업무 공간이었지만, 낮에는 우리들이 놀이터이기도 했다.
#. 풋개 세 자매 이야기도 재미있다.
“세 자매, 3동서가 한 마을에 살게 됐으니 잔치 한번 해야지.”
이 말은 속담도 아니고, 필자가 지어낸 말도 아니다. 1976년 고용근(1963) 모친께서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을 때 동네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한 소리다.
1970~90년대 마을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겐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김용대(1965)의 모친 황인수 여사님, 유병태 (1961) 모친, 고용근 모친은 친자매 지간이다.
손위 관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용근 모친이 맏언니인 듯하고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재밌는 것은 세 자매 모두 이곳이 고향이 아니고 각자 출가했다가 따로따로 우리 동네로 이주했다는 사실.
필자의 기억으로는 김용대 모친이 박종열(1953) 씨 집으로 이사를 온 게 1970년대 초반쯤으로 세 자매 중 가장 입향(入鄕)이 빠르다.
가마뜰에 살던 10여 가구가 우리마을로 단체로 이주를 해온 것이 1970년대인데, 병태 모친은 그 무렵에 풋개에 오셨으니 두 번째 이주자인 셈이다.
1976년도에 용근 모친께서 병수형님 옆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세 자매 한마을 거주는 마지막 퍼즐을 맞추게 되었다.
보통 남자 형제들은 한 마을로 분가(分家)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각기 타지로 출가해 일가를 이루었던 자매들이 한 마을로 합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이런 ‘희소성’ 때문에 필자가 당시 담벼락 밑에서 들었던 ‘잔치 한번 해야지’는 조금도 이상하거나 억지스런 말이 아니었다.
물론 이 세 자매 외에는 3동서도 계셨다. 고영록, 김만수, 유상목 어르신들인데 모두 고인이 되셨다고 한다.
이 세 자매 스토리를 한 세대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마을에 또 하나의 세 자매와 만난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기도 힘들고, 또 글로 옮겨도 60~70대 외에는 잘 모르실 것이다.
어쨌든 어차피 세 자매 이야기가 나왔으니 ‘원조 세 자매’ 얘기도 한 번 정리해 볼까 한다.
옛날 은정이(1963)집 자리에는 단양 우(禹) 씨가 살았다. 지금도 집터가 크지만 옛날엔 규모도 크고 살림도 남부럽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집의 장녀는 우기녀(김용진 교장 선생님 모친), 차녀는 우영례(한준수, 양수 모친), 세 번째는 배못골에서 살다가 구룡동으로 가신 김선중 어르신의 모친인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막내는 우종록 씨로 일찍이 세간을 정리해 서울 구로동으로 이사해 서울 사람이 되었다.
필자에게 큰이모 할머니였던 우기녀 할머니는 진날에 사셨다. 다복하셨던 할머니는 자녀들도 다 잘 돼 큰아들(김용진)은 교장, 큰손자(김윤중)는 대학 교수가 되었다.
작은 이모할머니는 1960년대 배못골에서 과수원을 하셨다. 어릴적 김선중 아저씨가 짐자전거에 과일과 채소를 잔뜩 싣고 집 앞을 지나가면 ‘아저씨 배차(배추)씨 논산장에 ○○씨’라고 놀렸던 기억이 난다. 후에 작은이모 할머니는 부적 구룡동으로 옮기시고, 선중이 아저씨는 서울 구로동으로 이사를 가셨다.
필자의 할머니 우영례 씨는 96세로 인천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필설로 옮기기 힘든 고난한 삶을 살다가 가셨다. 물론 그 시절 어르신들은 다들 그렇게 살았다지만... 40대 나이에 홀로 되어 오남매를 키우시느라 갖은 고생을 다 하셨다.
육체적 고생도 고생이지만 아들, 딸, 며느리, 사위들을 앞세우신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이 아닌가 한다.
앞서 소개한 세 자매들은 1970년대 비슷한 시기에 함께 이주해 10년 넘게 한 마을에서 거주했지만, 위의 원조 세 자매는 배못골에서 부적으로, 진날에서 대전으로, 주막거리에서 대구로 이동이 잦으셔서 한 마을에 함께 산 기간도 짧았고 기억도 희미하다.
하지만 유난히 우애가 좋았던 세 자매는 동네잔치나 경조사에 함께 다니며 돈독한 자매애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출산율 0.6시대 한 마을에 세 자매 동거 신화는 다시 재현될 것 같지 않다. 세 자매를 두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된 시대에 출가한 여형제가 다시 한마을에서 합체할 가능성은 이제 ‘통계’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 난 요즘도 가끔 악몽을 꾼다. 꿈속에 난 주막거리 회관집 유리 창문 앞에 서 있다. 창(窓) 안의 사람들은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고, 나를 집안으로 들이지도 않는다.
“아 어떡하지? 오늘 밤 갈 데가 없는데... 둥지, 뿌리를 잃은 나는 허전함에 사무친다.
난 이런 똑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는 데 이는 이방인이 돼버린 나의 처지와 나를 맞아 주지 않는 집안의 사람들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이런 악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상갑은?=1963년 태어나 주막거리에서 자랐다. 선친은 한준수, 모친은 황연출, 형은 ‘개다리춤’을 잘추던 한상일이다. 할머니는 우영례, 삼촌은 한양수(4년 전에 돌아가심)이다.
왕전초등학교, 기민중학교, 갱갱이상고(강경상고)를 졸업하고 재수를 한 후 대구의 한 사립대를 나왔다. 대전의 충청투데이, 대구매일신문을 거쳐 현재는 포항 경북매일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