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침착하게, 침착하게. 겨우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것뿐인
데,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야? 침착하게, 침착해야지, 라이데이나.'
라이데이나는 아까부터 방문 앞에서 마치 주문을 걸 듯 자신에게 자꾸
만 되 뇌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가족들과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가지는 것 뿐이야. 그리
고, 왜 이렇게 위축되는 거니, 라이데이나. 너는 이 루비오 왕국의 제1왕
녀 라이데이나 루비오야. 나를 위축되게 하는 자는 적어도 이 왕국 안엔
아무도 없어. 이렇게 자꾸만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나는 절대 너
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 왕녀 라이데이나. 그리고 무엇보다.'
라이데이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무방비 100% 상태의 아르덴을
돌아보았다. 뻣뻣하게 굳은 상태의 그녀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느긋한,
얄미워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르덴은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잖아. 그런데
네가 긴장해 버리면, 대체 어쩌겠다는 거지?'
물론 그녀의 입장과 아르덴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었다.
라이데이나가 앞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 할 <가족> 중 한 명은 아직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한, 자신과는 어색한 관계의 계모였으며, 또 한 명
은 자신에게 너무나도 냉정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반면, 아르덴이 앞으
로 저녁 식사를 함께 할 가족은 자신에게 과하다 싶을 만큼 다정한 친어
머니, 그리고 역시 자신에게 무척 자상한 모습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
리고 무엇보다, 아르덴은 그 동안 이들과 자주 식사를 함께 하곤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높은 자존심은 울보에다 실수 투성이의 아르덴보다 멍청
하게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은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복도에 걸린 화려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 안에는 흰색의 화려하진 않지만 심플한 디자인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초록빛 눈동자의 눈부신 금발의 소녀가 잔뜩 굳은 모습으로 서 있
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웬 바보 같은 모습이람.
자신에게 이런 바보 같은 표정이나 위축된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
다. 자신은 16년간을 고귀한 왕녀로 살았다. 남의 분위기나 맞추기 위해
실없이 웃는 광대는 될 수 없었다.
라이데이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라이데이나는 평소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자신이 절세 미녀라고는 생
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이 오히려 더 좋다고 생각했다. 진한
향기의 장미는 아름답고 남을 쉽게 홀리기도 하지만, 쉽게 질려버리는
법이다. 그리고 그러한 장미는 천박한 창녀들에게나 어울린다는 것이 그
녀의 평소 장미에 대한 지론이었다. 그 면에서 그녀의 첫눈에 탄성을 터
뜨릴 만한 뛰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기품 있고 우아한 아름다움이나 도도
한 분위기는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당당하고도 위엄 있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폈다.
'그래. 이제 좀 낮군.'
거울 속에는 평소의 당당한 자신이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던 것
이다. 그녀는 슬쩍 미소지었다.
"라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거울보고 실실 웃기나 하고. 거울 속
의 자신에게 취하기라도 한 거야?"
갑자기 들려오는 아르덴의 장난스런 목소리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남이 알아선 안 될 것을 들켜버린 아이의 심정으로, 그녀는 창피
함과 불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자연 그녀의 입 속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
가 없었다.
라이데이나는 냉랭한 목소리로 아르덴에게 톡 쏘아붙였다.
"누가 기다리라고 했어? 기다리기 지루하면 먼저 들어가던가. 왜 나한
테 시비를 거는 거야?"
라이데이나의 가시 돋친 대답에 아르덴은 울컥하는 것을 느끼며 화난 표
정으로 소리쳤다.
"하, 누가 시비를 걸고 있는데, 지금? 왜 그렇게 하는 말마다 가시가 돋
친 건데! 것도 여자애가 말이야! 그래가지고 어디 시집이나 갈 수 있겠
어?"
라이데이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소 그녀의 장미에 대한 지론 말고도, 그녀에겐 또 다른 아주 분명한
지론-혹은 사고 방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여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식의 아주 꽉 막힌 주장을 해대는 자들은 모두 없어져야 한다
는 것이었다. 이 루비오 왕국에 여왕이나 여가주가 인정된 지가 언젠데-
물론 사소한 제약이 있긴 했지만. 그리고 그것이 일반 백성들에게 그리
큰 영향이 미치지 않기는 했지만- 그런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를 하는 자
들이 아직 있다니!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도저히 참
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도 아주 사소한 발언에 광분하는 자신을 어색해 하면
서도 아르덴에게 소리쳤다.
