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듯 교정의 수선화도 지고 수국이 탐스럽게 피었다.
검은색교복은 하얀교복으로 바뀌었다.
오늘 치른 기말고사에서 김도곤은 대부분의 학과시험은 평소의 성적과 다름없었지만 영어시험은 평소보다 향상된 정답을 써냈다. 물론 완전한 채점이 끝나고 공식 발표된 성적은 아니었지만 김도곤의 답들은 놀라울 만큼 정확한 정답이 많았다.
지난 석 달 동안 제2영어선생님 오금자로부터 방과 후 특별과외를 받은 효과였다.
오금자란 영어선생님의 본명이 아니다.
학생들이 오답하면 여지없이 손때가 묻은 60cm대나무자로 손바닥의 오금을 때린다 해서 알까기가 붙여 준 이름이다. 엄한 여선생님이지만 실력은 대단한 선생님이었다.
오금자선생님은 원칙이 법칙이었다.
교육에는 예외가 없다는 철학을 가진 선생님이었기에 수업 받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제2영어시간 50분이란 연옥에 비견할 만큼 지루하고 긴장된 시간이었다.
송이버섯사건이 있던 날 중국집에서 미술선생님이 김도곤에게 오금자선생님의 특과 제의했을 때, 죽었다 싶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술선생님에게 신뢰를 받으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순간의 선택이 미술선생님의 관심 밖으로 쫓겨난다는 것은 자명했다.
허지만 자신의 능력에 비추었을 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오금자냐?
오드리햅번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국어도 힘들고 난해한데, 영어는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속처럼 암담했다.
“두각을 나타내는 운동선수의 지능은 평균치보다 높다. 도곤이 너는 분명 학습저능아 일뿐 지수저능아는 아니다. 언젠가 네가 학문에 눈 뜨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고 선생님은 믿는다.”
지난 2년간 이렇게 믿어주던 체육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기 사는길이데이. 나는 니하고 약속한대로 고등학교는 보냈다. 인자 졸업하몬 군대갔다와서 약속대로 저노무 송아지나 불리거라. 니 장래는 저노무 송아지한테 달맀다는 거 한시도 있지 마라.”
아버지의 추상같은 당부도 떠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도곤의 고민은 혼란스러움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싸우고 홧김에 유도부에 들어간 후, 대회 때마다 상위권에 들거나 우승한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체육선생님은 김도곤의 기술이 전수기술에 기초를 두었지만, 정통기술이 아니란 것을 발견했다. 김도곤의 기술들은 모두 스스로 개발해낸 응용기술이었던 것이다.
체육선생님은 첫눈에 김도곤이 유도묘목이란 것을 확신했다.
“너는 내 한을 풀어 줘야한다. 꼭 국가대표선수가 되어 오륜금메달 가져와 국가에 충성하고 내게 보은해다오.”
소용돌이치는 체육선생님의 음성이 김도곤의 혼란을 깼다.
그렇게 김도곤은 미술선생님 앞에서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3개월간 김도곤은 미술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허지만 말처럼 결심처럼 김도곤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약 체육선생님이 오금자선생님의 특과레슨 받는 시간에 교실 문을 지키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 시간까지는 거의 타의에 의해 강제 노력한 시간이었지만, 진짜 김도곤이 영어에 눈뜨고 학습 집념을 갖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김도곤을 완전히 개혁하는 두뇌혁명의 시초였다.
4교시까지의 중간고사를 마치고 내일마지막 시험을 위해 김도곤은 유도관을 들리지 않고 통학열차를 타기위해 공설운동장 종점에서 버스에 올랐다.
등교시간보다 수월했으나 앞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붐비는 버스가 아미동역을 막 출발했을 때였다.
문득, 김도곤의 눈에 달칵 잡힌 것이 있었다.
맞은편 자리의 여학생 가방에 구렁이처럼 기어들어가는 손을 본 것이다.
김도곤은 단팥죽 사건이 나던 날, 할머니의 바구니에 들어가던 자신의 손을 회상하고 조용히 점퍼차림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이 쏘우 잇.”
김도곤의 괴상한 말에 눈을 끔벅거리며 포마드로 빤질빤질한 남자가 쳐다봤다.
“테이크 유어 핸드.”
“?”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남자에게 앞에 앉은 여학생이 번역했다.
“아저씨. 손빼래요.”
순간 남자는 흉악한 눈으로 김도곤을 째려보다 버스가 충무동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하차했다. 버스에서 내린 남자가 주먹사이에 엄지손가락을 집어넣어 김도곤에게 욕을 했지만 차창 넘어 멀어지는 그 남자를 향해 김도곤은 빙긋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앞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김도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영어 참 잘하시네요.”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칭찬에, 그것도 명문고 여학생으로부터 듣자 가슴이 터질 것처럼 흥분했다. 그의 흥분은 자신에 대한 대견함이었다. 그러나 김도곤은 시합 때 상대에게 하듯 내색하지 않았다.
“아입니더. 별로 몬해예”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여학생이 한 번 더 물었다.
“근데, 그 아저씨한테 왜 손빼라고 하셨어요?”
김도곤은 통학열차에서 할머니가 했던 것처럼 그 점퍼남자의 소매치기를 모른 척해주고 싶었다.
