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위대한 시계 제작자’ 이 말은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인간사를 . 주재하는 신의 위대한 섭리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주의 모든 것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완벽한 인간 이성의 능력을 신의 개념으로 대치하고 있을 뿐이다. 이성의 시대라 불리는 18세기 초기에 쓰여진 ‘로빈손 크루소’는 이성적 합리성에 근거한 서구문명의 근대화 과정을 치밀하게 반영한 기록물이며,근대화 과정에 내포된 서구역사의 역설을 드러낸 소설이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손 크루소’는 우리가 어린시절 동화책으로 친숙했던 작품이다.무인도에 홀로 표류하여 거친 자연과 싸우며 삶을 꾸려가는 인간 불굴의 정신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서구 역사의 역설’ 드러내
유럽 서구세계가 국외로 눈을 돌려 지구의 색다른 지역을 탐험하는 모험담이 당시에 유행했었는데,로빈손 크루소의 모험담도 이러한 사회 물결의 한 흐름이었다. 물론 ‘로빈손 크루소’는 이국적이고 낯선 세계에 대한 서구인의 호기심과 동경을 반영한 단순한 동화책 차원의 모험담은 아니다.인간의 손길이 닿아 본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외딴 섬에서 주인공은 인간 문명의 씨앗을 하나씩 뿌려나가며 그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서구문명이 이제까지 밟아온 근대화 과정이 이 사실주의 작품에서 원시 자연세계를 배경으로 또다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는 이렇게 외쳤지만 루소는 디포보다 1세기가 뒤진 낭만주의자였다.근대화를 이끈 서구문명의 정신은 인간 이성이라고 하겠으며 감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자와 대립된다.자연히 인간 이성의 힘을 신뢰하였던 디포는 크루소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자연을 정복하라!”
루소에게 자연은 인간의 정신적 고향이다.인위적 문명의 왜곡된 껍질을 벗고 인간 본연의 자연스런 원시상태로 되돌아 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성주의자 디포에게 원시 그대로의 자연이란 혼돈과 암흑으로 인간 이성의 빛을 이용하여 개간하고 개발해야 할 대상이다.문명의 힘으로 무지와 야만의 원시성을 벗어나 질서를 부여할 객체이다.
크루소가 처음 부딪친 무인도는 야수가 울부짖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암흑의 존재였다.첫날 크루소는 나무에 올라가 은신하며 밤을 지내야 했다.다음날부터 크루소는 열매를 모아 양식으로 저장하고 야수로부터 몸을 방어할 거주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들염소를 붙잡아 울타리를 만들고 길들였으며 씨앗을 뿌려 밀을 키우기도 하였다.
○지배탈출지는 ‘배제대상’
이때 가장 도움이 됐던 것은 난파된 배에서 가져온 연장이었다.연장의 도움을 받아 자연을 개간하며 생활의 필수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연장이란 바로 서구 문명사회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무인도에 서구문명을 그대로 이식하는 작업이 된다. 크루소는 생산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서구 중산층의 전형적 표본이다.근대화를 이끈 중심세력이 바로 중산층이었다.개인 재산의 축적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여 자본주의의 이념을 밀고 나간 것도 중산층의 입장과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하였다.
이들에게 근대화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구체제의 잔재를 털어버릴 미래지향적 꿈이었으며 인간 이성의 무한한 잠재력을 실현시킬 유토피아였다.이성의 힘으로 혼자 충분히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징표였다. 서구문명의 근대화 과정에 내포된 역설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절대시하는 극화작업에서 발생한다.이성의 지배를 벗어나는 존재는 모두 배제돼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다.나와 대립되는 자를 타인이라고 부르듯이 근대성에 대립되는 비합리적 사유는 이성의 타자가 된다.자연이란 근대성을 추구하는 서구인에게 타자로 다가온다.
○‘또 하나의 문명화’ 교육
자연과의 친화가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대립의식이 근대화 정신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 근대문명의 역설은 크루소에서도 발견된다.크루소는 어느 날 해변 백사장에서 인간의 커다란 맨발자국을 발견하고 맹목적인 공포에 떤다.이제까지 자신과 대적하던 자연을 하나씩 지배하며 길들여 갔던 크루소가 처음으로 자신과 문명의 힘에 대한 자신감을 잃은 사건이다.두려움으로 크루소는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이 침입자를 먼저 공격하여 살해할 악의적 집념에까지 사로잡힌다.자신이 부정했던 비합리성에 오히려 그는 예속되고 만다. 자신의 지배영역 밖에 놓여 있는 존재는 크루소에게 대립과 적의의 대상이다.자신이 지배할 수 없는 대상은 모두 야만과 암흑의 존재로 부른다.서구인의 사고 속에 이름지어지지 않은 존재는 모두 거부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서구의 이성과 합리성 뒤편에는 비합리성이란 타자가 내포되어 있다.타자란 자신과 관련없는 영원한 이방인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도사린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타자의 존재들이 실제로 이 섬에 도착한다.프라이데이는 식인종들의 포로 중에서 크루소가 구출한 흑인이다.크루소는 이 흑인에게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를 길들여 문명인으로 교육시킨다.교육이란 또 하나의 문명화 과정이다. 프라이데이를 문명인으로 만드는 과정은 그를 그나름의 독립된 주체로 형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구인의 모습을 주입시키는 과정이다. 참다운 자아인식으로의 해방이 아니라 프라이데이는 크루소가 가르치는대로 말과 행동을 모방하며 흉내내는 앵무새이다. 앵무새의 반응은 크루소가 26년간 갈망하던 참다운 인간의 목소리는 아니다.이름 이외에 크루소가 가르친 두번째 단어는 ‘주인님’이라는 자신의 호칭이다.두 사람 사이에는 지시하고 따르는 상전과 하인의 상하관계가 성립된다.
○타자에 대한 ‘공존의 세계’
생명의 은인이었기에 프라이데이는 그의 상전에게 순종하며 복종하지만,두 사람은 결코 동등한 결속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프라이데이는 크루소의 모습을 둘러쓴 영원한 타자일 뿐이다.명령과 복종의 서구 제국주의 역사가 시작되는 전초전이다. 한때 우리는 서구 근대화 과정을 뒤따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이제는 세계화의 구호속에 매달리다 때로 잘못되면 IMF를 맞기도 한다. 근대화의 이념인 무지와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명제이지만,그 화려한 명제 뒤에 숨어있는 비합리적 타자의 모습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진정한 근대화란 타자에 대한 지배,독점,배제가 아니라 서로 화합하고 인정하는 공존의 세계이다.이것은 또한 세계화의 폭넓은 도약의 순간에 우리가 되새겨 보아야 할 명제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