"넌 남자가 되가지고 그렇게 울보에다, 겁쟁이, 거기다가 금상첨화로 속
까지 좁아 어쩌려고 그러니? 네가 아무리 이 왕국의 제1왕자라 할지라
도, 그래가지고는 장가는 어림도 없어! 나이 들어 창피 당하기 전에 일찌
감치 신전으로 들어가서 평생 수절하지 그러니?"
아르덴 또한 지지는 않았다.
"야, 넌 그렇게 매사에 부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으니까 안돼는 거야!
그렇게 걱정이 많아서야…."
"제발 그만둬 주십시오, 두 분!"
또 한마디 쏘아주려던 라이데이나는 별안간 들려온 시종장의 커다란 목
소리에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르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르덴의 늙은 시종장 레베트 프리지오는 설교하는 듯한 표정으로, 또
한 실제로 설교를 하며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대체, 아랫것들 앞에서 이 무슨 체통 없는 언행들이십니까! 그것도
폐하께서 거처하시는 궁의 정문 앞에서요! 그리고, 아르덴 전하께서는
그렇다 치시고-<뭐야!> 아르덴이 광분하여 소리쳤다-, 라이데이나 왕녀
전하께오선 왜 갑자기 그렇게 채신없이 구셨던 겁니까? 하여간, 페하께
오서 아신다면…."
레베트는 옆에서 왜인지 사색이 되어 필사적으로 말리는 라이데이나의
시종장 아사트로를 모르는 체하며, 또한 바들바들 떠는 자신의 주인 아
르덴을 보지 못하고 큰소리로 잔소리를 계속했다.
"감히 폐하의 궁에서 큰소리가 나게 하시다니, 그것도 남매지간에 싸우
느라 난 소리라니! 허허, 이것은 일반 여염집에도 의례 없는 일이라 하온
데, 그런데 어찌 이 지엄한 왕궁 안에서 그런 일로 큰소리가…."
라이데이나는 온몸이 벌게 진 채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부들부들 떠는
자신을 느꼈다. 감히, 저 천한 것이 아랫것들 앞에서 자신에게 뭐라고
말하는 거야? 감히, 감히 저것이….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드는가, 일왕자궁의 시종장 레베트! 누가 상전에
게 설교를 하라고 가르치더냐! 네가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별안간 터진 왕녀의 추상같은 호통에, 레베트는 순간 오금이 저리는 듯
한 충격을 받았다. 레베트는 멍한 표정이 되어 서릿발같은 왕녀의 위엄
있는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일왕자궁의 시종장이 되어 아르덴을 모
시기 시작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16년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엄한 꾸
중이었다.
라이데이나는 늙은 시종장의 얼빠진 얼굴에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일갈
을 토했다.
"내가 누군가. 일왕자는 또 누군가. 나는 이 루비오 왕국의 왕위 계승
서열 제1위의 정통왕녀일세! 일왕자 또한 루비오 왕국 왕위 계승 서열 제
2위의 정통왕자이시고! 그런 높으신 분들께 지금 자네가 뭐라 지껄인 건
가! 일개 시종장이 감히 루비오의 왕자와 왕녀께 훈계를 하는 건가!"
분노로 시뻘개진 라이데이나의 얼굴은 붉게 일그러져 있었다. 옆에서 오
들오들 떨고 있던 아르덴은 잠깐 왕녀를 말릴 틈이 생기자 라이데이나의
팔을 잡고 애원하듯 매달렸다.
"저, 저기, 라이. 그렇게 심각한 건 아냐. 단지 내가 좀 실수가 많잖
아? 그때마다 달려와서 해결해 주고, 또 그때마다 다신 이런 일이 없게
주의를 주다 보니 이렇게 된 거야. 레베트에게 죄가 있다면 자신의 일에
너무 충실했다는 것, 또 주인을 잘못 만난 것뿐이니까 라이도 이만 화
풀어. 응?"
라이데이나는 사랑스런 동생의 애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바뀐 것이 있
다면 오히려 더 화를 내며 분노를 내뿜을 상대를 바꾸었다는 것.
라이데이나는 휙 고개를 돌려 억지로 웃으며 자신의 팔에 매달려 있는
아르덴을 바라보았다.
"너도 그래, 아르덴. 시종장이 주제넘게 나서면 그때마다 이렇게 야단
을 쳐야지, 매번 그렇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우유부단하게 넘
어가니까 네 시종장이 제 주제도 모르고 나서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시
종장한테 훈계를 받아? 그럴 바엔 차라리 목매달고 죽는 게 더 나아. 정
말 넌 어쩌려고…."
