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조재형 신부
복음; 마르6,17-29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 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Ecclesia est semper Reformanda!)" 저는 이 말을 신학생 때 들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80년대는 저항과 탄압의 시대였습니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요구는 ‘직선제 개헌’이었습니다. 우리의 대통령은 우리의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의지였습니다. 이런 저항의 과정에서 꽃잎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산화하였습니다.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는 공권력에 의해서 사망하였습니다. 공권력은 강하고, 저항의 힘은 약해 보였지만 깨어 있는 시민들은 ‘직선제 개헌’을 성취하였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오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자유와 민주를 맞이하였습니다. 당시 신학교에도 ‘쇄신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매주 식당의 게시판에는 ‘대자보’가 붙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을 연구하였고,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진지하게 토론하였습니다. 교수 신부님들은 신학생들의 열정을 이해하셨고, 후원해 주셨습니다. 어느덧 4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신약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광야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따랐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앞서 구원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도 공권력은 강하였고, 세례자 요한은 약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공권력에 의해서 세례자 요한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예수님에 의해서 선포되는 하느님나라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뜨거운 솥을 식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솥을 뜨겁게 하는 아궁이의 불을 빼는 것입니다. 아궁이의 불을 빼내지 않고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쩌면 뜨거워진 솥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쟁, 이익, 성공, 권력, 욕망, 이기심, 원망, 분노’의 불이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제도를 변경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바꾸어서 일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욕망의 불을 빼내야만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보, 희생, 사랑, 희망’이 있어야 뜨거워진 솥을 식힐 수 있습니다. 불을 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칫 뜨거운 불에 다칠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런 일을 하였을까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섬김, 봉사, 희생, 나눔, 십자가, 죽음’을 통한 부활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때로 디딤돌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과 이웃을 위해서 밑거름이 되는 것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수많은 디딤돌과 밑거름이 있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도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보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고하 하는 구원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건강하고, 부유하고,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질병도, 가난도, 단명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은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많은 성인들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수난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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