“머시마가 보켓또에 손 치박고 있어서 그랬심니더. 머시마 손은 감차믄 안되거든예. 머시마 손은 할 일이 많다 아입니꺼.”
“아는 사람이었어요?”
“예. 잘모르지만 아는 사람입니더.”
알 듯 말듯 여학생이 곱게 웃었다.
점퍼차림의 소매치기에게 영어로 말한 것은 김도곤의 작은 미래였는지 모른다. 그 작은 미래는 오금자선생님의 영향이었다.
오금자선생님은 특과 중 잠시라도 허튼짓하면 "I saw it!" 입에 손가락만 넣어도 “Take your hand!" 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대나무자로 주의를 줬는데 그날 소매치기에게 오금자선생님의 잔소리가 무의식중에 인용됐던 것이다.
그때부터 김도곤은 미술선생님의 'you can do it.' 을 ‘I can do it.' 으로 수정했다.
소매치기로 인해 여학생 앞에서 당당해진 이후 김도곤은 오금자선생님이 지치도록 영어에 열정을 불태웠고, 오금자선생님은 그런 김도곤으로 인해 교육자로서의 성취감을 가졌다.
오늘 기말고사 영어시험을 생각보다 잘 치룬 명태가 자랑했다.
“야! 34번문제 어려웠재? 답은 B가 정답이다. 맞은 사람 있나?”
김도곤이 말했다.
“허! 자썩! 그 문제는 A가 정답이다.”
명태가 뱀처럼 혀를 흔들고 말했다.
“워따메! 천재 났네? 니는 연필굴리기 천재아잉가베? 허지만 매일 운이 따라주는기 아이재. 운없는 날도 있능기다.”
짱구가 끼어들었다.
“야! 둘다틀맀데이. 내가 참고서 칸닝구했는데 정답은 D더라. 너그 우야꼬?”
명태가 짱구를 흘겨보며 말했다.
“차라! D가 맞으몬 내 손가락에 장지진다. 정답은 B가 학씰하다.”
김도곤이 확고한 신념으로 받았다.
“좋다! 너거 맞으몬 내가 손가락에 장지지고, 내가 맞으몬 너그 두 놈 다 손가락에 장지지는 거 내기할 수 있나?”
“좋데이! 니 손가락 날리몬 유도 몬할낀데? 우야꼬?”
“김해똥돼지 드디어 뱅신되네! 아이고야!”
명태와 짱구가 괴성을 질렀다.
소매치기 사건이후 김도곤은 통학열차 안에서 통학생들의 일명‘교통순경’도 그만두고 영어사전과 씨름했고, 심지어 잘 때도 영어참고서를 얼굴에 덮고 잤다.
오늘 김도곤이 자신 있게 대답한 34번 문제는 얼마 전 오금자선생님께 배운 문제여서 A가 정답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김도곤은 두 친구의 손가락에 장 지질 일이 흐뭇해서 입이 찢어졌다.
그러나 다음날 예기치 못한 또 하나의 사건이 교무실에서 수류탄처럼 터졌다. 그 수류탄은 김도곤의 지리시험 문제 답안지였다.
뿐만 아니라 이 폭발로 인해 김도곤의 별명도 바뀌고 말았다.
첫댓글 하면 된다라는 말이 김도곤 학생을 두고 난 말인거 같슴니다.
미술선생님 참좋은 선생님으로 생각 되는 군요.
영어 가외를 시키고 덕분에 짧은 회화 덕분에
명문 여고 이쁜 여학생과의 대화도 할수있고
김도곤의 또하나의 별명이 기대해 봅니다.
제미있게잘읽었슴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선생님들 교단에 서서 가르치는 것만 아니고 밤낮없이 제자들 미래를 위해 고민하십니다.
진보성향의 젊은 선생님들이라해도 제자를 가르친다는 사명은 다 똑 같습니다.
다만 사회가 선생님들을 혼란하게 할 뿐이라 생각하며 부모의 가정교육이 너무 핵사고 우선이라 잡음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며, 저는 선생님들의 적당한 매도 권한으로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폭력과 매는 질급이 다른 것이니까요.
그런데 요즘 부모나 학생은 선생님의 매를 폭력으로 여기는 것이 먼 미래와 학생들의 장래에 독이 될것이라 믿습니다.
오늘도 고운 시간으로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과외 선생님 오금자 영어 교육을 짧짤 하게 받은것 같슴니다.
짧맑한 회화도 한마디씩 하구요..
김도곤 학생 우수 학생으로 잘자랐으면 좋겠슴니다.
고맙습니다.
김도곤을 응원해주셔서 힘이나네요.
오늘도 행복하세요
사제지간의 정겨움이 넘처 나네요
좋은글 잘보았슴니다.
행복한 저녁 시간 되세요^^
부모보다 더 친근한 것이 사제지간 아닐까요?
고운 저녁시간되세요
옛부터 선생님의 그늘도 밟지 안아야 한다고 했슴니다.
김도곤 학생 착하기 그지 없슴니다
요즘 애들 같으면 육중한 몸매에 운동선수까지 되는 김도곤이
선생에게 폭력을 휘둘렀을걸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미있게 잘읽었슴니다.
선생님에 대한 불손한 태도는 예전엔 감히 엄두도 못내던 것들이었지요.
허지만 요즘 세대는 부모들이 망치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을 쓰게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