"그만 하시지요, 일왕녀 전하."
모두가 극도로 흥분해 있는 상태에 나지막하게 들려온 거의 유일할 침착
한 목소리에 라이데이나는 아르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시종장이 죽을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폐하께서 거처하시는 본궁
의 바로 앞에서 그러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다른 것
도 아니고 가족들만의 단란한 시간을 보내시기 위하여 몸소 이곳으로 오
신 것 아니십니까. 화가 나시는 일이 있으시다 할지라도 너그러운 마음으
로 용서해 주시는 것도 윗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덕목이라 압니
다, 라이데이나 전하."
예의바른 움직임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라이데이나에게 태연자약한 목소
리로 아뢰는 이는 라이데이나와 아르덴의 소꿉친구이자 왕실 친위대원 헤
르데이스 아트슬론이었다.
"헤르데이스 경."
주위를 의식해서인지 이름 뒤에 <경> 자를 꼬박꼬박 붙이는 라이데이나
의 목소리는 조금은 가라앉은 듯 했다.
헤르데이스는 무릎을 꿇은 자세와 침착한 목소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낮
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니 라이데이나 전하, 비록 화나시는 일이 계시다 할 지라도 용서하
시고 전하께서 좋은 마음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주시는 것이 전하나 모
두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알겠으니 일어서게."
언제 화냈냐는 듯이 찬찬하면서도 고요한 위엄이 긷든 라이데이나의 목
소리에 헤르데이스는 조용히 일어섰다.
라이데이나는 차가운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라이데이나는 일별을 고하듯 냉랭한 음
성으로 말하였다.
"다시는 주제넘게 상전을 가르치려 들지 말게.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나
다음에도 이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 나는 절대 자네를 용서지 않을 것이
야. 그리고 어차피 자네는 내 시종장이 아니니, 자네를 처벌하는 것도
내 소관은 아닐 터. 자네의 주인을 바로 앞에 두고 나야말로 주제넘게 나
섰군. 일왕자, 나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게."
금방과는 아주 다른 아르덴을 대하는 태도에 시종들은 물론이고 아르덴
마저도 쩍 굳고 말았다. 그러나 금방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누이는 이런 사람이었다.
16년간 왕녀로, 그것도 왕위 계승 서열 제1위라는 어마어마한 직위를 가
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몸에 배인 위엄과 기품, 당당함. 자신 또한 16년간
을 왕자로 살아왔으며 그도 왕위 계승 서열 제2위라는 대단한 직위를 가
지고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가 없었다.
또한 그녀는 그 대단한 직위에 걸맞게 아주 도도했으며, 또 자존심이 셌
다. 금방의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는 아랫것들은 물론이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우습게 보인다거나 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
어 했다. 아까는 거의 제정신을 잃을 듯한 자존심의 모욕에 흥분하여 시
종들 앞에서 자신을 평소 부르는 대로 <아르덴>이라 칭했지만, 금새 정신
을 차리고 일왕자 어쩌고저쩌고하며 아주 예의를 차리지 않던가. 그녀가
남 앞에서 제정신으로 자신을 <아르덴>이라 칭하며 쉽게 대하는 경우는
오직 그녀의 검술 사범 로우케와 그녀와 그의 오랜 친구 헤르데이스 등
의 앞에서일 뿐이었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로우케는 그녀에게서 아버지
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아
주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그리고 자신이 뭐라고 할 자격은 없겠지만, 그가 그녀로부터 가장 가까
운 사람으로서 객관적으로 그녀를 봤을 때, 그녀는 단지 어른인 척 하려
는 어린 꼬마 아이에 불과했다. 자신에게 주워진 너무 버거운 일들에 힘
겨워 하는 어린 꼬마. 그것도, 그 일들을 수행할 충분한 능력이 있는.
하긴, 이런 말을 라이데이나에게 한다면 자신의 닷새 빠른 누이는 분명
히 <너는 어린 꼬마인 척 하는 갓난아기다>는 등의 핀잔을 줄 것이다. 그
리고 그렇게 반박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박학다식한 그녀와의
말싸움에서이길 자신도 없었거니와-물론 검으로 싸우는 경우에도-, 또
그 말이 진실이었으니까.
"어라? 라이, 헬, 언제 들어간 거야∼! 너무해! 맨 날 나만 남겨두고!"
어느 샌가 본궁 안으로 들어가 버린 라이와 헬을 부리나케 쫓아가는 아
르덴과 그를 쫓아가는 아르덴의 시종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